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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23년 행20강(21:1-22:29)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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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2회 작성일 23-11-0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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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20 강                                 
말씀 | 사도행전 21:1-22:29
요절 | 사도행전 21:13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 교회에서 보내온 구제헌금을 전달합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구금되어 재판을 받게 되자 가이사 황제에게 항소를 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됩니다. 그는 동족 유대인과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의 생사관을 잘 보여줍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그의 인생관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죽어도 예루살렘에 올라가고자 하는 바울(1-16).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륙하였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서 큰 환난을 겪게 될 것을 미리 알고 만류하는데 한 두 번 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끈질기게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 머물렀습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는데 처녀로 예언을 하였습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였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였습니다. 아가보는 15년 전에 안디옥 교회에 방문해서 예루살렘에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행11:27,28). 그의 예언대로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통치 기간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가보는 선지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그의 예언은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런 그가 바울 일행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발을 잡아매었습니다. 그런 후에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였습니다. 바울의 건강과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미리 알려주신 것을 환난과 박해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바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성령께서 미리 알려주신 것은 고난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대비하라고 알려주신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 알 때 순종해야 합니다. 혹시 환난과 핍박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의 뜻이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환난과 핍박이 있다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리 겁을 먹고 그런 환경에 맞닥뜨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자신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내가 앞으로 부딪치게 될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면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금식하면서라도 준비해서 이를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죽기를 각오하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와 함께 죽기를 각오하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지만 두려워 피하게 되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죽은 딸도 살리실 예수님의 능력을 믿게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바울은 부활 신앙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죽을 것도 각오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서신 여러 곳에서 주님을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고난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분명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그 고난은 장차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고난을 감당하면서까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8:17,18은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그가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구제헌금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또한 자기 백성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9:1-3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로마에 가고 더 나아가 스페인까지 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언으로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고 그 권세를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그 이름 권세를 주셨습니다. 내 힘으로 원수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로 우리는 영적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이름 권세를 의지하여 영적 싸움을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전에서 악한 세력과 붙어야 합니다. 이런 실전이 많아질수록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탁월한 복음의 전사들로 빚어집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양들을 모으고 말씀의 검으로 악한 세력을 대적하고 양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그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습니다.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하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의 집에 머물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구했던 것처럼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당할 결박과 환난을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만일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합당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둘째, 장로들의 인간적인 지혜의 한계(17-26).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몇 가지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즉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보고를 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 편에 서기보다 제 삼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바울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서원한 사람 네 명이 있는데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깍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들은 가난한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희생제물로 1년 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 속죄 제물로 1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 화목 제물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 소제와 전제로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들의 비용을 바울이 부담하면서 함께 결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사람이 바울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바울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였습니다(26).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진지한 권면을 존중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에 대한 전도의 문을 막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제안을 수용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헌금한 돈을 나실인 서약을 한 가난한 신자들의 희생제물 비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바울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 됨을 위해서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유대인 신자들이 바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구제 헌금도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구제 헌금을 받는다는 것은 바울의 사역을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제 헌금 일부를 나실인 결례를 지키는 가난한 신자들을 도와줌으로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불필요한 잡음 때문에 복음을 영접하는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 선교를 위해서 유대인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있는 장소였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보다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전통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이 우리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 언약을 그들이 지키지 못함을 보고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시고 오직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신다는 새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전통을 지키고자 하다가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이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도 핍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바라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온돌방 아랫목 문화를 통해서 공동체를 회복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공동체 운동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셋째, 기회를 얻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바울(27-40). 결례를 행하는 그 이레가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돌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혔습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렸습니다. 천부장이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바울은 기회를 잡아 천부장에게 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인생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자신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까지 찾아갔던 이야기를 합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치었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그가 아나니아에게 가서 눈을 뜨고 세례를 받은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고 사명을 받은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후에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의 빛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 말하는 것까지 듣다가 소리 질렀습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말하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한다는 바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 선교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주의, 선민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소동이 일어나자 천부장이 가죽 줄로 바울을 매고 채찍질을 하며 심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로마 시민은 재판 없이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만약 더 진행시킨다면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줄 알고 그를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였습니다. 이후부터 바울은 로마 시민 신분에 맞는 대우를 받습니다. 바울이 로마법의 보호 아래서 산헤드린 공회원들, 로마 총독들, 헤롯 아그립바 2세 왕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또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에까지 가게 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을 통해서 로마까지 가는 길을 얻게 됩니다. 유대인들과 산헤드린 공회와 총독 앞에서 5번의 심문과 재판을 받으면서 기독교를 변증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무모하거나 헛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은 고귀한 일입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 처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우리의 사역이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는 주님을 통해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라고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부딪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과 만난다는 것이 무척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핍박 없이 예수 믿을 수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냥 예수 믿는 티 내지 말고 세상 사람들하고 비슷하게 살고, 예수님 얘기 안 하고 입 꼭 다물고 있으면 핍박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전하지 않고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님, 형제 자매, 친구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죽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전도는 바이블 아카데미, 추수감사절, 성탄 예배, 학생 연합 수양회에 초청해서 말씀을 듣게 하는 것도 있고, 개인 전도도 있고, 관계 전도도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전도와 관계전도를 주로 합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식사를 대접함으로 친구를 사귀고 환대함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외로워하는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함께 식사를 하고, 그에게 도움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돕는다면 친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뢰 관계가 맺어지면 나의 인생 소감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 페이지 인생소감을 써서 복음 전도용으로 사용하면 좋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고 내가 받은 말씀이 무엇이고 어떻게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목자가 되었는지 나누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면 그것이 곧 전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의 수고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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