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 행19강(20:1-38)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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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19 강
말씀 | 사도행전 20:1-38
요절 | 사도행전 20:31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 고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동안 복음 역사를 어떻게 섬겼으며 양들을 어떻게 돌보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로서 모본이 된 바울의 모습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바울이고 나는 나다”라는 생각을 하기보다 그의 목자생활에 대해서 듣고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바울의 드로아 심야 말씀 공부(1-12). 바울은 에베소에서 소요가 그치자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머물면서 불후의 작품인 로마서를 집필합니다. 로마서는 바울 신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써서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 뵈뵈를 통해 보내면서 그는 로마를 거쳐 땅 끝이라고 하는 스페인까지 가고자 하는 열정을 말하였습니다. 선교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나이를 들수록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했는데 그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바꾸어서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이때 동행자들은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주일 예배와 성찬을 하러 모였습니다.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하였습니다. 바울은 아침부터 시작하여 밤중까지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들을 본받아 청교도들은 주일 예배를 보통 7-8시간을 드렸습니다. 설교시간이 3시간 정도하면 너무 짧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 때문에 평양에서 사경회를 하면 대구에서 쌀을 짊어지고 거기까지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기 위해서 힘써야 복을 받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상을 따라 살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살아 있을 때 삶이 풍성하고 장수하며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런 열정을 회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의 강론이 밤중까지 계속되자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커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를 일으켜보니 죽었습니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 역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차분히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했습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그들은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날이 새어 떠났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하여 그곳으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는 45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오자 자신의 고별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첫째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겸손하게 섬긴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목자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사랑과 섬김입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자신과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신 은혜가 늘 충만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양들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본을 보이며 섬겼습니다. 자기 손으로 일을 하여 번 돈으로 양들과 동역자들의 필요를 공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시며 섬기셨던 것 같이 그도 양들을 낮아져서 겸손히 섬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도록 섬겼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며 죄값을 다 치루신 예수님을 설명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도왔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 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 바울은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 눈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며 죄로 인해 고통하는 인생들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진리를 몰라서 각종 미신에 속아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움에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각종 우상의 종노릇하는 양들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살다가 파멸해 가는 양들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늘 보화보다 이 세상의 일시적인 생명을 누리고 세상의 보화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어리석음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목자 생활을 할 때 내 힘으로 양들을 변화시킬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낄 때 눈물이 납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때 눈물이 납니다. 목자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로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눈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바로 주님의 마음을 알 때입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은밀한 곳에서 울고 계시며 그들을 위해서 통곡하십니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한 영혼이라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눈물로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물로 말씀을 나눌 때 양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눈물어린 목자의 권면을 들을 때 완악한 양들도 마음이 움직이고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찬양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눈물로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셋째,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반대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서 죽을 지경에 처하기도 했죠. 이런 일을 당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 이상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을 훼방하는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욕하면서 감정적으로 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정적인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시험을 참고 인내하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사랑의 특징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자라면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화려한 말솜씨나 지식이나 힘이 아닙니다. 예리한 말씀의 검, 한 영혼을 위한 눈물, 불타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불타는 기도를 드리고, 인내하면서 주님이 맡겨주신 양들을 양육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양은 실력이 아니라 심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넷째,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전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양들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싶은 진리의 보화가 풍성했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유익한 것은 기회가 될 때마다, 또 기회를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회개’는 생각이나 목표나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잘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만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지식적으로만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나서 자기의 삶에 적용을 시켜야 제대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의 이름이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는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무엇입니까? 서강대학교 강영안 교수는 “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통해서 성경읽기와 묵상에 대해서 썼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읽기와 삶을 연결해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관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배워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사람은 똑같이 죄인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타락해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를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되어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살면서 진실한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회개가 없으면 변화와 성장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실 회개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살아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 7:9,10).”
성령께서는 여러 주의 종들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가고자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매여 그의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앞길에는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에게 잡혀 고초를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는 그를 죽이고자 작정한 열심당원들이 40명이나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고소로 인해서 그는 관원들에게 여러 차례 심문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 처하자 로마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로마 황제에게 항소를 합니다. 그 항소 때문에 옥에 2년간 매이고 쇠사슬에 묶인 채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에 가는 바울의 앞길에는 결박과 환난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주저하거나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생명을 바쳐서 완수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세계에 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과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최고의 인생 목적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결박과 환난이 있는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된다면 자신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명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곧 우리의 존재 의미입니다. 사명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시대 영혼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사명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죽는 그날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할 만한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 “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바울은 자신의 인생 막바지에 쓴 디모데후서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그의 앞에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는 이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그들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그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목자들이 이런 바울을 기억하여 목양을 한다면 이단의 공격과 미혹으로부터 양떼들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믿음이 어린 양들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온갖 공격을 해대고 있습니다. 무신론 사상, 물질주의 사상, 각종 이단들이 양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공격을 합니다. 또한 음란한 세상 문화가 우리들을 유혹하여 죄에 넘어지게 합니다. 외부의 적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갈등을 일으켜서 분열을 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낮 눈물로 양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기도 팀을 만들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을 합니다. 그 말씀이 에베소 교회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실 줄 믿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나더라도 주님께서 에베소 성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이때까지 전해준 그 말씀이 성도들을 든든히 세울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돌보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양들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며, 가르쳐준 그 말씀들이 양들을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능력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메시지를 모두 전한 후에 바울은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에베소 장로들은 다 크게 울면서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시는 목자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근심 가운데 배에까지 전송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친히 가르친 대로 살아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양들의 보모가 아니라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어 섬겼습니다. 우리도 좋은 목자의 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0:1-38
요절 | 사도행전 20:31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 고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동안 복음 역사를 어떻게 섬겼으며 양들을 어떻게 돌보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로서 모본이 된 바울의 모습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바울이고 나는 나다”라는 생각을 하기보다 그의 목자생활에 대해서 듣고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바울의 드로아 심야 말씀 공부(1-12). 바울은 에베소에서 소요가 그치자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머물면서 불후의 작품인 로마서를 집필합니다. 로마서는 바울 신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써서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 뵈뵈를 통해 보내면서 그는 로마를 거쳐 땅 끝이라고 하는 스페인까지 가고자 하는 열정을 말하였습니다. 선교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나이를 들수록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했는데 그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바꾸어서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이때 동행자들은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주일 예배와 성찬을 하러 모였습니다.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하였습니다. 바울은 아침부터 시작하여 밤중까지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들을 본받아 청교도들은 주일 예배를 보통 7-8시간을 드렸습니다. 설교시간이 3시간 정도하면 너무 짧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 때문에 평양에서 사경회를 하면 대구에서 쌀을 짊어지고 거기까지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기 위해서 힘써야 복을 받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상을 따라 살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살아 있을 때 삶이 풍성하고 장수하며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런 열정을 회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의 강론이 밤중까지 계속되자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커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를 일으켜보니 죽었습니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 역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차분히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했습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그들은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날이 새어 떠났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하여 그곳으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는 45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오자 자신의 고별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첫째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겸손하게 섬긴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목자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사랑과 섬김입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자신과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신 은혜가 늘 충만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양들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본을 보이며 섬겼습니다. 자기 손으로 일을 하여 번 돈으로 양들과 동역자들의 필요를 공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시며 섬기셨던 것 같이 그도 양들을 낮아져서 겸손히 섬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도록 섬겼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며 죄값을 다 치루신 예수님을 설명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도왔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 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 바울은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 눈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며 죄로 인해 고통하는 인생들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진리를 몰라서 각종 미신에 속아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움에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각종 우상의 종노릇하는 양들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살다가 파멸해 가는 양들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늘 보화보다 이 세상의 일시적인 생명을 누리고 세상의 보화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어리석음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목자 생활을 할 때 내 힘으로 양들을 변화시킬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낄 때 눈물이 납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때 눈물이 납니다. 목자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로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눈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바로 주님의 마음을 알 때입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은밀한 곳에서 울고 계시며 그들을 위해서 통곡하십니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한 영혼이라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눈물로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물로 말씀을 나눌 때 양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눈물어린 목자의 권면을 들을 때 완악한 양들도 마음이 움직이고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찬양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눈물로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셋째,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반대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서 죽을 지경에 처하기도 했죠. 이런 일을 당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 이상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을 훼방하는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욕하면서 감정적으로 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정적인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시험을 참고 인내하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사랑의 특징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자라면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화려한 말솜씨나 지식이나 힘이 아닙니다. 예리한 말씀의 검, 한 영혼을 위한 눈물, 불타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불타는 기도를 드리고, 인내하면서 주님이 맡겨주신 양들을 양육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양은 실력이 아니라 심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넷째,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전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양들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싶은 진리의 보화가 풍성했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유익한 것은 기회가 될 때마다, 또 기회를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회개’는 생각이나 목표나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잘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만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지식적으로만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나서 자기의 삶에 적용을 시켜야 제대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의 이름이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는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무엇입니까? 서강대학교 강영안 교수는 “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통해서 성경읽기와 묵상에 대해서 썼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읽기와 삶을 연결해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관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배워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사람은 똑같이 죄인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타락해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를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되어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살면서 진실한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회개가 없으면 변화와 성장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실 회개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살아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 7:9,10).”
성령께서는 여러 주의 종들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가고자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매여 그의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앞길에는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에게 잡혀 고초를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는 그를 죽이고자 작정한 열심당원들이 40명이나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고소로 인해서 그는 관원들에게 여러 차례 심문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 처하자 로마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로마 황제에게 항소를 합니다. 그 항소 때문에 옥에 2년간 매이고 쇠사슬에 묶인 채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에 가는 바울의 앞길에는 결박과 환난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주저하거나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생명을 바쳐서 완수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세계에 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과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최고의 인생 목적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결박과 환난이 있는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된다면 자신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명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곧 우리의 존재 의미입니다. 사명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시대 영혼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사명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죽는 그날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할 만한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 “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바울은 자신의 인생 막바지에 쓴 디모데후서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그의 앞에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는 이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그들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그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목자들이 이런 바울을 기억하여 목양을 한다면 이단의 공격과 미혹으로부터 양떼들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믿음이 어린 양들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온갖 공격을 해대고 있습니다. 무신론 사상, 물질주의 사상, 각종 이단들이 양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공격을 합니다. 또한 음란한 세상 문화가 우리들을 유혹하여 죄에 넘어지게 합니다. 외부의 적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갈등을 일으켜서 분열을 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낮 눈물로 양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기도 팀을 만들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을 합니다. 그 말씀이 에베소 교회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실 줄 믿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나더라도 주님께서 에베소 성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이때까지 전해준 그 말씀이 성도들을 든든히 세울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돌보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양들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며, 가르쳐준 그 말씀들이 양들을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능력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메시지를 모두 전한 후에 바울은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에베소 장로들은 다 크게 울면서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시는 목자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근심 가운데 배에까지 전송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친히 가르친 대로 살아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양들의 보모가 아니라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어 섬겼습니다. 우리도 좋은 목자의 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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