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 행 14강(15:1-35) 예루살렘 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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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14 강
말씀 | 사도행전 15:1-35
요절 | 사도행전 15:28,29a
예루살렘 공회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과 싸워 복음 진리를 지켜낸 바울과 바나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때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계파로 존재할 것인지 세계화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확립함으로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구원받은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 시간 깊이 생각해 보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율법주의자들의 공격(1-5). 안디옥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이는 모세를 예수님보다 더 높이는 것이요, 예수님의 사역을 무효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아주 힘든 일입니다. 이로 인해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고민하지 않던 할례가 안디옥 교회에서는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복음 외에 무엇을 더하고자 하는 유혹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가톨릭은 믿음 외에 선행을 추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안디옥 교회에 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전통을 따르도록 함으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15:24을 보십시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그들은 본부의 지시 없이 안디옥 교회에 가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형제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헌법재판소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문제로 인해 기독교가 유대교로 남을 것인지 세계화될 것인지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과 할례를 지키면 더 좋은 것이 아닌가 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과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인데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면 예수님이 필요없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유대인들의 경우는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이것이 큰 짐이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오늘날 버전으로 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신자는 일주일 내내 성경 말씀을 한 자도 보지 않습니다. 가끔씩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웁니다. 게임 중독에 빠진 청년도 있습니다. 자기 꿈과 커리어만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면 교회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금생활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세상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을 보면 이들이 정말 구원을 받았을까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느 정도는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기본은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율법 준수가 몸에 밴 당시 할례주의자들이 요구한 배경이었습니다.
둘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6-18).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을 했습니다.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증언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베드로는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하신 것을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 보통 두 그룹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잘 안 되니까 힘들어서 나자빠집니다. 그래서 저쪽 극단으로 갑니다. 지나치게 은혜 쪽으로 치우치는 거죠. 우리는 아무것도 못해, 하나님의 은혜야. 그래서 누가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자만 들어가면 율법주의다 이러면서 반발합니다.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달려 있어 그러면서 나는 나 자빠져 있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노력은 열매 맺는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려는 노력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이거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격이 급하고 강퍅한 사람이지만, 나는 온유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온유가 나를 통해서 이웃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여전히 지혜롭지 못한데 하나님의 지혜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내가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따뜻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나는 여전히 좀 냉랭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자비가 나를 통해 나타나서 내가 따뜻한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이게 나한테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 시작을 해야 될까요? 나한테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열매 맺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이런 모든 속성이 나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두 개입니다. 회개와 순종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항상 뚫려 있어야 하기 때문에 죄가 있으면 즉시 회개해서 통로를 열어놔야 됩니다. 즉시 즉시 회개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통로를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해 주는 죄가 있으면 회개하여 통로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순종을 통해서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홍해를 향하여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순종했습니다. 그때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닥이 마른 것을 보고 건넜습니다. 노력을 해서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가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내가 이분과 관계 속에서 이 분에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십니다.
본래 율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역사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 진리를 알지 못하면 방종주의 혹은 공로주의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여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신앙적인 열심을 쉽게 잃어버리고 마지못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반면에 신앙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교만하여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때론 현실에서 보상이 없을 때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신앙생활은 믿음과 은혜로 시작해서 믿음과 은혜로 마쳐야 합니다.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사랑의 수고를 힘써 감당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간증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신 내용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증언과 선지자들의 말씀이 일치한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였을 때 그들을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계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처음부터 세계 모든 민족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19-35).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결론을 내립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것들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은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면 받아들이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수님 생전에는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고 나서는 22절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 놓고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니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가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순종했을 때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자라서 행위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자라면 삶의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생명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행실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 은혜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찾고, 땅에 속한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고역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고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데 사랑을 하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보여 주시고 확신시킨 다음에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신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한 것은 십계명 다음에 나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함께 안디옥 교회에 보냅니다. 그들 편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성령과 그들은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그들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즉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복음으로 인한 자유를 누리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로 기뻐하였습니다. 이로써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는데 걸림이 된 할례와 율법 문제를 제거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확증하였습니다. 할례 문제를 해결하자 교회는 더욱 힘을 얻고 굳건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를 더욱 강하게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지키며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사랑 안에서 서로 배려하며 하나가 되기를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5:1-35
요절 | 사도행전 15:28,29a
예루살렘 공회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과 싸워 복음 진리를 지켜낸 바울과 바나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때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계파로 존재할 것인지 세계화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확립함으로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구원받은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 시간 깊이 생각해 보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율법주의자들의 공격(1-5). 안디옥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이는 모세를 예수님보다 더 높이는 것이요, 예수님의 사역을 무효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아주 힘든 일입니다. 이로 인해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고민하지 않던 할례가 안디옥 교회에서는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복음 외에 무엇을 더하고자 하는 유혹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가톨릭은 믿음 외에 선행을 추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안디옥 교회에 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전통을 따르도록 함으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15:24을 보십시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그들은 본부의 지시 없이 안디옥 교회에 가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형제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헌법재판소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문제로 인해 기독교가 유대교로 남을 것인지 세계화될 것인지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과 할례를 지키면 더 좋은 것이 아닌가 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과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인데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면 예수님이 필요없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유대인들의 경우는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이것이 큰 짐이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오늘날 버전으로 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신자는 일주일 내내 성경 말씀을 한 자도 보지 않습니다. 가끔씩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웁니다. 게임 중독에 빠진 청년도 있습니다. 자기 꿈과 커리어만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면 교회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금생활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세상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을 보면 이들이 정말 구원을 받았을까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느 정도는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기본은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율법 준수가 몸에 밴 당시 할례주의자들이 요구한 배경이었습니다.
둘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6-18).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을 했습니다.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증언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베드로는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하신 것을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 보통 두 그룹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잘 안 되니까 힘들어서 나자빠집니다. 그래서 저쪽 극단으로 갑니다. 지나치게 은혜 쪽으로 치우치는 거죠. 우리는 아무것도 못해, 하나님의 은혜야. 그래서 누가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자만 들어가면 율법주의다 이러면서 반발합니다.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달려 있어 그러면서 나는 나 자빠져 있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노력은 열매 맺는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려는 노력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이거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격이 급하고 강퍅한 사람이지만, 나는 온유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온유가 나를 통해서 이웃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여전히 지혜롭지 못한데 하나님의 지혜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내가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따뜻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나는 여전히 좀 냉랭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자비가 나를 통해 나타나서 내가 따뜻한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이게 나한테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 시작을 해야 될까요? 나한테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열매 맺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이런 모든 속성이 나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두 개입니다. 회개와 순종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항상 뚫려 있어야 하기 때문에 죄가 있으면 즉시 회개해서 통로를 열어놔야 됩니다. 즉시 즉시 회개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통로를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해 주는 죄가 있으면 회개하여 통로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순종을 통해서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홍해를 향하여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순종했습니다. 그때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닥이 마른 것을 보고 건넜습니다. 노력을 해서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가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내가 이분과 관계 속에서 이 분에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십니다.
본래 율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역사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 진리를 알지 못하면 방종주의 혹은 공로주의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여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신앙적인 열심을 쉽게 잃어버리고 마지못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반면에 신앙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교만하여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때론 현실에서 보상이 없을 때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신앙생활은 믿음과 은혜로 시작해서 믿음과 은혜로 마쳐야 합니다.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사랑의 수고를 힘써 감당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간증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신 내용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증언과 선지자들의 말씀이 일치한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였을 때 그들을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계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처음부터 세계 모든 민족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19-35).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결론을 내립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것들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은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면 받아들이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수님 생전에는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고 나서는 22절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 놓고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니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가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순종했을 때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자라서 행위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자라면 삶의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생명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행실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 은혜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찾고, 땅에 속한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고역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고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데 사랑을 하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보여 주시고 확신시킨 다음에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신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한 것은 십계명 다음에 나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함께 안디옥 교회에 보냅니다. 그들 편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성령과 그들은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그들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즉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복음으로 인한 자유를 누리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로 기뻐하였습니다. 이로써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는데 걸림이 된 할례와 율법 문제를 제거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확증하였습니다. 할례 문제를 해결하자 교회는 더욱 힘을 얻고 굳건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를 더욱 강하게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지키며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사랑 안에서 서로 배려하며 하나가 되기를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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