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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09년 출13강(22:18-23:19) 여호와의 백성이 지켜야 할 계명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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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191회 작성일 09-05-1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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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출애굽기 제13강                                                               

◆ 말씀 / 출애굽기 22:18-23:19
◆ 요절 / 출애굽기 22:27, 23:7

여호와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규 Ⅱ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것처럼 그의 자녀된 우리도 거룩하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삶 가운데서 공의와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자비로운 하나님(22:18-27) : 하나님께서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고 합니다. 무당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악령의 힘과 주술로 초인간적인 능력을 보이는 여자를 말합니다.  남자 무당은 박수라고 부릅니다. 무당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우상숭배를 하도록 능력을 행합니다. 이런 초인적인 능력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은 사단 숭배를 하는 자들까지 있습니다.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이 활발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범신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부정하고 강신술, 영매, 마법 등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으로, 심리 치료로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고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과 신적 능력을 개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술과학문명이 발달한 지금 현대인들의 영적 목마름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코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초월적인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수간의 형태는 목동들이 양과 음행을 행합니다. 중동에서는 양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치는 양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택하여 애인과 같이 삼는다고 합니다. 또 인간이 개와 음행을 합니다. 오늘날도 애완견과 함께 음행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간(獸姦)은 정욕 문제이기도 하지만 신앙 문제였습니다. 수간은 애굽에서 종교의식이었다고 합니다. 고대 문서에 바벨론과 가나안에서도 신에 제사한 후에 혼음, 수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짓입니다. 인간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자 마음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우상을 숭배하고 그 마음의 정욕대로 그 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수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할 때 짐승과 같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드리지 아니할 때 비참하게 짐승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21-27절은 이 세상의 약자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21-24).” 이방 나그네, 과부나 고아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호자가 없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줄 공급자도 없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대변해줄 바람막이도 없습니다. 그들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사람들과 같습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은 매우 건조합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없는 자는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인정도 받지 못합니다. 무슨 일을 시도해 보기가 어렵습니다. 연약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고통으로 신음합니다. 이들의 눈에서는 슬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서 설움과 아픔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이방 나그네들을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중국에서 조선족들이 들어오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정착하고자 합니다. 그들 중에는 불법체류자들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국어 구사도 서툽니다. 이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악덕 업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한을 품도록 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마음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백성들을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도록 섬겨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UBF의 다른 센터들에는 중국 유학생들이 많이 들어와서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홍익대학에도 중국 유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섬길 기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와 고아들을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십니다. 만약 그들을 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맹렬한 노로 갚으시겠다고 합니다. 만약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면 우리의 아내가 과부가 되고 자녀들이 고아가 되게 하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한 하나님의 백성 중에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면 그에게 채권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옷이기 때문에 밤에 덮고 잘 이불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자이십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들이 돈을 꾸고 돈을 빌려준 사람을 저주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돈을 꾸고 축복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가난한 이웃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축복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독일의 어느 도시에는 매우 싼 임대 주택이 있습니다. 그곳의 한 귀족이 집을 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100년 전의 가격으로 임대를 해 주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이 매일 주인과 그 가족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독일이 세계대전 후에 각국의 유학생들에게 공부를 시켜주면서 학비를 받지 않고 생활비까지 대 주었습니다. 그 결과 각국에 친독일파가 생기고 그것이 독일의 영향력을 세계에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그들 나라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리더가 되어서 독일과 관계를 맺고 그러한 정책을 펴게 됩니다. 지금은 학비를 얼마 정도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독일은 가장 친절하고 멋진 국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려면 이방에서 온 나그네들과 우리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합니다. 우리가 이방인들의 우상 관습을 따르지는 않지만 이방인 체류자들을 포함하여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자비는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 약자, 가난한 자, 영적으로 방황하는 자, 파산 상태에 있는 자들을 돌아보는 가운데 한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학생들은 자기 학급에서 가장 소외되고 왕따 당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확장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서서 긍휼을 베푸는 봉사 중에서 80%를 교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동포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계속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옥수수를 보내고 밀국수를 보냈습니다. 이 민족이 통일이 되려면 마음의 통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평화적인 통일, 복음으로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사회안전보장 시스템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실직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우리가 적극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약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 상처 받은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동물과 자연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22:29,30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우리가 추수한 것, 짜낸 즙, 처음 난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소와 양 등을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섬기는 마음을 강조함과 동시에 동물들에 대한 자비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새끼를 낳으면 곧바로 파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칠일은 필요합니다. 그래야 새끼가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강아지를 분양할 때 칠일이 지나서 분양을 합니다. 그 전에 분양하면 새끼가 죽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에 대해서도 자비의 마음을 갖도록 하십니다. 어진 사람은 짐승에 대해서도 긍휼을 베풉니다. 23:19절을 보십시오.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라고 하시면서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짐승에게 대해서도 자비의 마음을 갖고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3:11절을 보면 땅도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쉬게 해야 합니다. 그때 맺혀지는 열매는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이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땅의 힘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칠년 때는 묵혀 두어서 지력을 회복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과 땅에 대해서까지도 애정을 가지고 돌보라고 하십니다.
       
  둘째, 공의로우신 하나님(28-23:9) : 28절을 보십시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히브리어로 재판장은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재판장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재판장이나 지도자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습니다. 재판장과 지도자에 대한 자세는 곧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도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함부로 욕해서는 안 됩니다. 상관들을 씹으면 안 됩니다.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문제가 있으면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영적인 권위를 존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권위를 무너뜨리면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권위 자체는 필요한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면 그 자녀가 제대로 자랄 수 있겠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를 무너뜨리면 학생들의 교육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가 떨어지면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시행하는 재판관의 권위를 세우심으로 사회에 공의가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재판관은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 받았기 때문에 책임도 그만큼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사로이 재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그의 능력과 지혜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친구입니다. 지난 30년간 리더십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서 리더십보다는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시대입니다. 투명하게 정보를 나누고 공유하고 만들어 가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따름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3:6-9절을 보십시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능력 있는 변호사를 사면 죄가 가벼워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돈이 없는 사람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기 때문입니다.

  김우경변호사는 20년간 검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한 대기업 그룹을 조사한 검사였는데 그 자료가 노태우 전대통령에게도 연결되어 그를 구속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참 대단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출세, 성공, 권력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회의 청소부가 되기를 원했는데 쓰레기가 더 많아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신도 흰색에서 회색으로 회색에서 검은색으로 검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실패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삶을 살고자 결단하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자신의 실패를 열어 보이고 성경을 가르치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3:1-3절을 보십시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거짓된 풍설은 유언비어입니다. 여론에 따라서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론에 따라서 부당한 증언을 해서도 안 됩니다. 군중심리를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급한 동정심도 배격합니다. 정의가 굽혀져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전 닉슨 대통령은 위증죄로 인해서 탄핵을 받았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원수의 나귀는 그의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어버리면 찾아주고,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지면 짐을 부리고 일으켜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20,21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잃어버린 원수의 소나 나귀를 찾아주면 원수와 사이가 좋아지고 미움의 사이가 호의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작은 실천이 사회를 살 맛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선의 선순환을 이루게 됩니다.

  셋째, 매년 세 번 지켜야 할 절기(14-19) : 하나님께서는 매년 세 번 절기를 지키라고 합니다.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이후 7일 동안 축제로 지내라고 하십니다. 유월절은 3,4월쯤에 해당이 됩니다. 맥추절은 밭에 뿌린 첫 열매를 거두는 때입니다. 이는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수장절은 연말에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는 때를 말합니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축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십니다. 그 절기는 광복절과 봄 작물 추수감사제와 가을 작물 추수 감사제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씀을 지킴으로 애굽에서 고생하던 것을 기억하고 구원의 은혜를 간직하도록 돕고자 함입니다. 그들이 일 년에 세 번씩 다 모이면 다른 나라에서 침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을 지키면 오히려 그들의 지경을 넓히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출34:23,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추수하게 하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 빈 손으로 오지 말아야 합니다. 입으로만 감사하는 것보다 감사를 물질에 담아 표현하면 더 좋겠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해서 즐거움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장 좋은 것을 마음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이렇게 모임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끼리 서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교회들이 역사를 넘어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매년 선교보고대회를 하거나 여름 수양회를 함께 합니다. 또는 국제 수양회를 대륙별로 5년마다 돌아가면서 함으로 공동체성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모임을 같이 하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히10:25).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도 그와 같이 공의롭고 자비롭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음악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아무리 연습한다고 해서 모차르트와 같이 될 수 있습니까? 한 화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연습을 많이 한다고 렘브란트와 같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리의 씨를 심으면 그 토양에 맞게 즉 그 문화에 맞게 다양한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대로 똑같이 하라고 하면 이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또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했던 방법입니다. 연약한데 해야만 하는 것을 강조한다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법을 세워놓고 지키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행할 힘이 없는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이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압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와 바른 관계를 맺는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시고 승천하사 성령을 보내 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게 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일생 따르는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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