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09년 출12강(20:22-22:17) 여호와의 백성이 지켜야 할 계명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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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출애굽기 제 12강
말씀 출애굽기 20:22-22:17
요절 출애굽기 21:1
여호와의 백성이 지켜야 할 법규 I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우리는 지난 주 십계명을 공부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오늘은 시민법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수준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물론 출애굽 당시의 문화와 지금의 문화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시에 주신 계명에서 그 원리를 찾아내고 오늘 우리 문화에 맞게 적용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정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또 우리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수준을 생각해 보고 그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제단에 관한 법(20:22-26) : 하나님께서는 그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우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무소부재하십니다. 그는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금이나 은으로 어떤 신상을 만들어서 그를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토단을 쌓고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개인이나 가정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잘 알고 그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사람은 제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수준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고자 하는 높은 소원을 가지고 영적인 달음질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돌로 제단을 쌓을 때 이방인들과 같이 제단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만드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단 자체가 우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석으로 제단을 만들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3대 조상인 야곱은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갈 때 벧엘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신기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는 일어나 베게로 삼았던 돌로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상대로 영적인 싸움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돌로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다 태웠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의 조상들은 제단보다 예배 자체에 관심을 쏟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배 이외의 것에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정작 예배 시간에는 졸고 마음이 분산되면 안되겠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 준비에 많은 힘을 써서 예배 시간에 존다거나, 무슨 옷을 입고 와서 예배에 참석할까 신경을 쓰다가 예배 시간에 늦는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예배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또는 무엇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목자님들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센터를 잘 정돈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마음을 드려서 예배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수고하는 목자님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또 예배를 준비하는 가운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고 합심해서 환경을 예비했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일찍 잠을 자고 주일에는 맑은 정신과 피로가 풀린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목자님들은 주일예배 시간에 일찍 나와서 기도로 마음을 준비하고 싱어롱을 정성을 다해서 큰 소리로 부릅니다. 그리고 헌금을 미리 준비하여 드립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하는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식사 준비를 미리 미리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심을 믿습니다.
둘째, 종에 관한 법(21:1-11) :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주인을 섬길 것이지만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 하던 데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종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자유인이 되었지만 광야 생활과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사는 동안 어떠한 이유로든지 빚을 갚지 못해서 종이 되거나 범죄해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종이 되면 일생토록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칠년 째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풀어 준다고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다시 종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줄 때에 그가 단신으로 들어왔으면 단신으로 나가야 하고 장가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갈 수 있습니다.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는 단신으로 나가야 합니다. 만일 종이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고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가서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으라고 합니다.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게 됩니다. 이러한 종은 자발적으로 상전과 가족들을 사랑해서 종이 됩니다.
우리는 본래 죄와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죄의 종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감정과 육신의 본성을 따라서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값있게 쓸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 때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한 구속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지만 그 자유를 제대로 쓰려면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유가 빛이 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말을 가끔 합니다. 말로만 할 때도 있지만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섬길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아내는 음식을 잘 해서 남편이나 자녀들이 잘 먹는 것을 보면 자신의 배가 부릅니다. 이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에 기초해서 서로를 섬기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11절에는 여종에 관한 법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 합니다. 당시는 가부장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차별을 둔 것입니다.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 팔아서는 안 됩니다. 만일 여종을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하라고 합니다.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과 필요를 잘 아십니다. 이 법규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행해야 할 자비와 공의와 긍휼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종을 재산으로 생각하던 시대인데 종의 인권이 매우 높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여성에 대한 배려가 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을 때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약자들이 숨을 쉬고 기를 펼 수 있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도움이 필요한 분들, 장애인이나 새터민, 외국인 노동자, 어린 아이들에 대한 배려를 하고 함께 사는 사회를 가꾸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폭행에 관한 법(21:12-27) :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처로 보내야 합니다.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하나님의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납치하거나 유괴하는 자도 죽이라고 하십니다. 납치범들과 유괴범들은 사람의 생명을 돈보다 하찮게 여기는 죄입니다. 살인과 납치와 같은 범죄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 대한 공격이었으므로 중대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살인은 하나님께 대한 공격 행위이며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순종의 행위입니다. 단 비고의적 살인은 특별한 조항을 갖습니다. 그들은 도피처로 피해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도피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부모를 구타하는 것은 단순히 부모를 때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의 영●육에 치명타를 가하는 모든 행위를 부모 구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정신적인 폭행이 육체적 폭행보다 더 패역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폭행을 예로 든다면 자식의 반항, 고집스러우며 거칠고 불량한 자식의 태도,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자식의 비행 등이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이유로든 부모에 대해 불효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또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 걸핏하면 부모 면전에서 상소리로 욕하고 저주하는 것, 버릇없고 건방진 태도로 부모를 대하는 패륜아적인 행위들이 이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성결과 도덕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우리들의 삶에서 이같은 죄악이 조성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때리는 자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사회법에서 불효를 했다고 해서 사형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법이 죽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세상이 눈감아 준 불효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할”것입니다(잠20:20). 그리고 잠언 30:17절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저주하는 자는 범사에 잘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 성경은 불효에 대해서 이렇게 엄하게 징계하는 것일까요? 이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언약 공동체 내에서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자였고 이들을 때리는 자는 하나님이 그들 위에 세워 놓으신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며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양육한 부모를 함부로 대하고 저주하는 자는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배은망덕한 자에게 임하는 징계는 매우 중합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고 갚아야 합니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은 모든 덕의 기본입니다. 또한 우리는 부모님과 같은 윗사람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노인과 원로들이 존경을 받아야 사회에 질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잘 세우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스승에 대한 예우는 기본적인 도덕률입니다. 이제 5월은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있습니다. 가정이 잘 지켜져야 사회가 건강합니다. 우리가 이번 주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이 함께 있는데 사람의 존엄성과 신성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소문난 불효자가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늙고 힘없는 아버지를 노골적으로 구박하고 학대하며 귀찮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노부부는 그 불효막심한 아들에게서 태어난 손자를 끔찍이 여기며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그 아비 하는 짓을 보면 아무리 귀한 손자라도 곱게 보일 리 없건만 노인은 한결같이 손자를 애지중지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를 궁금히 여긴 어느 동네 사람이 노인에게 그 사연을 물어 보았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불효막심한 자식의 아들을 어찌 그렇게 사랑해 주십니까? 그 아이가 밉지도 않으십니까?” 그러나 노인은 무릎에 앉힌 손자를 내려다보며 묻는 이의 귀에 대고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녀석이 커서 내 원수를 대신 갚아 줄테니 사랑스러울 수 밖에 …” 이는 우리에게 마땅히 그 부모를 공경해야 함을 우회적으로 교훈해 주고 있는 뜻 깊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해야 합니다. 교통사고를 내면 그가 완치되도록 하고 손해 배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물론 보험에서 이를 대신 해 주지만 성경의 원리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종을 학대함이 징계의 차원이 아니라 주인의 직권을 남용하는 학대라면 그 종은 해방되어야 합니다. 종의 눈을 상하게 하거나 이빨이 빠지게 하면 이에 대한 보상으로 종을 놓아 주어야 합니다. 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또 치아는 어떠합니까? 종은 상전의 재산이지만 죽음이나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라고 합니다. 태아는 인간의 생명을 지녔지만 자족하는 인간과 같이 다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것을 동해복수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복수를 자유롭게 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억제시키고 처벌의 한계를 정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대 맞으면 열 대를 때려주고 싶은 것이 본심입니다. 한 마디 욕을 먹으면 열 마디 욕을 해 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당한 보복, 과도한 보복을 금하시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복수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고자 하면 나도 악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해복수법을 통해서 최대한 죄를 억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넷째, 배상에 관한 법(21:28-22:17) :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 하고 그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임자는 형벌은 면하지만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며,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며 임자도 죽이라고 합니다. 소가 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소를 죽이는 것은 동물계가 사람의 주권과 지배에 복종되어야 한다는 창조질서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종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소가 다른 사람의 소를 죽이면 배상만 하게 됩니다. 차가 사람을 치이면 손해 배상이 크지만 차가 차를 부딪쳐서 대물배상을 해야 할 경우는 배상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사람이 구덩이를 파고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배상해야 합니다. 오늘날 맨홀에 빠져서 다치거나 죽는 경우를 가끔 신문지상에서 읽을 수 있는데 이미 구약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구덩이에 빠져서 죽은 짐승은 구덩이 주인이 차지할 것이나 짐승의 임자에게는 배상으로 돈을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서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라고 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아야 합니다. 소는 양보다 비싸기 때문에 배상도 무겁습니다. 이는 남의 재산을 보호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말해 줍니다. 후진국에 여행을 가면 짐 가방에서 물건들이 하나 둘 없어집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잃은 물건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는 단지 경제적인 차이가 아니라 도덕적인 차이, 국민들의 수준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는 나라가 대국인 것입니다.
5-15절에는 재산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짐승이 밭 작물을 먹을 경우와 밭에 불이 날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고 맡긴 물건을 잘못 보관한 경우 두 배로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맡은 물건이 실수로 상하였으면 이를 보상할 책임은 없습니다. 빌려간 짐승이 상하든지 죽으면 배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물건을 맡으면 책임성 있게 관리를 해주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들이 국민들의 돈을 맡아서 유익을 남기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쁜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센터를 건축하는 기간 동안 잠시 세 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건물을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쓰는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법규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공의롭고 정직하며 자비가 있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심을 보게 됩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수준에 맞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도록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고 훈련하고 은사를 발휘해서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제자 양성은 공동체의 역량이 높아질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계명에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고치는 가운데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출애굽기 20:22-22:17
요절 출애굽기 21:1
여호와의 백성이 지켜야 할 법규 I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우리는 지난 주 십계명을 공부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오늘은 시민법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수준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물론 출애굽 당시의 문화와 지금의 문화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시에 주신 계명에서 그 원리를 찾아내고 오늘 우리 문화에 맞게 적용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정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또 우리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수준을 생각해 보고 그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제단에 관한 법(20:22-26) : 하나님께서는 그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우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무소부재하십니다. 그는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금이나 은으로 어떤 신상을 만들어서 그를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토단을 쌓고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개인이나 가정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잘 알고 그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사람은 제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수준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고자 하는 높은 소원을 가지고 영적인 달음질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돌로 제단을 쌓을 때 이방인들과 같이 제단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만드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단 자체가 우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석으로 제단을 만들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3대 조상인 야곱은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갈 때 벧엘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신기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는 일어나 베게로 삼았던 돌로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상대로 영적인 싸움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돌로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다 태웠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의 조상들은 제단보다 예배 자체에 관심을 쏟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배 이외의 것에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정작 예배 시간에는 졸고 마음이 분산되면 안되겠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 준비에 많은 힘을 써서 예배 시간에 존다거나, 무슨 옷을 입고 와서 예배에 참석할까 신경을 쓰다가 예배 시간에 늦는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예배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또는 무엇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목자님들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센터를 잘 정돈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마음을 드려서 예배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수고하는 목자님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또 예배를 준비하는 가운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고 합심해서 환경을 예비했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일찍 잠을 자고 주일에는 맑은 정신과 피로가 풀린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목자님들은 주일예배 시간에 일찍 나와서 기도로 마음을 준비하고 싱어롱을 정성을 다해서 큰 소리로 부릅니다. 그리고 헌금을 미리 준비하여 드립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하는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식사 준비를 미리 미리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심을 믿습니다.
둘째, 종에 관한 법(21:1-11) :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주인을 섬길 것이지만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 하던 데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종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자유인이 되었지만 광야 생활과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사는 동안 어떠한 이유로든지 빚을 갚지 못해서 종이 되거나 범죄해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종이 되면 일생토록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칠년 째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풀어 준다고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다시 종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줄 때에 그가 단신으로 들어왔으면 단신으로 나가야 하고 장가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갈 수 있습니다.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는 단신으로 나가야 합니다. 만일 종이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고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가서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으라고 합니다.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게 됩니다. 이러한 종은 자발적으로 상전과 가족들을 사랑해서 종이 됩니다.
우리는 본래 죄와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죄의 종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감정과 육신의 본성을 따라서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값있게 쓸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 때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한 구속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지만 그 자유를 제대로 쓰려면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유가 빛이 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말을 가끔 합니다. 말로만 할 때도 있지만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섬길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아내는 음식을 잘 해서 남편이나 자녀들이 잘 먹는 것을 보면 자신의 배가 부릅니다. 이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에 기초해서 서로를 섬기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11절에는 여종에 관한 법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 합니다. 당시는 가부장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차별을 둔 것입니다.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 팔아서는 안 됩니다. 만일 여종을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하라고 합니다.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과 필요를 잘 아십니다. 이 법규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행해야 할 자비와 공의와 긍휼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종을 재산으로 생각하던 시대인데 종의 인권이 매우 높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여성에 대한 배려가 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을 때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약자들이 숨을 쉬고 기를 펼 수 있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도움이 필요한 분들, 장애인이나 새터민, 외국인 노동자, 어린 아이들에 대한 배려를 하고 함께 사는 사회를 가꾸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폭행에 관한 법(21:12-27) :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처로 보내야 합니다.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하나님의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납치하거나 유괴하는 자도 죽이라고 하십니다. 납치범들과 유괴범들은 사람의 생명을 돈보다 하찮게 여기는 죄입니다. 살인과 납치와 같은 범죄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 대한 공격이었으므로 중대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살인은 하나님께 대한 공격 행위이며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순종의 행위입니다. 단 비고의적 살인은 특별한 조항을 갖습니다. 그들은 도피처로 피해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도피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부모를 구타하는 것은 단순히 부모를 때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의 영●육에 치명타를 가하는 모든 행위를 부모 구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정신적인 폭행이 육체적 폭행보다 더 패역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폭행을 예로 든다면 자식의 반항, 고집스러우며 거칠고 불량한 자식의 태도,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자식의 비행 등이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이유로든 부모에 대해 불효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또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 걸핏하면 부모 면전에서 상소리로 욕하고 저주하는 것, 버릇없고 건방진 태도로 부모를 대하는 패륜아적인 행위들이 이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성결과 도덕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우리들의 삶에서 이같은 죄악이 조성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때리는 자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사회법에서 불효를 했다고 해서 사형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법이 죽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세상이 눈감아 준 불효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할”것입니다(잠20:20). 그리고 잠언 30:17절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저주하는 자는 범사에 잘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 성경은 불효에 대해서 이렇게 엄하게 징계하는 것일까요? 이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언약 공동체 내에서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자였고 이들을 때리는 자는 하나님이 그들 위에 세워 놓으신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며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양육한 부모를 함부로 대하고 저주하는 자는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배은망덕한 자에게 임하는 징계는 매우 중합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고 갚아야 합니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은 모든 덕의 기본입니다. 또한 우리는 부모님과 같은 윗사람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노인과 원로들이 존경을 받아야 사회에 질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잘 세우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스승에 대한 예우는 기본적인 도덕률입니다. 이제 5월은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있습니다. 가정이 잘 지켜져야 사회가 건강합니다. 우리가 이번 주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이 함께 있는데 사람의 존엄성과 신성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소문난 불효자가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늙고 힘없는 아버지를 노골적으로 구박하고 학대하며 귀찮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노부부는 그 불효막심한 아들에게서 태어난 손자를 끔찍이 여기며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그 아비 하는 짓을 보면 아무리 귀한 손자라도 곱게 보일 리 없건만 노인은 한결같이 손자를 애지중지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를 궁금히 여긴 어느 동네 사람이 노인에게 그 사연을 물어 보았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불효막심한 자식의 아들을 어찌 그렇게 사랑해 주십니까? 그 아이가 밉지도 않으십니까?” 그러나 노인은 무릎에 앉힌 손자를 내려다보며 묻는 이의 귀에 대고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녀석이 커서 내 원수를 대신 갚아 줄테니 사랑스러울 수 밖에 …” 이는 우리에게 마땅히 그 부모를 공경해야 함을 우회적으로 교훈해 주고 있는 뜻 깊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해야 합니다. 교통사고를 내면 그가 완치되도록 하고 손해 배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물론 보험에서 이를 대신 해 주지만 성경의 원리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종을 학대함이 징계의 차원이 아니라 주인의 직권을 남용하는 학대라면 그 종은 해방되어야 합니다. 종의 눈을 상하게 하거나 이빨이 빠지게 하면 이에 대한 보상으로 종을 놓아 주어야 합니다. 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또 치아는 어떠합니까? 종은 상전의 재산이지만 죽음이나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라고 합니다. 태아는 인간의 생명을 지녔지만 자족하는 인간과 같이 다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것을 동해복수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복수를 자유롭게 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억제시키고 처벌의 한계를 정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대 맞으면 열 대를 때려주고 싶은 것이 본심입니다. 한 마디 욕을 먹으면 열 마디 욕을 해 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당한 보복, 과도한 보복을 금하시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복수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고자 하면 나도 악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해복수법을 통해서 최대한 죄를 억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넷째, 배상에 관한 법(21:28-22:17) :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 하고 그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임자는 형벌은 면하지만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며,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며 임자도 죽이라고 합니다. 소가 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소를 죽이는 것은 동물계가 사람의 주권과 지배에 복종되어야 한다는 창조질서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종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소가 다른 사람의 소를 죽이면 배상만 하게 됩니다. 차가 사람을 치이면 손해 배상이 크지만 차가 차를 부딪쳐서 대물배상을 해야 할 경우는 배상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사람이 구덩이를 파고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배상해야 합니다. 오늘날 맨홀에 빠져서 다치거나 죽는 경우를 가끔 신문지상에서 읽을 수 있는데 이미 구약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구덩이에 빠져서 죽은 짐승은 구덩이 주인이 차지할 것이나 짐승의 임자에게는 배상으로 돈을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서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라고 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아야 합니다. 소는 양보다 비싸기 때문에 배상도 무겁습니다. 이는 남의 재산을 보호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말해 줍니다. 후진국에 여행을 가면 짐 가방에서 물건들이 하나 둘 없어집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잃은 물건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는 단지 경제적인 차이가 아니라 도덕적인 차이, 국민들의 수준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는 나라가 대국인 것입니다.
5-15절에는 재산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짐승이 밭 작물을 먹을 경우와 밭에 불이 날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고 맡긴 물건을 잘못 보관한 경우 두 배로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맡은 물건이 실수로 상하였으면 이를 보상할 책임은 없습니다. 빌려간 짐승이 상하든지 죽으면 배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물건을 맡으면 책임성 있게 관리를 해주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들이 국민들의 돈을 맡아서 유익을 남기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쁜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센터를 건축하는 기간 동안 잠시 세 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건물을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쓰는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법규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공의롭고 정직하며 자비가 있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심을 보게 됩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수준에 맞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도록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고 훈련하고 은사를 발휘해서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제자 양성은 공동체의 역량이 높아질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계명에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고치는 가운데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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