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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09년 부활3강(고전15:35-58) 부활의 영광과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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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119회 작성일 09-04-1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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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부활절 말씀 3 강                                                               
말씀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고린도전서 15:58

부활의 영광과 승리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앞 두 강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증거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셋째 강의에서 저는 몸의 부활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35-41), 둘째, 우리는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42-49), 셋째, 몸이 부활되는 순간(50-57)에 대해서 말씀하고 결론으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35-41)? :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배웠는데 그러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 의문이 생깁니다. 실제로 사람이 죽으면 요즈음은 화장을 많이 하는데 뼈를 갈아서 강물에 뿌리면 다 물에 녹아버립니다. 그리고 산에 뿌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화장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면서 매장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질량 보전의 법칙에 따르면 인간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다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원소들을 가지고 새롭게 만드십니다.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그런 것들은 일도 아닙니다. 바울은 씨의 비유를 들어서 이를 설명합니다. 농부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내가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십니다. 민들레나 채송화나 나팔 꽃 등의 씨를 보면 까만 것이 그게 그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씨가 땅에 떨어져 죽고 피어나는 꽃을 보면 씨와는 전혀 딴판입니다. 우리가 씨에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봄에 화창하게 피어나는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면 부활의 영광을 일부분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습니다. 뿌려진 씨와 살아난 것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자가 어떤 연속성도 없는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양으로 살아난 것은 분명 죽은 씨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람의 부활체도 죽기 전의 모습과 분명히 다르지만 그 변화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해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지만 세상에서의 삶과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영원한 삶과 깊은 연속성이 있습니다. 분명히 변화되지만 이 세상의 삶과 부활한 후의 삶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채송화 씨를 심으면 반드시 채송화가 나오고 나팔꽃을 심으면 반드시 나팔꽃이 나오고 호박꽃을 심으면 호박꽃이 핍니다. 이와 같이 각 종자는 이미 나름대로 정해진 모양이 있습니다. 그 모양을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단지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더 나은 단계로 진입하는 관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는 생물의 형체가 같지 않고 다양할진대 죽음 이후 부활한 존재의 형체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여러 가지 모양을 주실 것입니다. 63빌딩 수족관에 가면 물고기의 형체가 다양하고 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의 창조하신 물고기의 모양들과 색깔들이 아름답습니다. 그 형체들은 그들이 활동하는 장소와 공간에 맞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고기는 대개 유선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물 속을 자유자재로 유영할 수 있도록 호흡기와 모양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새들은 뼈가 가운데가 비어 있어서 가볍고 날기에 적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새의 날개 구조는 부력을 일으켜서 공중을 날고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짐승들은 이 땅을 달려야 하기 때문에 달리기에 좋고 식물을 씹기에 좋은 이빨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부활할 몸은 하늘나라의 구조에 맞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형제가 있고 땅에 속한 형제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습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릅니다. 이와 같이 부활 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누리게 될 영광에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에 존재하는 것들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요5:29).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한 삶을 결정합니다. 다니엘은 예언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2-3).” 어떤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입니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재물보다 사람을 얻습니다. 그런 사람이 밤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할 우리의 몸은 어떠할까요?

  둘째,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42-49)? : 42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현재의 몸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 썩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피부 권력을 부르짖어도 다 썩고 쇠할 것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꽃보다 고운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죽어 매장되면 무가치한 것들은 다 썩고 사라지지만 가치 있는 것은 부활합니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좀 고생을 하고, 피부가 좀 검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산 사람들은 썩지 아니할 영원한 아름다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43절은 말씀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현재의 몸이 욕되다는 것은 죄악되다는 것입니다. 욕된 몸은 육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나 욕정에 이끌려 쉽게 죄를 범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에 약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나이를 먹는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영적인 투쟁을 하면 할수록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신음합니다. 현재의 몸은 약합니다. 병들고 노쇠합니다. 조금만 무리를 해도 몸살이 나고 다음날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맹호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 만주 땅은 우리 땅, 태평양도 양보 못한다”를 외치며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면 뭔가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 때마다 장래를 걱정하며 게임으로 도피하는 자신을 볼 때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육신은 연약합니다. 요즘 같이 따뜻한 춘사월에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피고 봄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부활한 몸은 영광스럽습니다. 이는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당할 수 밖에 없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된 존재를 의미합니다. 영광스러운 몸은 죄의 소욕이 없는 몸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매주 소감 쓰고 회개하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까지도 성령으로 온전히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내가 뜻하는 대로 육체도 움직이게 됩니다. 아무리 새벽이라도 내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살을 빼야 하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 몸이 강건하기 때문에 간호사나 의사도 하늘나라에서는 직종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로서 순수하게 사랑하고 서로를 섬기며 기쁨과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 날에는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가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다 천사와 같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분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빨리 결혼을 하실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사도 바울이나 마더 배리 선교사님과 같이 온전히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가 부활할 몸은 신령한 몸으로서 육의 몸과는 본질적으로 대조가 됩니다.  육의 몸은 혼의 몸으로서 사람의 생래의 동물적 육체를 말합니다. 즉 혈기의 몸으로서 영생에 이르러 영의 생활을 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몸은 영의 몸으로서 성령이 내재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몸입니다. 신령한 몸은 육적인 약함에서 오는 모든 질고를 벗어나 성령에 의해서 지배받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또 잠겨진 문을 그대로 통과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음식을 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부활하여 영의 몸을 입게 되면 “음”하고 힘만 줘도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방향만 가리키게 되면 어디든 날라 갈 수 있습니다. 그 날에 우리는 모두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이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새벽 기도를 위해 일어나라고 깨우는 사람도 없습니다. 시험 때마다 아이큐 탓 조상 탓 했던 분들은 부활의 날에 모든 스트레스가 다 해소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각자의 재능을 다 꽃피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100%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음에 맞고 감성이 풍부하게 찬양하고 싶습니다. 그 날에는 음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고 왕노릇 하는 그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입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45,46).” 산 영은 산 존재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 즉 생명을 주는 영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만이 죽은 몸을 살리사 부활의 몸을 갖게 하실 수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땅에서 나셨다가 죽고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의 근본은 아담처럼 흙이 아니라 하늘에서 기원하셨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부활할 때에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며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열등감, 자기 비하, 폐쇄적인 인간관계가 치유되어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모든 인간 관계가 자연스럽고, 성숙한 성품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 몸이 부활되는 순간(50-58) : 50-5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가 변화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썩을 몸으로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변화된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서 성경은 대답합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입니다. 몸은 진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적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휴거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질 때 성령이 내주하시고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재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로 들려 올려질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날 때에 일대일 하다가 올라가기도 할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방석과 함께 올라가기도 하고 청소하다가 빗자루를 타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과 관계없이 사는 사람은 그때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높이뛰기를 잘하는 사람도, 비행기를 타고, 우주선을 타도 하나님 나라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때 천사들은 부활한 성도들을 한 곳으로 모을 것입니다(마24:31).

  53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몸을 의복으로 비유하여 입는다고 합니다. 이는 썩을 것으로 둘러싸인 것 위에 썩지 않는 껍데기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속의 썩을 옷을 완전히 벗어버린 상태에서 썩지 않을 새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의 집입니다. 몸은 영혼의 옷입니다. 그 의복 속의 나도 새 사람으로 변화되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서로 다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할 것입니다. 부활은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사망이 멸망하는 것은 더 이상 원수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이 장엄한 승리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55,56절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역사 이래로 사망은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최후의 원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했지만 30대에 죽었습니다.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한다고 부산을 떨었지만 40대에 죽었습니다. 또한 죽음은 첫 사람 아담의 후손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사망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며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닙니다. 사망은 독충의 침과 같이 사람에게 해독을 끼치는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멸망당한 사망은 마치 죽은 뱀처럼 그 독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그 권능은 율법인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덧입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입니다. 

  57,5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고민에서 허덕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인하여 감사하였습니다(롬7:25-8:2). 여기서는  사망의 권능에서 해방되고 사망을 완전히 정복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와 두려움을 이기고 부활신앙으로 불사조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복음 신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침을 받은 만큼 이제는 거짓 교사들이나 이단적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 복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스스로 굳게 서야 할 뿐 아니라 남에게서 영향을 받고 흔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주의 일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고 제자를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런 수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드리고 사랑의  수고를 했으나 아무런 표도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거기다가 오해까지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더 이상 수고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수고하고 열매가 없을지라도 제자 양성을 그만 둘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 양성이 교회 성장을 위한 좋은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임을 강조하는 교회론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끼리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는 일로 끝나면 됩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나 모임에 참석하면 할 일을 다 한 사람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또 성경적으로 볼 때 그런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사명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어 현재와 같은 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그의 지체로서 하나입니다. 교회는 장소와 시대를 떠나 보편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도성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성은 단순히 교회 본질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속성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증거와 사역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성이라는 말은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사도들의 계승자입니까? 소수의 개인이 아니라 전 교회가 그 계승자입니다. 전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성령의 전이요 사도의 사역에 의해 하나를 이룬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칠 권위를 계승했다는 것을 유효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사도들을 감동시키시고 그들을 증인되게 하신 그 성령께서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사도가 전해준 복음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보이는 않는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사도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대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의 사역을 계승하는 것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 양성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와 봉사, 성례, 찬양, 건축 등이 잘 정립된 양육 및 훈련 시스템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될 때 그제야 끝이 올 것입니다(마24:14).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미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태어났고 이 일을 위해서 구원을 받았고 이 일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자 양성을 위해서 흘린 눈물과 쏟은 진심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넘치도록 보상해주십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가는 곳마다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힘든 생각을 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성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9:1).” 우리가 양들을 돌보고 양육하고 열매 맺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가치 있고 영원한 열매입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새롭게 덧입고 다시 한 번 아니 항상 주의 일 즉 복음 전도와 제자 양성하는 일에 더욱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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