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2009년 부활절 특강 제1강(고전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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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부활절 특강 제1강
말씀 고린도전서 15:1-11
요절 고린도전서 15:4
다시 살아나셨다
Happy Ester!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서기2009년을 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단기4342년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도 신기원을 이루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변화된 새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말씀이지만 이번 부활절 수양회를 통해 새롭게 말씀을 받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부활의 소망을 새롭게 영접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바울의 부활메시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분파문제, 음행의 문제, 송사문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은사 문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문제 등 어떻게 한 교회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교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4장을 통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들의 문제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15장에 이르러는 이 모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을 다시금 상고해 보고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1장 복음을 굳게 지키라(1-4)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바울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문제는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헛되이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복음을 믿지 않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복음을 헛되이 믿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복음을 헛되이 믿으면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누리게 되는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소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소를 옮겨졌다고 저절로 풍성한 삶도 따라 오는 것은 아닙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려면 이미 받은 복음의 말씀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말에 거하다는 말씀이 복음을 굳게 지킨다는 말씀과 동일한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풍성한 삶은 복음을 굳게 지킬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지식으로만 알지 않고 삶으로 체험하여 깨닫기까지 굳게 지킬 때 우리는 변화와 성장을 체험하게 됩니다. 풍성한 삶은 존재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능력과 은사는 사모하면서도 정작 복음을 굳게 지킬 때 누리는 성화의 구원에 대한 체험이 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능력과 은사는 많았지만 영적인 성장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고전3:1)
고린도 교회 내에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 그 자체보다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사도바울께서는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신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신앙은 신앙생활의 기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슬럼프에 빠졌을 때 기초체력 훈련과 기본기를 새롭게 연마하여 제 컨디션을 회복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문제에 빠졌다면 혹 내가 복음을 헛되이 믿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는 발견하고 다시금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없습니다.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 가운데 있던지 복음을 굳게 지키므로 복음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고 또 TV 뉴스를 들어 보십시오. 세상의 소식은 나쁜 소식, 슬픈 소식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어디서도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소식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전하길 원하시는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3,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에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복음이요 다른 하나는 부활의 복음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굳게 지키지 못하면 복음신앙은 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와 부활이 왜 우리에게 복음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경제불황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불황에 실직을 당하면 얼마나 안타깝고 힘든 일입니다. 저희 회사 어떤 직원은 신혼여행을 다녀오던 날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저는 이렇게 드라마틱한 죽음도 있구나 생각하며 몹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는 이뿐 아니라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가장 안타깝고 슬픈 소식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죄의 결과 이 세상은 죽음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바로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사는 죄인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참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문둥병자가 고대광실에서 럭셔리한 명품을 입고 산다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겉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마치 문둥병자와 같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악독, 음행 등의 죄로 썩어 문들어져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화려한 옷들로 치장한다 해도 죄로 흉측하게 파괴된 우리의 실존은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행복할 수 없고 참만족을 누릴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의 실존이요 딜레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제물로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 우리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얼룩진 이 땅을 치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 주셨고 그를 믿는 자는 결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죄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은 사랑에 눈먼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둘째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 죽음 문제를 극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다시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 아래서 한줌의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았다는 차원과는 다른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죄와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다시 살아 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며 풍성한 영생의 삶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지시며 승리케 하십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문둥병자와 같이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움이 없이 성결과 의로 섬기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장차 큰 능력과 권능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홀연히 다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을 살고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늘소망을 품고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승리요 산소망이 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와 능력과 영광을 감사 찬양 드립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상기시키면서 "성경대로"라는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들이 지어낸 허탄한 신화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성경의 예언된대로 성취된 하나님의 복음이며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은 은사나 체험도 중요하지만 철저하게 성경중심의 신앙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이 맹숭맹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신앙생활하면 그로 말미암아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이 시간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입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부활신앙으로 살라(5-11)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리더들의 악한 영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건임을 증거하기 위해 부활의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수제자인 베드로뿐만 아니라 열 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혹자는 제자들이 본 예수님은 환각현상이었지도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시에 오백여 형제들이 동일한 환각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수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그 밖에도 예수님의 빈무덤과 무덤에 잘 개워져 있었던 세마포, 빌라도의 보고서 등 많은 역사적인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확실한 부활의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들의 변화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한 증거로 부활의 증인들의 변화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게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형편없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물고기나 잡으며 살고자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갈릴리 호수까지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아들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그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베드로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공회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며 초대 교회 공동체를 이끈 위대한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대부분의 제자들과 형제들도 이처럼 담대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 순교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바리새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전공했고 헬라철학을 통달한 탁월한 지성인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씨를 말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확신하고 공회를 공문서를 받아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노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이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무지와 죄악을 깨닫고 회심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예수님을 얻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모든 사도들보다 더욱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과 열매를 생각할 때 그가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자랑한다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곧 “나는 팔푼이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괜히 사람들 앞에서 겸손을 떠느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는 진정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열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죄인인가?를 깊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열매를 맺은 대사도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나의 나된 것이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바울을 통해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나의 나 된 것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장 작은 자로 여길 수 있는 자유함과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고린도 교회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문제들도 아니고 아주 굵직굴직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부인하고 대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부활의 영성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을 진정 겸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이번 부활절 수양회를 기회로 삼아 부활신앙을 체험케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 능력을 믿고 나가 죄와 사망의 세력과 싸우면 부활의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연약하다고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이를 믿고 부활신앙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삶으로 깊이 체험하여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도 이번 수양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고 말씀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번주 월요일부터 회사일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자정이 되어 퇴근하였습니다. 메시지를 준비해야 하는데 시간은 없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만 조급했습니다. 괜히 메시지를 맡았구나하는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와서 메시지를 다른 목자님께 부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 메시지를 맡은 나에게 이렇게 힘든 상황을 주셨는지 알고자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제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맞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지, 나와 함께 하시지, 내가 메시지를 감당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않도와주시겠어, 죽음도 이기신 주님께서 메시지를 감당할 힘을 주시지 않겠어. 힘들어할 것 없어. 능히 나는 감당할 수 있어. 감당할 수 있어."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맡기니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에서야 메시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자도 쓰지 못했던 메시지를 하루만에 감당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부활신앙을 체험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저를 힘든 상황으로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질 때 실제적이 삶에서 승리케 하심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연약한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며 부활의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번 수양회를 통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되실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말씀 고린도전서 15:1-11
요절 고린도전서 15:4
다시 살아나셨다
Happy Ester!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서기2009년을 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단기4342년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도 신기원을 이루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변화된 새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말씀이지만 이번 부활절 수양회를 통해 새롭게 말씀을 받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부활의 소망을 새롭게 영접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바울의 부활메시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분파문제, 음행의 문제, 송사문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은사 문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문제 등 어떻게 한 교회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교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4장을 통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들의 문제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15장에 이르러는 이 모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을 다시금 상고해 보고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1장 복음을 굳게 지키라(1-4)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바울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문제는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헛되이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복음을 믿지 않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복음을 헛되이 믿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복음을 헛되이 믿으면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누리게 되는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소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소를 옮겨졌다고 저절로 풍성한 삶도 따라 오는 것은 아닙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려면 이미 받은 복음의 말씀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말에 거하다는 말씀이 복음을 굳게 지킨다는 말씀과 동일한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풍성한 삶은 복음을 굳게 지킬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지식으로만 알지 않고 삶으로 체험하여 깨닫기까지 굳게 지킬 때 우리는 변화와 성장을 체험하게 됩니다. 풍성한 삶은 존재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능력과 은사는 사모하면서도 정작 복음을 굳게 지킬 때 누리는 성화의 구원에 대한 체험이 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능력과 은사는 많았지만 영적인 성장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고전3:1)
고린도 교회 내에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 그 자체보다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사도바울께서는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신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신앙은 신앙생활의 기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슬럼프에 빠졌을 때 기초체력 훈련과 기본기를 새롭게 연마하여 제 컨디션을 회복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문제에 빠졌다면 혹 내가 복음을 헛되이 믿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는 발견하고 다시금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없습니다.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 가운데 있던지 복음을 굳게 지키므로 복음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고 또 TV 뉴스를 들어 보십시오. 세상의 소식은 나쁜 소식, 슬픈 소식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어디서도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소식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전하길 원하시는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3,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에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복음이요 다른 하나는 부활의 복음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굳게 지키지 못하면 복음신앙은 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와 부활이 왜 우리에게 복음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경제불황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불황에 실직을 당하면 얼마나 안타깝고 힘든 일입니다. 저희 회사 어떤 직원은 신혼여행을 다녀오던 날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저는 이렇게 드라마틱한 죽음도 있구나 생각하며 몹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는 이뿐 아니라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가장 안타깝고 슬픈 소식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죄의 결과 이 세상은 죽음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바로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사는 죄인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참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문둥병자가 고대광실에서 럭셔리한 명품을 입고 산다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겉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마치 문둥병자와 같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악독, 음행 등의 죄로 썩어 문들어져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화려한 옷들로 치장한다 해도 죄로 흉측하게 파괴된 우리의 실존은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행복할 수 없고 참만족을 누릴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의 실존이요 딜레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제물로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 우리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얼룩진 이 땅을 치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 주셨고 그를 믿는 자는 결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죄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은 사랑에 눈먼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둘째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 죽음 문제를 극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다시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 아래서 한줌의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았다는 차원과는 다른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죄와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다시 살아 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며 풍성한 영생의 삶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지시며 승리케 하십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문둥병자와 같이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움이 없이 성결과 의로 섬기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장차 큰 능력과 권능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홀연히 다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을 살고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늘소망을 품고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승리요 산소망이 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와 능력과 영광을 감사 찬양 드립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상기시키면서 "성경대로"라는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들이 지어낸 허탄한 신화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성경의 예언된대로 성취된 하나님의 복음이며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은 은사나 체험도 중요하지만 철저하게 성경중심의 신앙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이 맹숭맹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신앙생활하면 그로 말미암아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이 시간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입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부활신앙으로 살라(5-11)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리더들의 악한 영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건임을 증거하기 위해 부활의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수제자인 베드로뿐만 아니라 열 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혹자는 제자들이 본 예수님은 환각현상이었지도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시에 오백여 형제들이 동일한 환각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수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그 밖에도 예수님의 빈무덤과 무덤에 잘 개워져 있었던 세마포, 빌라도의 보고서 등 많은 역사적인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확실한 부활의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들의 변화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한 증거로 부활의 증인들의 변화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게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형편없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물고기나 잡으며 살고자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갈릴리 호수까지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아들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그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베드로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공회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며 초대 교회 공동체를 이끈 위대한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대부분의 제자들과 형제들도 이처럼 담대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 순교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바리새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전공했고 헬라철학을 통달한 탁월한 지성인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씨를 말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확신하고 공회를 공문서를 받아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노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이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무지와 죄악을 깨닫고 회심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예수님을 얻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모든 사도들보다 더욱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과 열매를 생각할 때 그가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자랑한다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곧 “나는 팔푼이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괜히 사람들 앞에서 겸손을 떠느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는 진정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열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죄인인가?를 깊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열매를 맺은 대사도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나의 나된 것이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바울을 통해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나의 나 된 것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장 작은 자로 여길 수 있는 자유함과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고린도 교회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문제들도 아니고 아주 굵직굴직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부인하고 대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부활의 영성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을 진정 겸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이번 부활절 수양회를 기회로 삼아 부활신앙을 체험케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 능력을 믿고 나가 죄와 사망의 세력과 싸우면 부활의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연약하다고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이를 믿고 부활신앙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삶으로 깊이 체험하여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도 이번 수양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고 말씀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번주 월요일부터 회사일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자정이 되어 퇴근하였습니다. 메시지를 준비해야 하는데 시간은 없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만 조급했습니다. 괜히 메시지를 맡았구나하는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와서 메시지를 다른 목자님께 부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 메시지를 맡은 나에게 이렇게 힘든 상황을 주셨는지 알고자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제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맞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지, 나와 함께 하시지, 내가 메시지를 감당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않도와주시겠어, 죽음도 이기신 주님께서 메시지를 감당할 힘을 주시지 않겠어. 힘들어할 것 없어. 능히 나는 감당할 수 있어. 감당할 수 있어."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맡기니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에서야 메시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자도 쓰지 못했던 메시지를 하루만에 감당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부활신앙을 체험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저를 힘든 상황으로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질 때 실제적이 삶에서 승리케 하심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연약한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며 부활의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번 수양회를 통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되실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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