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2009년 부활절 특강-2강 (고전15: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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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부활절 특강 제2강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말씀:(고전15:12~34)
요절:(고전15: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나님 아빠, 저 말씀을 묵상하고 받고자 나왔습니다. 저에게 부활의 복음을 주시고 부활의 믿음을 주십시오.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우리는 방금 전에 정베드로 목자님을 통하여 부활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증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린도 교회 내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시간 죽은 자의 부활이 사실이며 그 증거가 무엇인지 확신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부활을 믿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깊이 영접하며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장 부활의 첫열매(12-28)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어떤 사람들은 헬라 사람들 아니면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는 자들입니다. 고린도는 상업의 도시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영혼불멸은 믿었으나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은 참되고 아름다우나 육체는 더럽고 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어야 예수님도 부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들의 주장처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거짓이요 또 우리의 믿음이 거짓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몇 명의 양들을 만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하는 것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한 주일에도 수차례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제자 양성이야 말로 기막힌 사기꾼을 키워 내는 것이고, 여기에 앉아 있는 목자님들은 모두 사기꾼들입니다. 학생 사기꾼, 사모님 사기꾼, 평신도 사기꾼이 되고 맙니다. 또 전 세계로 나가 있는 우리 선교사님들은 국내에서 사기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해외 나가서 까지 사기 치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두 번째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죄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다가 죄로 고통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을 믿고 죽은 자들이 다 망하게 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성도들이 장차 부활할 산 소망가운데 핍박과 고난 앞에서 구차히 살기를 도모하지 않고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 베드로, 빌립, 유다, 시몬,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했고 마태는 칼에 찔렸으며, 나다나엘은 채찍에 맞았고 맛디아와 또 다른 야고보는 돌에 맞았으며 도마는 창이 몸을 관통해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수 없다며 거꾸로 매달렸고 안드레는 엑스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들은 모두 인생의 투자를 잘못한 것입니다. 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망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수치를 무릅쓰고 도망치던 이들이 180도로 변해버렸습니다. 변화된 삶은 제자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 더욱 불쌍한 자가 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가 왜 불쌍한 자가 됩니까? 부활을 소망하며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다 하였는데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한 삶이요 허망한 삶이 되고 맙니다. 부활이 없다면 믿음을 지키고 힘든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욕심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주일에 성경책 대신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갈 수 있고 죄의 쾌락을 좇아 살면 됩니다. 양들을 섬기기보다는 그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재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활이 과연 있을까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삶의 목표를 두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헌신은 예전에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인생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제 나이가 먹어 할 수 없다는 한계의식, 제자양성에 대한 실패감, 허무한 생각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습니까? 세상에서 불쌍한 자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가 이제 희망의 소식을 말하겠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는 이제까지의 모든 우울한 가정들을 단숨에 깨버리는 쇠망치와 같은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추수할 많은 곡식들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앞으로 있을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알려 주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첫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21)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사람에게도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불순종과 죽음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에 부활과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만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구원, 나의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든지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사망 권세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우리의 몸이 비행기 안에서 밖으로 조금이라도 나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면에서 10km이상 떠서 시속900km(초속 250m)이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밖의 온도는 영하50도 이하로 내려갑니다. 얼어 죽든지,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든지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비행기 기내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승무원이 주는 음료수, 밥을 먹으면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가면 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할 때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또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음료와 양식을 먹고 마시며 주님 안에 거할 때 우리의 목적지인 천국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다.
23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예전 성경에는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영어 성경에는 'belong to him'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속했다는 것은 연합한 자란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와 연합하게 될 때에 우리는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능히 부활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1절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므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고 예수님 안에 확실하게 거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말씀을 통해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제가 인생의 주권을 아직도 자신이 꼭 쥐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립 문제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커피 전문점 창업의 꿈을 접고 전공을 살려 자립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저는 직장을 알아보며 사명의 땅인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면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찾을 수 있을 텐데.......생각했습니다. 저는 자립 문제, 장래 문제로 고민하며 내가 예수님 안에 있지 않고 죄악 된 자아, 자기 사랑 안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내려놓는 일을 하였고, 몇 일전 예수님 안에 거하는 감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예수님 안에 거하므로 삶을 얻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저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내려놓겠습니다. 자립문제, 장래 문제를 모두 내려놓고 주님 안에 거하므로 부활의 풍성한 삶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장 깨어 의를 행하라(29-34)
1장에서 바울은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는 부활을 믿는 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날마다 부인했습니다. 또 세상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명예심을 부인했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을 부인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학문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세상에서 얼마든지 존경받으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부활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32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자신도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말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세상 동무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즐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우리는 결코 악한 동무들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악한 동무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부활의 소망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지혜로운 자로 자처하지만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는 허무적 쾌락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면 세속의 누룩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우리 영혼이 부패하고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깨어’라는 말은 술취한 상태로부터 깨어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적 쾌락이라는 술에서 깨어나라는 뜻입니다. ‘의를 행하고’는 공동번역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부활을 부인하는 악한 동무들의 영향을 받아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음란한 행실에 빠져들고 이를 반복하여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하여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현재 계속해서 반복하여 진행되고 있는 죄의 행위를 멈추라는 뜻입니다. 악한 동무들의 영향을 받아 세상 쾌락의 술에 취해서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방탕한 생활을 반복하는 자들은 술 취한 삶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차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 후에 맞이할 영광은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도 없는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굳게 믿고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않고 이 땅에서 날마다 죽는 삶을 살므로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말씀:(고전15:12~34)
요절:(고전15: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나님 아빠, 저 말씀을 묵상하고 받고자 나왔습니다. 저에게 부활의 복음을 주시고 부활의 믿음을 주십시오.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우리는 방금 전에 정베드로 목자님을 통하여 부활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증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린도 교회 내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시간 죽은 자의 부활이 사실이며 그 증거가 무엇인지 확신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부활을 믿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깊이 영접하며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장 부활의 첫열매(12-28)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어떤 사람들은 헬라 사람들 아니면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는 자들입니다. 고린도는 상업의 도시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영혼불멸은 믿었으나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은 참되고 아름다우나 육체는 더럽고 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어야 예수님도 부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들의 주장처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거짓이요 또 우리의 믿음이 거짓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몇 명의 양들을 만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하는 것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한 주일에도 수차례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제자 양성이야 말로 기막힌 사기꾼을 키워 내는 것이고, 여기에 앉아 있는 목자님들은 모두 사기꾼들입니다. 학생 사기꾼, 사모님 사기꾼, 평신도 사기꾼이 되고 맙니다. 또 전 세계로 나가 있는 우리 선교사님들은 국내에서 사기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해외 나가서 까지 사기 치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두 번째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죄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다가 죄로 고통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을 믿고 죽은 자들이 다 망하게 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성도들이 장차 부활할 산 소망가운데 핍박과 고난 앞에서 구차히 살기를 도모하지 않고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 베드로, 빌립, 유다, 시몬,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했고 마태는 칼에 찔렸으며, 나다나엘은 채찍에 맞았고 맛디아와 또 다른 야고보는 돌에 맞았으며 도마는 창이 몸을 관통해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수 없다며 거꾸로 매달렸고 안드레는 엑스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들은 모두 인생의 투자를 잘못한 것입니다. 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망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수치를 무릅쓰고 도망치던 이들이 180도로 변해버렸습니다. 변화된 삶은 제자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 더욱 불쌍한 자가 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가 왜 불쌍한 자가 됩니까? 부활을 소망하며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다 하였는데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한 삶이요 허망한 삶이 되고 맙니다. 부활이 없다면 믿음을 지키고 힘든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욕심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주일에 성경책 대신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갈 수 있고 죄의 쾌락을 좇아 살면 됩니다. 양들을 섬기기보다는 그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재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활이 과연 있을까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삶의 목표를 두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헌신은 예전에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인생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제 나이가 먹어 할 수 없다는 한계의식, 제자양성에 대한 실패감, 허무한 생각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습니까? 세상에서 불쌍한 자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가 이제 희망의 소식을 말하겠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는 이제까지의 모든 우울한 가정들을 단숨에 깨버리는 쇠망치와 같은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추수할 많은 곡식들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앞으로 있을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알려 주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첫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21)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사람에게도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불순종과 죽음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에 부활과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만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구원, 나의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든지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사망 권세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우리의 몸이 비행기 안에서 밖으로 조금이라도 나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면에서 10km이상 떠서 시속900km(초속 250m)이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밖의 온도는 영하50도 이하로 내려갑니다. 얼어 죽든지,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든지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비행기 기내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승무원이 주는 음료수, 밥을 먹으면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가면 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할 때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또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음료와 양식을 먹고 마시며 주님 안에 거할 때 우리의 목적지인 천국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다.
23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예전 성경에는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영어 성경에는 'belong to him'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속했다는 것은 연합한 자란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와 연합하게 될 때에 우리는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능히 부활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1절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므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고 예수님 안에 확실하게 거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말씀을 통해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제가 인생의 주권을 아직도 자신이 꼭 쥐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립 문제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커피 전문점 창업의 꿈을 접고 전공을 살려 자립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저는 직장을 알아보며 사명의 땅인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면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찾을 수 있을 텐데.......생각했습니다. 저는 자립 문제, 장래 문제로 고민하며 내가 예수님 안에 있지 않고 죄악 된 자아, 자기 사랑 안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내려놓는 일을 하였고, 몇 일전 예수님 안에 거하는 감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예수님 안에 거하므로 삶을 얻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저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내려놓겠습니다. 자립문제, 장래 문제를 모두 내려놓고 주님 안에 거하므로 부활의 풍성한 삶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장 깨어 의를 행하라(29-34)
1장에서 바울은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는 부활을 믿는 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날마다 부인했습니다. 또 세상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명예심을 부인했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을 부인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학문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세상에서 얼마든지 존경받으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부활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32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자신도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말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세상 동무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즐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우리는 결코 악한 동무들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악한 동무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부활의 소망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지혜로운 자로 자처하지만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는 허무적 쾌락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면 세속의 누룩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우리 영혼이 부패하고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깨어’라는 말은 술취한 상태로부터 깨어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적 쾌락이라는 술에서 깨어나라는 뜻입니다. ‘의를 행하고’는 공동번역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부활을 부인하는 악한 동무들의 영향을 받아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음란한 행실에 빠져들고 이를 반복하여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하여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현재 계속해서 반복하여 진행되고 있는 죄의 행위를 멈추라는 뜻입니다. 악한 동무들의 영향을 받아 세상 쾌락의 술에 취해서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방탕한 생활을 반복하는 자들은 술 취한 삶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차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 후에 맞이할 영광은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도 없는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굳게 믿고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않고 이 땅에서 날마다 죽는 삶을 살므로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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