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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09년 출8강(15:22-17:7) 하늘에서 양식을 내리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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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169회 작성일 09-03-29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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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출애굽기 공부 8강                                                               
◆ 말씀 / 출애굽기 15:22-17:7
◆ 요절 / 출애굽기 16:4

하늘에서 양식을 내리리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물과 양식을 공급하시고 치료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공급하심을 받고 살았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사는 우리도 사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어려운 이때를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신 하나님(15:22-27) :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밥을 먹지 못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광야 길이 덥고 힘든데 물도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그들이 한 오아시스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습니다. 물을 벌컥벌컥 마셨는데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 마시고 나서 배탈이 나기도 하고 토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마라”는 주로 인간의 심리적 고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미각을 나타낼 때는 ‘쓴 맛’(bitterness)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물이 써서 마실 없어 지명을 ‘마라’라 한 것은 물의 ‘쓴 맛’과 더불어 그들의 마음의 고통내지는 근심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목이 타들어 가는 중에 물을 발견했지만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자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첫 번째 불평 사건입니다. 그들이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보고 기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지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물을 먹지 못했다고 이렇게 빨리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은혜 망각증이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망각증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운한 감정이나 상처 등, 잊어버릴 것을 잊어버려야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이렇게 빨리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은혜는 적더라도 기억하고 미움은 커도 기억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과 망각해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더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를 어려울 때마다 기억하면 지금 당하는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원망하기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과 지도자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안 됩니다. 원망과 불평은 전염병과 같이 퍼져서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병들이기 때문입니다. 쓴 뿌리가 자라게 되면 영적인 생명이 시들시들해지고 결국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백성들이 원망할 때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그에게 가리키셨습니다. 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그 나무가 해독제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나무는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해결책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지만 원망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아야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의 눈과 귀에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악된 본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모세와 같이 부르짖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해결책을 보고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기고 고통스럽고 힘들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내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영광스러운 부활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내가 슬픔으로 눈물을 흘릴지라도 내일은 기쁨이 가득한 웃음을 웃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인생의 쓴 고통을 달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서 10Km 앞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 엘림이 가까이 있었습니다. 더 좋은 것이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지만 인내하고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감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매일 문제없이 먹던 밥도 위장병이 생기거나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도 사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입니다. 고난을 체험한 사람들이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법입니다. 26절에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병든 것들을 고난을 통해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의를 행하면 질병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건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여호와이십니다. 병 중에 있는 사람이 죄를 끊고 의를 행하면 치료가 급속히 이루어집니다(사58:8). 한 사모님은 말씀에 순종하고 살 때 폐결핵이 왔다가 그냥 치료가 되었습니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고 놀랐는데 더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나았다는 것입니다. 치료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신 하나님(16:1-36) : 이스라엘 자손이 엘림에서 떠나 신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이때가 애굽을 떠나온 지 한 달째였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음식도 바닥이 났습니다.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제 어려움 앞에서 그들의 원망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망하는 말을 들으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들에게 고기와 떡을 주어 배불리 먹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원망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끝이 좋지 않습니다. 이왕 구하려면 은혜롭게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이제까지 놀라운 이적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보채는 어린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서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려 주십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빵가루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말은 히브리어로 “만후”인데 만나를 뜻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비와 태양 빛을 주셔서 농작물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셔서 일할 수 있게 하시고 그 결과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고 그것을 누리며 산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돈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쌓아두기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죽도록 돈을 모으기 위해서 일하다가 돈을 모아놓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청교도들은 저축을 장려했지만 죽을 때 돈을 남기고 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선한 일을 위해서 쓰고 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저축을 하는 것도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쌓아놓기 위한 것이라면 언젠가는 가치가 폭락하고 도둑을 맞고 문제가 생겨서 못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무위도식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려 주시지만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명했습니다(살후3:10).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양식을 얻게 되고 그 수고의 열매로 복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만나 시험’은 에덴 동산의 ‘선악과 시험’을 연상시킵니다. 선악과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영생에 이르게 하지만 불순종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한대의 자유를 주시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을 주리신 후에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는 말씀을 붙잡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거두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습니다(21). 욕심을 부려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욕심으로 많이 거두면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참된 만족을 주십니다. 그들은 매일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생명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매일 매일 감당하면서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한꺼번에 며칠씩 먹거나 가끔가다 양식을 먹을 때 영적으로 자라지 못합니다.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게 됩니다. 신앙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을 보면 일용할 양식을 꾸준히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잘 먹는 사람은 은혜의 살이 포동포동쪄서 만나는 사람마다 은혜를 끼칩니다. 감사와 기쁨과 힘이 있습니다. 또 일용할 양식은 아침 일찍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아침 이슬과 함께 주셨습니다. 아침 해가 떠올라 태양이 뜨겁게 내리 쬐면 다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해뜨기 전 아침 일찍 먹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할 때 이슬 같은 은혜가 심령에 임하게 됩니다. 안일하고 게을러서 늦잠을 잘 때 신령한 은혜를 다 놓치고 식은 밥을 먹게 됩니다. 이슬과 같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함으로 새벽을 깨우는 영적 투쟁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은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먹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날에 필요한 영적 힘을 덧입기 위함입니다. 그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숨은 죄악을 고백하고 한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새로운 힘과 능력과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거두던 것의 갑절을 주시고 안식일에는 쉬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까지 노예 생활을 하면서 쉼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일중독자와 같이 일을 쉬면 마음이 도리어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않고 쉬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가족들과 교제를 나누고 찬양을 하고 경배하면서 살도록 하십니다. 한마디로 질 높은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그들은 사십 년 동안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일을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다음에 그들이 또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32). 그들이 이 떡을 항상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떡을 취할 수 있고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살을 먹고, 생수인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그 속에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떡과 참된 음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반석에서 강물을 내신 하나님(17:1-7) : 이스라엘 자손이 신 광야를 떠나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변함없이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책망합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맛사’는 ‘시험’, ‘유혹’을 의미합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미리 미리 챙겨주시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힘들어 죽겠는데 가만히 계시다가 꼭 이렇게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해야 역사하실까요?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들을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욕심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신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테스트로서 실력이 있는가를 재는 것입니다. 시험은 교육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앞 두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이라는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를 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동기는 불신입니다. 그들의 시험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신뢰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면서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다그칩니다. 모세는 사람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잡고 백성들 앞을 지나가라고 하십니다. 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에 있는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지팡이로 그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작살을 내는 대신에 모세의 지팡이로 자기를 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희생을 통해서 생수를 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4절에서 바울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해석했습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군병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는데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그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함으로 예수님의 몸에는 채찍이 내리쳐졌고, 머리에는 수치스러운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우리가 물질과 정욕의 욕심에 유혹되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우리의 만족을 모르는 욕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음을 갖는 자, 하나님의 사랑의 물을 마시는 자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십니다. 그 물은 우리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는 사람은 때를 따라 과실을 맺는 나무와 같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05편 41절에는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반석을 쳐서 내신 물은 강 같이 흘러서 200만 명을 먹이고 가축들을 시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한 삶을 살도록 축복하십니다.

  마른 땅보다 더 마른 것이 반석인데 하나님은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나올 것 같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생수를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아무리 짜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수건을 짜듯이 자신을 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사랑이 풍성하게 흘러나와야 하는데 내 마음이 메말라서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40세가 되어도 인간이 싫어지지 않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유언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세바스찬 샹포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말씀을 받고 양들을 먹여야 하는데 말씀의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가 나와야 하는데 기도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섬김을 베풀어야 하는데 섬길 마음이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너는 그 반석을 치라.” 반석은 바위입니다. 반석을 쳐 봤자 지팡이만 부러지고 자기 손만 아플 수 있습니다. 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딱딱한 바위에서 샘물이 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불합리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자신을 도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믿는 자와 함께 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반석을 쳤습니다. 그러자 이성을 초월한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반석에서 샘물이 분수와 같이 솟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도 생수를 강같이 흘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사랑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구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집니다(롬5:5). 
  우리 각자도 한 죄인으로서 다른 한 인간의 죄악을 감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알고 체험한 이상 우리도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죄인들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훈련을 40년 동안 줄기차게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훈련과 사랑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목자로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죄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훈련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이 세상도 살맛이 나는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목자로서, 사명인으로서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시편 95년 8-10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하나님은 완악한 죄인들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무지한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지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희생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와 사탄의 노예였던 우리는 죄악된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인내로 우리를 감당하시고 훈련하사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으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새롭게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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