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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09년 출7강(13:17-15:21)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신 큰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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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181회 작성일 09-03-2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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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출애굽기 공부 7강                                                               
◆ 말씀 출애굽기 13:17-15:21
◆ 요절 출애굽기 14:15,16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신 큰 능력

  서커스단에서 길들여진 코끼리는 어릴 때부터 쇠사슬에 묶어 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커서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도 한쪽 다리에 얇은 쇠사슬만 묶어 놓으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그 한곳에만 매여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코끼리는 울타리와 쇠사슬을 극복하고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쇠사슬과 말뚝을 힘없이 뽑아버리고 달아날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지만,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반신반의하는 믿음으로 인해 죄에 대한 승리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에 무참하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킨 하나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어떻게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지식을 앞서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은 항상 “먼저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증거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관계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예상하지 못한 길로 인도하신 사건과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 홍해 사건 그리고 모세와 미리암의 찬양이 나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상하지 못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13:17-22) :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길은 일주일이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은 국제 교역로로서 도로가 잘 닦여져 있었습니다. 그 길에는 잘 훈련된 정예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습니다. 노예 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훈련된 군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 길을 잘 아는 사람은 그들이 북쪽으로 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선회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 남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길을 아는 사람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따라가야 했습니다. 광야 길이 어떤 지를 체험해 본 사람들은 겁이 났을 것입니다. 이제 이 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광야에서 죽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마지못해서 억지로 가기 보다는 기쁨으로 가야 합니다. 반발하면서 가기보다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가야만 할 길이라면 수동적으로 갈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왕 가는 길 고생을 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주일이면 갈 길을 40일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불평하고 원망하여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 길로 돌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들이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지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정예화된 군대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지 않도록 광야로 돌리신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노예 백성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훈련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먹는 훈련과 안식일을 지키는 기본 훈련을 시키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조급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천히 일하시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빨리 빨리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느긋느긋하게 하면 답답해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속도가 강조되는 현대사회에 한국의 국민성이 발전에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돌아가는 길이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훈련 없이 일찍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가 망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55:8-9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잘 아시고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보시기 때문에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건축 역사를 볼 때 처음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룸 모델로 하여 우리가 돈을 별로 내지 않고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과 희생을 드려서 순차적으로 짓기를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방향 선회를 하느라 벌써 4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빨리 성취하는 것보다 사람을 잃지 않는 것을 더 원하셨습니다. 사람이 건물보다 더 귀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소원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을 때라도 겸손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순종하여 나아가야겠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좁은 길이지만 생명의 길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하는 그릇을 만들도록 준비하기 위해서 빠른 길보다 돌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쉽게 얻는 축복은 귀한 줄을 모르지만 고생스럽게 얻는 축복은 귀한 줄을 알게 됩니다. 늦게 주시니까 그것이 더 귀하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되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으로 태양 빛을 가려주시고 밤에는 광야의 냉기를 따뜻한 불로 덥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의 불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성령 충만한 주의 종들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앞으로 나아가라(14:1-31) :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하게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온 군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노예들이 하던 일을 자기들이 해 보더니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내보낸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다시 잡아들이기 위해서 추격부대를 구성했습니다. 그는 전군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쳤습니다. 비하히롯은“구출”이란 뜻이고, 바알스본은“주님이 내려다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참 유우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르렀습니다. 애굽의 병거에는 날카로운 칼과 창들이 바퀴에 붙어 있어서 군중 속으로 마차를 몰면 사정없이 죽어나갈 수 있습니다. 앞에는 시퍼런 홍해가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뒤에서는 호랑이가 달려들어 도망하고 있는데 천 길 낭떠러지에 막 다다른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1-12).” 그들은 애굽에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부르짖던 때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어 이제 자유를 얻었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가나안 땅의 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노예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열 가지 재앙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극복할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부터 했습니다. 위기는 그들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가 터질 때마다 두려워하고 노예근성이 발동했습니다. 그들은 애굽 사람의 노예로 사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근시안적이고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항상 의심의 구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깊은 사랑을 모르고 자기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죽이시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앞날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을 어떻게 도왔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들이 처한 위기는 믿음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이 상황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친히 싸우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권면합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변함없는 믿음을 갖고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확신이 이루어내는 자기달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소유하는 완전한 확신인데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적을 창조해 내십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홍해를 가르고, 물 위로 걸어서 당신에게 가도록 명하여 주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절망스럽고 막막한 현실이 놓일 때 우리는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을 덧입기까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의 확신이 생기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모세에게 무슨 명령을 하십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기도할 때가 있고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모세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부르짖느냐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홍해가 갈라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아가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이 명령은 주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요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것은 굴복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면 나는 굴복하게 될 것이고 내가 굴복한다면 나는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적인 굴복없이 계속적인 순종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굴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을 통해서 시험을 받습니다. 참된 순종만이 참된 믿음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고 묻습니다. 야고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못한다”입니다. 야고보는 다시 도전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8).” 야고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과 굴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행함과 순종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트리취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의 동의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그러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한 개인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해변 가를 서성거리면서 불분명하고, 두려워하면서,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신 안에 그러한 원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홍해를 건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주시는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에 관한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순종을 위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것이라도 그를 대신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갔고 모세는 손을 들어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섰습니다. 그 급박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습니다. 이때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장풍이라고 불어내듯이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불게 하셨습니다. 그 힘이 어찌나 집중적이고 강했던지 바닷물이 물러가고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갈라지는 물 사이로 이스라엘 자손이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도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똥줄이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셨습니다. 말들은 엎어지고 넘어지고 사람들은 자빠지고 대열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당황하며 소리쳤습니다.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었습니다. 물이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믿음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다른 예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널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요구를 하셨습니까? 먼저 그들로 성결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3:8).”고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13).” 요단강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쳤습니다. 그런데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러 궤를 멘 제사장들이 발을 물 가에 잠그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 쌓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오라”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라!”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만한 확신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존하여서 확신을 이끌어내야만 했습니다. 거룩한 확신이 가득 찬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에게 영감적인 확신을 불러일으켜 주었고 베드로는 신속하게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길고 구체적인 설명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영혼을 울리는데 그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조용하고 은은하게 우리의 귀를 울립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에 베드로처럼 즉시 순종하여 배에서 내린 다음 물 위를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를 소원합니다. 믿음과 평화와 사랑 같은 거룩한 영적인 요소들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는 기쁨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물 위를 걷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 분처럼 물리적인 수압의 법칙이 아닌 하늘의 믿음의 법칙에 의거하여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십니다.

  한 번은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 주시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의심이 자기 아들을 치유 받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소년의 아버지는 열정적인 갈망으로 간구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4)” 그 장면에서 믿음이 포기 되거나 취소되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정욕과 이기심의 죄의 파도가 홍해와 같이 넘실대지만 믿음으로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업자가 많이 생기는 이때에 믿음으로 직장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센터 건축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고자 하면 되고, 하면 되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양도 얻고, 제자 양성을 할 수 있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셋째, 모세와 미리암의 찬양(15:1-21) :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15장에 “여호와”라는 단어가 14번, “그”라는 단어가 50번 나옵니다. 한마디로 찬양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정말로 위대한 분이 누구신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우리가 원수를 우리 목전에서 엎으시는 하나님을 볼 때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할 때 찬양과 기쁨이 터져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절망하고 낙담할 수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뒤에서는 사탄의 전차들이 들이닥치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학생 제자 양성을 하기 위해서 전도하고 온 양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목자님들께 믿음을 주시고 양들을 초청하는 역사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양들이 변화되는 역사를 이루어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건축 역사도 줄기차게 기도하고 믿음으로 이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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