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09 여름수양회 저녁1강 /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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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여름수양회
말씀 / 요한복음 5:1 ~ 9
요절 / 요한복음 5:8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홍대 홈페이지에 있는 상담게시판에 한 학생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이제 곧 졸업이다. 지난 한해는 휴학을 하는 바람에 5년째 대학생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전문 지식과 어른스러운 행동, 넓은 인간관계 등을 갖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점점 늪으로 빠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업에는 열중하지 못하고 있고, 이전보다도 예민해 져서 친구들과도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으며, 툭하면 술이나 담배에 의지하기 일쑤였다.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쩌면 현재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 이 글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내 삶이 잘 풀려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형제처럼 내면문제, 장래문제, 현실문제 속에서 절망하며 무력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의미있고 힘찬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베데스다 못 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베데스다’는 히브리어인데 우리말로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베데스다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살벌한 경쟁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 경쟁 사회에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셨고, 그의 경쟁력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네가 낫고자 하느냐 (1~7)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1) 당시 유대인들은 절기 때마다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절기를 지켰다고 합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숫자가 거의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하니 대단한 행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예루살렘 북동쪽에 양문이라는 성문이 있었습니다. 이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행각 5개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맹인, 다리저는 사람, 혈기마른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인간의 의술로는 고칠 수 없어 거기에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 가는 '아파유, 아파유 으음 으음'하는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의사 한 명 없는 베데스다를 떠나지 않고 거기 있는 것은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베데스다 라는 이름의 의미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연못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때 연못에 들어가면 어떤 병도 낫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은 자기에게 이 기적과 요행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이 연못가에 와서 누워 있었습니다. 혹여나 먼저 들어가려고 연못 가까운 자리는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습니다. 저라면, 아예 몸이 퉁퉁 불어 터지더라도, 연못 속에 그냥 들어가서 물이 움직일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대부분 이 베데스다 연못이 간헐천이었다고 말합니다. 간헐천은 지하에 용암가스가 분출되면서 물이 하늘로 솟구치는 샘을 말합니다. 유황성분이 많아서 피부병과 같은 질환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소문이 퍼지다가 이런 전설까지 생겨난게 아닌가 싶습니다. 설령, 이 연못의 소문이 사실이라도 누가 일등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래도 병이 있더라도 몸이 성한 사람이 들어갑니다. 감기 걸리고, 무좀 걸린 사람들, 공주병걸린 아가씨, 치질걸린 아저씨등 이런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보지 못하는 맹인, 다리가 다친 사람들, 중풍병에 걸려서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이 연못에 일등으로 전혀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모순이 있는 곳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을 보면서 더욱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은, 절대로 1등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 불쌍한 사람들이 끝내 이 연못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맹인이,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중풍병자들이, 심지어 오늘 우리가 만나는 38년된 병자까지도 1등을 포기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베데스다 연못을 보면서, 마치 오늘날 현대의 무한경쟁시대를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땅의 자본주의는 분명히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누구나 열심히 해서 남들보다 뛰어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들보다 뛰어나게 되는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겁니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어서, 더 많이 노력하면, 남들은 그 시간에 팽팽 노는게 아닙니다. 모두가 경쟁에서 이길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청년실업, 88만원세대, 인턴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어두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오늘도 대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전공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만 사실은 현실이 막막합니다. 요새는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도 예전 같지가 않아 정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다 갖고 있는 스펙이라도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막상 취업에 도전해보면 알겠지만 내가 뭐하고 살았나 할만큼 실력좋은 친구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등 외국에서 공부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요즘 취업 경쟁률이 베데스다 못에 1등으로 뛰어드는 확률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고뇌하며,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취업할 생각도 없이 그냥 집에서 누워 지내고 있는 소위 니트족이라 불리는 사람이 113만명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니트족에서 히키코모리, 초식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히키코모리는 경쟁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방에 틀여 밖혀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초식남이 뭐냐면 남성적인 성향을 거부하고 자기생활이나 취미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경쟁을 거부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세대를 말합니다. 이 모두가 사실은 경쟁사회가 빚은 결과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어디를 가나 온통 경쟁을 부축이고 있습니다. ‘경쟁력’이 우리 시대의 Key Word가 되었고, 세상은 ‘Red Ocean-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남보다 뒤처지면 죽을 것 같은 시대, 남들 하는 것 안하면 혼자 낙오될 것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뭐 하나라도 더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그토록 열심히,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5절을 보십시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그곳에 38년 동안 누워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에 걸린지 38년인지, 베데스다에 온지 38년인지 알 수 없지만, 오랬동안 병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보다는 '38년 된 병자'라고 부르는게 익숙하였습니다. 그가 여자였다만 38댁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중풍병자인 것 같습니다. 6절에 <그 누운 것을>, 7절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내일 모래면 40년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이는 '아후~ 38년 동안 했으면 됐지 뭘 해보겠다고 지금까지 누워있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38년 동안 그렇게 누워있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소문을 통해 이곳에 오면 어떤 병자도 나을 것이라 하여 봇다리 싸들고 베데스다에 입성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꼭 자기만은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일년 이년이 지나도 그는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번번히 옷만 적셨을 뿐, 계속 실패를 하였습니다. 수없이 신세를 한탄하고 새롭게 다짐하고, 때론 하늘을 원망하며, 등등 어느덧 시간이 흘러 38년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많은 환자 중에 유독 38년 병자에게 가셔서 그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에서 유독 38년 된 이 병자에게 관심을 가지셨을까요? 병이 오래되서 일까요? 다른 병자들보다 의로웠기 때문일까요? 착했기 때문일까요?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병에서 고침 받은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이 사람이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당한 것은 죄의 심판이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의 심판을 받을 정도라면 결코 작은 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이 보실 때 영육간의 가장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이었던거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가 그동안 병으로 얼마나 고생하였는가를 보셨습니다. 병으로 인한 그의 고통과 슬픔을 아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고독을 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어떤 자를 주목하시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자를 주목합니까? 보통 사람을 볼 때 대게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주목합니다. 아니면 외모가 좀 되거나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눈이 갑니다. 능력이 있고, 성공한 사람들에게 끌립니다. 요즘에는 뭐니뭐니해도 돈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주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참 부담스러운 38년된 병자를 주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버릴지라도 예수님은 그를 존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 가지가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우리를 주목하여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정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입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시고,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38병자처럼 오늘날의 사람들도 내외적으로 많은 실패 속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자신을 원망하고, 노력한만큼 대가가 없는 사회에 반발하고, 절망하며,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잘 아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찾아 오셨습니다. 저희가 수양회를 통해 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내가 병들고, 죄에 넘어졌을지라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38년동안 낫지 못한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을까요? 참 쓸데없는 질문 같아 보입니다. 물으나 마나 그는 지금 병을 낫고 싶어 연못가에 누워 있는데 말입니다. 이는 그의 마음 가운데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기 위해서입니다.
병에 걸리면 처음에는 누구나 병에서 고침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 해 보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병이 호전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심하게 됩니다. ‘병에서 낫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의심에 붙잡히면 병에서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약해집니다. 그때 점점 낙심이 그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그것이 그의 인생이 되버립니다. 물론 병에서 낫고 싶은 마음이야 있습니다. 자기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것은 천에 한 명, 만에 한 명 있는 일이지 자기 같은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육신이 죽기 전에 마음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 낫고 싶습니다. 제발 낫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병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답변은 한마디로 도와줄 사람이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병이 낫습니다. 그래서 병자들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맹인은 물이 동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물이 동하는 것을 보고 맹인을 못가로 인도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이나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이 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자기 힘으로는 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부축해주거나 엎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을 보면 병자가 말하기를 “I have no man"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의 진심은 ”아~ 나도 돈 많은 부모를 만났더라만 나도 사람을 구해 일등할 수 있었을텐데..“ 이게 그가 생각한 병낫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항상 이런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는 부모를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운명적인 생각과 의존심 때문에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의존심이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원망과 불평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시달립니다. 일어나 활동하는 시간보다 드러누워 원망하고 불평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성격이 소심하게 된 것이 무서운 아버지 아래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일류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은 교육부 장관 탓이라며 원망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불행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자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의존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의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도와 주어야 할 존재이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믿고 의지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나 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의존심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2. 일어나 걸어가라 (8~9)
병자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 말씀은 병자에게 순종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병이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일어나 걸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순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도움이 되셨고, 예수님의 말씀이 그를 일으켜 세워서 힘차게 걷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이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5:2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38년된 병자는 이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베데스다의 그 병든 곳에서 새 세계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베데스다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베데스다에서는 천사가 내려와야 하고, 물이 움직여야 하고, 그리고 거기 맨 먼저 뛰어들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에는 이렇게 많은 한계와 제한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등을 할 만한 능력이 있든지, 아니면 그를 못에 넣어줄만한 ‘빽’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등 할 능력도 없고 그를 못에 넣어줄 ‘빽’이 없는 사람에게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 아니라 잔인한 집일 뿐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38년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이 도우셨을 때,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는 일어나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그의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셨습니다.
시편 121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시 121:1,2) 이 시인이 노래하고 사모하던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는 일등을 할 능력이 없어도 됩니다.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도 됩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일본에 계신 최다니엘 선교사님은 한국에 있을때 회사가 부도가 나 새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시절했던 서원기도가 생각이 나 일본선교사로 가고자 인생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사이트를 뒤져서 취업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일본에 회사에 취업하려면 최소한 일본에는 가야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력서를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국사람이 외국에서 이력서를 보내면 어느 누가 그걸 그 사람을 믿고 뽑겠습니까? 선교사님은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적었지만 믿음으로 기도하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랬을때 6개월만에 기적적으로 취업이 되어 일본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경쟁력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 살고 있고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만 갑니다. 일등에게나 꼴찌에게나 세상은 살벌하고 두렵습니다. 늘 불안하고 스트레스는 커져만 갑니다. 운명주의, 의존심, 무력증, 패배주의, 등등의 몹쓸 병에 걸립니다. 세상에 대한 적개심에 시달리고,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 주위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베데스다이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는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을 주시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일어나 힘차게 걸어가는 인생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성공할려면 일등을 하거나 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적도 일등이어야 하고, 토익이나 토플점수도 남보다 한 점이라도 더 높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부모님이이 유력해야 하고, 교수님이나 선배들도 잘 사귀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모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생겨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생각하고 그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꼭 일등을 해야 세상에서 성공합니까? 빽이 든든해야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일등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빽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베데스다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Red Ocean을 벗어나 Blue Ocean에서 헤엄칩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명인의 삶을 살 힘을 얻으며, 남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세상을 경쟁적으로 살기보다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삶으로써 세상에서 병들어 짓눌리지 않고 일어나 힘차게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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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요한복음 5:1 ~ 9
요절 / 요한복음 5:8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홍대 홈페이지에 있는 상담게시판에 한 학생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이제 곧 졸업이다. 지난 한해는 휴학을 하는 바람에 5년째 대학생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전문 지식과 어른스러운 행동, 넓은 인간관계 등을 갖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점점 늪으로 빠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업에는 열중하지 못하고 있고, 이전보다도 예민해 져서 친구들과도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으며, 툭하면 술이나 담배에 의지하기 일쑤였다.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쩌면 현재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 이 글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내 삶이 잘 풀려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형제처럼 내면문제, 장래문제, 현실문제 속에서 절망하며 무력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의미있고 힘찬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베데스다 못 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베데스다’는 히브리어인데 우리말로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베데스다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살벌한 경쟁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 경쟁 사회에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셨고, 그의 경쟁력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네가 낫고자 하느냐 (1~7)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1) 당시 유대인들은 절기 때마다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절기를 지켰다고 합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숫자가 거의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하니 대단한 행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예루살렘 북동쪽에 양문이라는 성문이 있었습니다. 이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행각 5개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맹인, 다리저는 사람, 혈기마른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인간의 의술로는 고칠 수 없어 거기에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 가는 '아파유, 아파유 으음 으음'하는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의사 한 명 없는 베데스다를 떠나지 않고 거기 있는 것은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베데스다 라는 이름의 의미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연못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때 연못에 들어가면 어떤 병도 낫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은 자기에게 이 기적과 요행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이 연못가에 와서 누워 있었습니다. 혹여나 먼저 들어가려고 연못 가까운 자리는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습니다. 저라면, 아예 몸이 퉁퉁 불어 터지더라도, 연못 속에 그냥 들어가서 물이 움직일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대부분 이 베데스다 연못이 간헐천이었다고 말합니다. 간헐천은 지하에 용암가스가 분출되면서 물이 하늘로 솟구치는 샘을 말합니다. 유황성분이 많아서 피부병과 같은 질환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소문이 퍼지다가 이런 전설까지 생겨난게 아닌가 싶습니다. 설령, 이 연못의 소문이 사실이라도 누가 일등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래도 병이 있더라도 몸이 성한 사람이 들어갑니다. 감기 걸리고, 무좀 걸린 사람들, 공주병걸린 아가씨, 치질걸린 아저씨등 이런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보지 못하는 맹인, 다리가 다친 사람들, 중풍병에 걸려서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이 연못에 일등으로 전혀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모순이 있는 곳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을 보면서 더욱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은, 절대로 1등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 불쌍한 사람들이 끝내 이 연못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맹인이,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중풍병자들이, 심지어 오늘 우리가 만나는 38년된 병자까지도 1등을 포기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베데스다 연못을 보면서, 마치 오늘날 현대의 무한경쟁시대를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땅의 자본주의는 분명히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누구나 열심히 해서 남들보다 뛰어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들보다 뛰어나게 되는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겁니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어서, 더 많이 노력하면, 남들은 그 시간에 팽팽 노는게 아닙니다. 모두가 경쟁에서 이길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청년실업, 88만원세대, 인턴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어두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오늘도 대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전공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만 사실은 현실이 막막합니다. 요새는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도 예전 같지가 않아 정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다 갖고 있는 스펙이라도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막상 취업에 도전해보면 알겠지만 내가 뭐하고 살았나 할만큼 실력좋은 친구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등 외국에서 공부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요즘 취업 경쟁률이 베데스다 못에 1등으로 뛰어드는 확률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고뇌하며,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취업할 생각도 없이 그냥 집에서 누워 지내고 있는 소위 니트족이라 불리는 사람이 113만명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니트족에서 히키코모리, 초식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히키코모리는 경쟁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방에 틀여 밖혀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초식남이 뭐냐면 남성적인 성향을 거부하고 자기생활이나 취미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경쟁을 거부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세대를 말합니다. 이 모두가 사실은 경쟁사회가 빚은 결과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어디를 가나 온통 경쟁을 부축이고 있습니다. ‘경쟁력’이 우리 시대의 Key Word가 되었고, 세상은 ‘Red Ocean-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남보다 뒤처지면 죽을 것 같은 시대, 남들 하는 것 안하면 혼자 낙오될 것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뭐 하나라도 더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그토록 열심히,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5절을 보십시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그곳에 38년 동안 누워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에 걸린지 38년인지, 베데스다에 온지 38년인지 알 수 없지만, 오랬동안 병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보다는 '38년 된 병자'라고 부르는게 익숙하였습니다. 그가 여자였다만 38댁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중풍병자인 것 같습니다. 6절에 <그 누운 것을>, 7절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내일 모래면 40년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이는 '아후~ 38년 동안 했으면 됐지 뭘 해보겠다고 지금까지 누워있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38년 동안 그렇게 누워있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소문을 통해 이곳에 오면 어떤 병자도 나을 것이라 하여 봇다리 싸들고 베데스다에 입성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꼭 자기만은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일년 이년이 지나도 그는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번번히 옷만 적셨을 뿐, 계속 실패를 하였습니다. 수없이 신세를 한탄하고 새롭게 다짐하고, 때론 하늘을 원망하며, 등등 어느덧 시간이 흘러 38년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많은 환자 중에 유독 38년 병자에게 가셔서 그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에서 유독 38년 된 이 병자에게 관심을 가지셨을까요? 병이 오래되서 일까요? 다른 병자들보다 의로웠기 때문일까요? 착했기 때문일까요?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병에서 고침 받은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이 사람이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당한 것은 죄의 심판이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의 심판을 받을 정도라면 결코 작은 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이 보실 때 영육간의 가장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이었던거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가 그동안 병으로 얼마나 고생하였는가를 보셨습니다. 병으로 인한 그의 고통과 슬픔을 아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고독을 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어떤 자를 주목하시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자를 주목합니까? 보통 사람을 볼 때 대게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주목합니다. 아니면 외모가 좀 되거나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눈이 갑니다. 능력이 있고, 성공한 사람들에게 끌립니다. 요즘에는 뭐니뭐니해도 돈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주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참 부담스러운 38년된 병자를 주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버릴지라도 예수님은 그를 존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 가지가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우리를 주목하여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정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입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시고,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38병자처럼 오늘날의 사람들도 내외적으로 많은 실패 속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자신을 원망하고, 노력한만큼 대가가 없는 사회에 반발하고, 절망하며,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잘 아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찾아 오셨습니다. 저희가 수양회를 통해 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내가 병들고, 죄에 넘어졌을지라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38년동안 낫지 못한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을까요? 참 쓸데없는 질문 같아 보입니다. 물으나 마나 그는 지금 병을 낫고 싶어 연못가에 누워 있는데 말입니다. 이는 그의 마음 가운데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기 위해서입니다.
병에 걸리면 처음에는 누구나 병에서 고침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 해 보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병이 호전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심하게 됩니다. ‘병에서 낫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의심에 붙잡히면 병에서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약해집니다. 그때 점점 낙심이 그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그것이 그의 인생이 되버립니다. 물론 병에서 낫고 싶은 마음이야 있습니다. 자기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것은 천에 한 명, 만에 한 명 있는 일이지 자기 같은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육신이 죽기 전에 마음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 낫고 싶습니다. 제발 낫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병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답변은 한마디로 도와줄 사람이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병이 낫습니다. 그래서 병자들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맹인은 물이 동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물이 동하는 것을 보고 맹인을 못가로 인도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이나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이 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자기 힘으로는 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부축해주거나 엎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을 보면 병자가 말하기를 “I have no man"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의 진심은 ”아~ 나도 돈 많은 부모를 만났더라만 나도 사람을 구해 일등할 수 있었을텐데..“ 이게 그가 생각한 병낫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항상 이런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는 부모를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운명적인 생각과 의존심 때문에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의존심이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원망과 불평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시달립니다. 일어나 활동하는 시간보다 드러누워 원망하고 불평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성격이 소심하게 된 것이 무서운 아버지 아래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일류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은 교육부 장관 탓이라며 원망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불행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자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의존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의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도와 주어야 할 존재이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믿고 의지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나 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의존심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2. 일어나 걸어가라 (8~9)
병자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 말씀은 병자에게 순종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병이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일어나 걸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순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도움이 되셨고, 예수님의 말씀이 그를 일으켜 세워서 힘차게 걷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이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5:2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38년된 병자는 이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베데스다의 그 병든 곳에서 새 세계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베데스다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베데스다에서는 천사가 내려와야 하고, 물이 움직여야 하고, 그리고 거기 맨 먼저 뛰어들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에는 이렇게 많은 한계와 제한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등을 할 만한 능력이 있든지, 아니면 그를 못에 넣어줄만한 ‘빽’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등 할 능력도 없고 그를 못에 넣어줄 ‘빽’이 없는 사람에게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 아니라 잔인한 집일 뿐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38년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이 도우셨을 때,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는 일어나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그의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셨습니다.
시편 121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시 121:1,2) 이 시인이 노래하고 사모하던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는 일등을 할 능력이 없어도 됩니다.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도 됩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일본에 계신 최다니엘 선교사님은 한국에 있을때 회사가 부도가 나 새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시절했던 서원기도가 생각이 나 일본선교사로 가고자 인생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사이트를 뒤져서 취업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일본에 회사에 취업하려면 최소한 일본에는 가야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력서를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국사람이 외국에서 이력서를 보내면 어느 누가 그걸 그 사람을 믿고 뽑겠습니까? 선교사님은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적었지만 믿음으로 기도하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랬을때 6개월만에 기적적으로 취업이 되어 일본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경쟁력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 살고 있고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만 갑니다. 일등에게나 꼴찌에게나 세상은 살벌하고 두렵습니다. 늘 불안하고 스트레스는 커져만 갑니다. 운명주의, 의존심, 무력증, 패배주의, 등등의 몹쓸 병에 걸립니다. 세상에 대한 적개심에 시달리고,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 주위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베데스다이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는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을 주시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일어나 힘차게 걸어가는 인생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성공할려면 일등을 하거나 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적도 일등이어야 하고, 토익이나 토플점수도 남보다 한 점이라도 더 높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부모님이이 유력해야 하고, 교수님이나 선배들도 잘 사귀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모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생겨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생각하고 그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꼭 일등을 해야 세상에서 성공합니까? 빽이 든든해야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일등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빽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베데스다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Red Ocean을 벗어나 Blue Ocean에서 헤엄칩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명인의 삶을 살 힘을 얻으며, 남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세상을 경쟁적으로 살기보다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삶으로써 세상에서 병들어 짓눌리지 않고 일어나 힘차게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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