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9년 마41강(마22:1-14) 만나는 사람마다 데려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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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수양회 준비 특강 말씀 마태복음 22:1-14요절 마태복음 22:9 만나는 사람마다 데려오라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올해 우리는 센터 건축이라는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일생에 한 두 번 할 수 있는 큰일입니다. 일년 중에서 가장 큰일은 여름 수양회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큰일입니다. 구원받은 한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그 한 사람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지 기대가 됩니다. 한 사람을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일만큼 큰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와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1-4) :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임금은 혼인 잔치를 위해서 마음을 들여서 준비를 했습니다. 초청된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이는 그 잔치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풍성하고도 온전한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도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복음 안에는 인간의 영혼의 궁핍함을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배고픔을 채워주고, 영적인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요6:47-58),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수로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요4:14). 하나님의 평화, 용서, 이 세상에서 산 소망, 다시 올 세상에서의 영광 등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의 초청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그의 의로 옷을 입히십니다. 세상 것과 다른 그 나라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마지막 날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복음은 배고픈 자에게 양식을, 슬픈 자에게 기쁨을, 쫓겨난 자에게 쉼터를, 잃은 자들에게 사랑하는 친구를 주십니다. 이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세상에 많은 잔치 즉 백일잔치, 돌잔치, 칠순잔치 등 생일잔치, 승진 축하 잔치, 출판 기념 잔치, 집들이 등 많은 잔치가 있지만 혼인 잔치는 잔치 중에서도 가장 풍성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가장 성대한 잔치입니다. 은혜와 행복이 넘치는 잔치입니다. 왕은 그 나라에서 진기한 음식을 다 준비할 것입니다. 불고기, 갈비찜, 오리훈제, 양상추 참치샐러드, 모듬 참치, 육회, 송이버섯요리, 바닷가재 요리, 수삼냉채, 왕새우찜, 꼬리수육, 삼합, 전복죽, 팥죽, 호박죽, 영덕대개, 영산포 홍어, 시루떡, 인절미, 백설기, 절편, 과일 냉채, 수정과, 파인애플 화채, 식혜 거기다가 동교센터가 낳은 요리사 곽앤나 사모님이 잘 하는 궁중 떡볶이 까지, 아주 진수성찬을 준비하였습니다. 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최고의 성악가들, 각 지방의 명창들도 초청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여름 수양회를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일곱 분의 말씀 강사님들이 풍성하고 은혜로운 생명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거기다가 새양들과 접촉점을 잘 만들기 위해서 영화설교를 합니다. 음악 팀에서 심금을 울리는 싱어롱과 특송과 경배와 찬양을, 박효진 장로님의 특강이 있고 정이삭 선교사님의 은혜롭고 감동적인 인생 소감 및 선교 보고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어린이 합창단의 합창이 있습니다. 좋은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들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따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말씀 잔치가 있고, 인형극도 있고 여름방학이 추억에 남도록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 딸은 이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는 참석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더 없이 좋은 영적 잔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준비를 했지만 사람들을 어떻게 여름 수양회에 초청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면 복음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면 그들과 기쁨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됩니다. 한 사모님은 양에게 한 학기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식사로 섬기고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말씀을 잘 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그가 이번 수양회에 가면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그가 수양회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한 자매님은 방학이라 집에 온 동생을 수양회에 초청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방학 동안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도록 돕고자 합니다.
둘째, 제한이 없는 복음 잔치로의 초청(5-10) : 임금은 혼인잔치에 ‘청한 사람들’을 어떻게 초청했습니까? 팔레스틴에서 연회를 배설하면 초대를 두 번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첫째 초대는 손님들의 참석 의향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 초대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3절에서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라고 한 것은 두 번째 초대를 가리킵니다. 이번에 초대를 받은 자들은 이미 첫 번째 초청을 수락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번째 초청을 받았을 때, 오기를 싫어했습니다(3). 그들은 다시 권함을 받았지만 이 역시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거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들은 자기 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에 중독이 되어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여 함께 기쁨을 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았다는 것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Pay no attention). 그들이 왕의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한지 그리고 교만한지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때는 대통령의 초청에 응하지 않아 괘씸죄에 걸려서 한 대기업이 몰락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국가 조찬기도회에 초청을 받아서 몇 번 참석했습니다. 초청을 수락하면 신원조회를 몇 달 전에 합니다. 그리고 모임에서는 메신저가 설교를 하고 음악 프로그램이 있고 대통령이 나와서 연설을 하고 음식을 나누고 대화를 하고 기도회를 갖습니다. 이런 모임에 참석하면 선물도 받습니다. 왕의 잔치에 초청을 받는 것은 특권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초청받는 것은 특권인데 그들은 잔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냉담했습니다.
밭으로 가지도 않고 사업차 가지도 않고 남은 자들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라도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 남은 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결혼 잔치에 초청한 왕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왕하고 무슨 원수질 일이 있었습니까? 왜 이러는 것입니까? 그들이 이렇게 초청을 거절하고 임금을 모욕한 이유는 결혼하는 사람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아들은 앞으로 그들을 다스릴 왕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아들이 싫은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이시고,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임금의 아들은 메시아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임금 되신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했고, 유대인들은 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갈망했는데, 정작 메시아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영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오셨지만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를 기대했는데 오신 메시야는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자기 의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은혜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들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자존심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데는 어떤 한계나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에로의 초청은 넓고 충분하고 제한이 없습니다.
왕은 자기 종들을 모욕하고 죽인 자들을 군대를 보내어 징계했습니다.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다시 할 일을 명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8,9).”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했습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종들은 네거리 길에 나가서 어중이 떠중이 만나는 대로 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초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데려다가 앉히는 일을 했습니다. 일단 가보자고 말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데리고 혼인 잔치에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가 수양회에 가자고 하면 처음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고 못 오는 사람, 연수 받는다고 못 오는 사람, 휴가를 받지 못해서 오지 못하는 사람,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득이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이런 경우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판단과 동작이 빨라야 합니다. 저는 어제 양을 섬기기 위해서 ‘울다가 웃으면’이라는 연극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무료 티켓이 있다고 해서 서둘러 갔는데 도착 시간이 10분 늦어서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저희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슬피 울며 돌아와야 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를 받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생명의 잔치, 말씀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할 수 있습니까? 잃은 자에 대한 상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강권해야 합니다. 씨름을 해야 합니다. 저도 일대일을 할 때 목자님이 얼마나 어거지를 부리던지 져주는 마음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공부해 보니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이디모데선교사는 수양회에 데려가려고 했는데 얼마나 꽁무니를 빼던지 미꾸라지 같이 이러빠지고 저리 빠졌습니다. 그런데 은행에 갔다가 한 사모님을 만나고 사모님이 그의 목자님을 불러서 벌떼 작전으로 수양회에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되어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양들에 대한 상한 심정으로 아프리카 양들을 사랑하며 돌보고 있습니다. 그때 그가 수양회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금도 불탄 건물에 들어가서 “나는 누구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를 억지로라도 수양회에 데려가신 분들이 너무너무 고마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 초청해야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일대일 하는 양들, 계절 학기를 듣는 학생들, 친척들 중에 대학생들, 옛날 양들, 관계가 멀어진 양들, 선교사의 자녀들도 초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홀이 가득한 가운데 여름수양회 말씀 잔치, 생명의 잔치를 치루기를 기도합니다. 왕이 종들을 거듭거듭 보내어서 사람들을 초청한 것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십니다. 그들이 오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고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들이 왕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수양회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형제들과 멀어진 관계가 가까워집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치고 피곤한 육신과 심령이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해서 왕이 선물한 예복 즉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날아갈 듯이 기쁩니다. 그들에게는 만물이 새롭게 보입니다.
셋째, 우리가 입어야 할 의의 예복(11-14) :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임금은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물었습니다. 고대에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이 예복은 왕이 혼인 예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인 예식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모욕하는 행위였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자기가 입은 옷이 더 좋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유롭게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예식에 참석하면 되지 무엇을 그렇게 형식을 따지느냐면서 앉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평소에 입던 옷이 조금 때가 묻었지만 편하고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을 축하하기 위해서 잔치에 온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물음에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예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이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무자격자라고 선언했습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잔치도 즐기지 못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말합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옷입니다.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먼저는 여름 수양회 말씀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요, 천국의 그림자인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고,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구원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혀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과 같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자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참석하고 성경도 읽고 찬양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사람이 의의 예복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분별하시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몸은 잔치에 와 있지만 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 강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서 다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산다면 의의 예복을 입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의의 예복을 입었는지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 은혜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껍데기 신자입니다.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체험하지 않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헌신한다면 외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일시적일 것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천국 공동체를 이룬 우리는 진정한 제자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은 말씀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선한 행실로 옷 입어야 합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각자가 행한 의의 분량만큼 구원과 상급을 얻고 이방인과 죄인들은 결코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방인과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생활, 선한 생활을 하는 동기와 목적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사함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19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복음을 전합시다.
오늘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었지만 어떤 이들은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초대에는 응했으나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복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선택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들 자신의 거절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습니다. 아들은 우리의 어떤 죄든지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새롭게 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천사들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뻐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은혜는 그를 감쌀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 갈까 말까 고민하는 분들은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네거리 길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여름수양회에 초청하여 함께 잔치의 기쁨을 누립시다.
올해 우리는 센터 건축이라는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일생에 한 두 번 할 수 있는 큰일입니다. 일년 중에서 가장 큰일은 여름 수양회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큰일입니다. 구원받은 한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그 한 사람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지 기대가 됩니다. 한 사람을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일만큼 큰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와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1-4) :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임금은 혼인 잔치를 위해서 마음을 들여서 준비를 했습니다. 초청된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이는 그 잔치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풍성하고도 온전한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도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복음 안에는 인간의 영혼의 궁핍함을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배고픔을 채워주고, 영적인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요6:47-58),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수로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요4:14). 하나님의 평화, 용서, 이 세상에서 산 소망, 다시 올 세상에서의 영광 등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의 초청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그의 의로 옷을 입히십니다. 세상 것과 다른 그 나라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마지막 날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복음은 배고픈 자에게 양식을, 슬픈 자에게 기쁨을, 쫓겨난 자에게 쉼터를, 잃은 자들에게 사랑하는 친구를 주십니다. 이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세상에 많은 잔치 즉 백일잔치, 돌잔치, 칠순잔치 등 생일잔치, 승진 축하 잔치, 출판 기념 잔치, 집들이 등 많은 잔치가 있지만 혼인 잔치는 잔치 중에서도 가장 풍성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가장 성대한 잔치입니다. 은혜와 행복이 넘치는 잔치입니다. 왕은 그 나라에서 진기한 음식을 다 준비할 것입니다. 불고기, 갈비찜, 오리훈제, 양상추 참치샐러드, 모듬 참치, 육회, 송이버섯요리, 바닷가재 요리, 수삼냉채, 왕새우찜, 꼬리수육, 삼합, 전복죽, 팥죽, 호박죽, 영덕대개, 영산포 홍어, 시루떡, 인절미, 백설기, 절편, 과일 냉채, 수정과, 파인애플 화채, 식혜 거기다가 동교센터가 낳은 요리사 곽앤나 사모님이 잘 하는 궁중 떡볶이 까지, 아주 진수성찬을 준비하였습니다. 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최고의 성악가들, 각 지방의 명창들도 초청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여름 수양회를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일곱 분의 말씀 강사님들이 풍성하고 은혜로운 생명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거기다가 새양들과 접촉점을 잘 만들기 위해서 영화설교를 합니다. 음악 팀에서 심금을 울리는 싱어롱과 특송과 경배와 찬양을, 박효진 장로님의 특강이 있고 정이삭 선교사님의 은혜롭고 감동적인 인생 소감 및 선교 보고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어린이 합창단의 합창이 있습니다. 좋은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들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따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말씀 잔치가 있고, 인형극도 있고 여름방학이 추억에 남도록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 딸은 이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는 참석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더 없이 좋은 영적 잔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준비를 했지만 사람들을 어떻게 여름 수양회에 초청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면 복음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면 그들과 기쁨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됩니다. 한 사모님은 양에게 한 학기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식사로 섬기고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말씀을 잘 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그가 이번 수양회에 가면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그가 수양회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한 자매님은 방학이라 집에 온 동생을 수양회에 초청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방학 동안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도록 돕고자 합니다.
둘째, 제한이 없는 복음 잔치로의 초청(5-10) : 임금은 혼인잔치에 ‘청한 사람들’을 어떻게 초청했습니까? 팔레스틴에서 연회를 배설하면 초대를 두 번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첫째 초대는 손님들의 참석 의향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 초대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3절에서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라고 한 것은 두 번째 초대를 가리킵니다. 이번에 초대를 받은 자들은 이미 첫 번째 초청을 수락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번째 초청을 받았을 때, 오기를 싫어했습니다(3). 그들은 다시 권함을 받았지만 이 역시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거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들은 자기 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에 중독이 되어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여 함께 기쁨을 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았다는 것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Pay no attention). 그들이 왕의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한지 그리고 교만한지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때는 대통령의 초청에 응하지 않아 괘씸죄에 걸려서 한 대기업이 몰락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국가 조찬기도회에 초청을 받아서 몇 번 참석했습니다. 초청을 수락하면 신원조회를 몇 달 전에 합니다. 그리고 모임에서는 메신저가 설교를 하고 음악 프로그램이 있고 대통령이 나와서 연설을 하고 음식을 나누고 대화를 하고 기도회를 갖습니다. 이런 모임에 참석하면 선물도 받습니다. 왕의 잔치에 초청을 받는 것은 특권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초청받는 것은 특권인데 그들은 잔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냉담했습니다.
밭으로 가지도 않고 사업차 가지도 않고 남은 자들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라도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 남은 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결혼 잔치에 초청한 왕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왕하고 무슨 원수질 일이 있었습니까? 왜 이러는 것입니까? 그들이 이렇게 초청을 거절하고 임금을 모욕한 이유는 결혼하는 사람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아들은 앞으로 그들을 다스릴 왕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아들이 싫은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이시고,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임금의 아들은 메시아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임금 되신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했고, 유대인들은 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갈망했는데, 정작 메시아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영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오셨지만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를 기대했는데 오신 메시야는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자기 의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은혜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들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자존심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데는 어떤 한계나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에로의 초청은 넓고 충분하고 제한이 없습니다.
왕은 자기 종들을 모욕하고 죽인 자들을 군대를 보내어 징계했습니다.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다시 할 일을 명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8,9).”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했습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종들은 네거리 길에 나가서 어중이 떠중이 만나는 대로 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초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데려다가 앉히는 일을 했습니다. 일단 가보자고 말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데리고 혼인 잔치에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가 수양회에 가자고 하면 처음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고 못 오는 사람, 연수 받는다고 못 오는 사람, 휴가를 받지 못해서 오지 못하는 사람,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득이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이런 경우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판단과 동작이 빨라야 합니다. 저는 어제 양을 섬기기 위해서 ‘울다가 웃으면’이라는 연극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무료 티켓이 있다고 해서 서둘러 갔는데 도착 시간이 10분 늦어서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저희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슬피 울며 돌아와야 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를 받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생명의 잔치, 말씀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할 수 있습니까? 잃은 자에 대한 상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강권해야 합니다. 씨름을 해야 합니다. 저도 일대일을 할 때 목자님이 얼마나 어거지를 부리던지 져주는 마음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공부해 보니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이디모데선교사는 수양회에 데려가려고 했는데 얼마나 꽁무니를 빼던지 미꾸라지 같이 이러빠지고 저리 빠졌습니다. 그런데 은행에 갔다가 한 사모님을 만나고 사모님이 그의 목자님을 불러서 벌떼 작전으로 수양회에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되어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양들에 대한 상한 심정으로 아프리카 양들을 사랑하며 돌보고 있습니다. 그때 그가 수양회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금도 불탄 건물에 들어가서 “나는 누구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를 억지로라도 수양회에 데려가신 분들이 너무너무 고마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 초청해야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일대일 하는 양들, 계절 학기를 듣는 학생들, 친척들 중에 대학생들, 옛날 양들, 관계가 멀어진 양들, 선교사의 자녀들도 초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홀이 가득한 가운데 여름수양회 말씀 잔치, 생명의 잔치를 치루기를 기도합니다. 왕이 종들을 거듭거듭 보내어서 사람들을 초청한 것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십니다. 그들이 오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고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들이 왕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수양회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형제들과 멀어진 관계가 가까워집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치고 피곤한 육신과 심령이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해서 왕이 선물한 예복 즉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날아갈 듯이 기쁩니다. 그들에게는 만물이 새롭게 보입니다.
셋째, 우리가 입어야 할 의의 예복(11-14) :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임금은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물었습니다. 고대에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이 예복은 왕이 혼인 예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인 예식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모욕하는 행위였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자기가 입은 옷이 더 좋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유롭게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예식에 참석하면 되지 무엇을 그렇게 형식을 따지느냐면서 앉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평소에 입던 옷이 조금 때가 묻었지만 편하고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을 축하하기 위해서 잔치에 온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물음에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예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이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무자격자라고 선언했습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잔치도 즐기지 못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말합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옷입니다.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먼저는 여름 수양회 말씀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요, 천국의 그림자인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고,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구원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혀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과 같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자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참석하고 성경도 읽고 찬양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사람이 의의 예복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분별하시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몸은 잔치에 와 있지만 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 강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서 다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산다면 의의 예복을 입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의의 예복을 입었는지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 은혜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껍데기 신자입니다.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체험하지 않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헌신한다면 외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일시적일 것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천국 공동체를 이룬 우리는 진정한 제자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은 말씀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선한 행실로 옷 입어야 합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각자가 행한 의의 분량만큼 구원과 상급을 얻고 이방인과 죄인들은 결코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방인과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생활, 선한 생활을 하는 동기와 목적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사함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19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복음을 전합시다.
오늘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었지만 어떤 이들은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초대에는 응했으나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복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선택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들 자신의 거절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습니다. 아들은 우리의 어떤 죄든지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새롭게 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천사들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뻐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은혜는 그를 감쌀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 갈까 말까 고민하는 분들은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네거리 길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여름수양회에 초청하여 함께 잔치의 기쁨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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