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09년 출19강(34:1-35)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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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출애굽기 공부 19강
말씀 출애굽기 34:1-35
요절 출애굽기 34:6,7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칸토리아 교단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독일 기독교 도시들에서 활동했던 그룹입니다. 종교개혁 이전만 하더라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배 시간 중에 악기의 사용을 금하고 오직 단성부의 음악을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후 루터가 회중찬송을 부활시키면서 독일에서는 ‘칸토라이(Kantorei)’라고 불리는 성가대가 설립됩니다. 오늘 중간 중간에 보게 될 영화 ‘신과 함께 가라’ 속의 칸토리아 교단은 이 즈음에 형성된 운동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1693년 교단이 파문당한 후 두 개의 수도원만이 남아있었는데 그들은 교황 우르반의 200번째 규범 소위 “성령은 소리이시며 찬양으로 신께 나아가라”는 규범을 좇아 노래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노래로 기도하는 네 명의 수도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와 출애굽기 34장 본문을 같이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는 사건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의 중보기도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통했기 때문에 이런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회복의 역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의지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S1 신과 함께 가라 002).
첫째, 자비하신 하나님(1-17) :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깨뜨린 처음 돌판에 있던 말을 하나님께서 그 판에 쓰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오르지 않았습니다. 양도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다듬어 올라가니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강조를 의미합니다.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도 자신을 여호와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모세를 사랑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변함이 없고 동일하십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하나님을 배신하지만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모세는 돌 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자비롭다는 말씀은 산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은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갖는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이 어떤 잘못을 해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식이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미는 무조건 자식 편을 들어 줍니다. 자식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면 보호 본능으로 그를 감싸 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진노하시지만 그의 본심은 깊은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맺으시는 것을 통해서 당신이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그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는 사랑과 진리로 균형을 이루십니다. 그는 완전하십니다. 그는 지혜로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와 허물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심으로 그의 사랑과 죄에 대한 심판의 엄위함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되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십니다. 그리고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십니다. 이것은 벌을 삼사 대까지 갚겠다는 것이 아니라 비교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자가 얼마나 많으신가를 상대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의 벌은 사랑에 비해서 0.3%에 불과합니다. 그는 우리가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해 주시는 왕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히10:17).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가 나를 기억하시도록 하려면 선을 많이 행해야 합니다. 그는 죄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기억할 것은 얼마나 많은 선을 행했는가, 얼마나 많이 섬겼는가, 어떻게 충성했는가를 기억할 것입니다.
모세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급히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이는 왕에게 은총을 입은 신하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엎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그는 간구합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9).” 모세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자신들이 존재할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임재 앞에 자신과 백성들의 악함과 음란과 교만과 고집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뻔뻔한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들이 죄악되지만 그 악과 죄를 사해 주시고 동행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그는 뻔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자신들은 망할 수 밖에 없고 소망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목이 뻣뻣한 백성들을 위해서 뻔뻔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믿음있는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언약을 맺으시되 이전보다 더 큰 이적을 베푸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10).”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전무후무한 기적을 베푸사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는 창일한 요단강을 말리우사 이스라엘이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 성을 손을 댐이 없이 함락시키시고, 태양이 머물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앞으로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큰데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그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배려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할 일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것을 삼가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게 하실 땅에서 원주민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과 언약을 세우게 되면 올무에 걸리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기브온 거민과 언약을 체결하였을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나안 거민 연합군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이스라엘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염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루면서 우상을 파괴함으로 이루어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다른 종교와 공존하면서 살고 있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국가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핍박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우상숭배의 위협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소비와 탐욕과 물질주의에 물든 경제가 우리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을 꿇도록 강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을 모두 가이사에게 드리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까지 가이사에게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김창룡 목사님은 절을 매입해 교회를 세워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당 위치를 물색하던 중, 현재 교회가 세워져 있는 절이 너무나 아름다워 교회부지로 확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절 인수에 들어갔습니다. 김목사는 매입과 함께 신당을 뜯어내고 십자가를 걸었습니다. 이 교회를 찾은 한 목사님은 “교회를 찾을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낀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이 교회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교회당이다. 기도도 절로 나온다. 찬송도 절로 나온다.”고 고백했습니다. 지친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절로 쉼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밥맛도 절로 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서 문화를 축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 죄를 축출하기 위해서 오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문화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면서 원튼 원치 않튼 이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이 문화를 어떻게 개혁해 나갈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이 쓰는 언어와 음악, 영화 그리고 관심사에 깊이 뿌리박힌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패배감과 운명주의, 두려움에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내 될 사람을 먹여 살릴 자신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심어야 합니다. 경쟁적인 문화, 상대적이고 물질적인 이 문화 속에 깊이 물들어 지치고 병든 지성인들을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울 것입니까? 우리가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대화를 할 때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잠시 화면을 보겠습니다. (S2 신과 함께 가라 004).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세계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미 가득 차 있는 세상 생각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형제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나서 세상으로 돌아갔고, 한 형제는 세상의 화려한 예배에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회복되는 방법은 없을까요? 하나님의 우려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우리는 이 점에서 매우 약합니다. 조금만 꼬투리가 생기면 마음을 빼앗기고 변질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격리되어 살 수 없습니다. 같은 문화라는 공기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적응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문화를 복음으로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대화를 하고 이해를 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 같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어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인자와 진실한 마음을 주셔서 이 시대를 잘 이해하고 젊은 청년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일년에 세 번 축제를(18-26) :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지키라고 하십니까? 먼저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무교절은 애굽에서 나온 해방절이요 광복절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로 지내다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때 자신들의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로 가축의 처음 난 모든 수컷으로 유월절 제사를 지내라고 하십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자신들을 축복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축복의 때에 하나님과 더욱 깊은 사랑의 관계,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합니다. 이때 집을 비우고 예루살렘으로 모이면 이방 나라들이 침입해 올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축제를 지킬 때 이방 나라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고 그 지경을 넓히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그 땅을 탐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여호와로 인한 축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율법도 의무도 중요하지만 기쁨과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공동체를 형성하고 믿음의 문화를 만들어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식탁 교제를 나누는 것도 축제의 일종입니다. 또한 봄 수양회, 여름 수양회, 가을 수양회, 겨울 학생 수양회를 통해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때로는 눈물도 나고 어려움도 있지만 이런 기쁨과 감사의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고통과 외로움, 슬픔을 시와 노래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시와 예술은 고통을 통해서 아름답게 창조됩니다. 아픔을 문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이면 공동체 의식이 생기고 할 일이 생기고 유대감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이런 축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잠시 화면을 보겠습니다. (S3 신과 함께 가라 005). 그들의 노래는 입만 벙긋하는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기도였습니다. 그들의 노래 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세상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 즐거워하고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정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모세의 얼굴이 빛남(27-34) :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가 불렀고 목이 시원했습니다. 그래서 40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성이 회복되었을 때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그는 기뻤습니다. 그는 또한 깊은 묵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집중했기 때문에 먹는 것 마시는 것도 초월해 버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영적 황홀경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여름 수양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을 맛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얼굴이 달덩이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그 증거판을 가지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데 그가 여호와 하나님과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 얼굴에 빛이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습니다. 본질은 표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 들에게 명령하고 그들과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을 전하고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말아야 합니다(고후3:13).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보아야 하고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진실하신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언약을 다시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그들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자 할 때 유혹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주님과 함께 가기를 기도합니다. 영화묵상을 하면서 마치겠습니다. (S4 신과 함께 가라 006).
말씀 출애굽기 34:1-35
요절 출애굽기 34:6,7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칸토리아 교단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독일 기독교 도시들에서 활동했던 그룹입니다. 종교개혁 이전만 하더라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배 시간 중에 악기의 사용을 금하고 오직 단성부의 음악을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후 루터가 회중찬송을 부활시키면서 독일에서는 ‘칸토라이(Kantorei)’라고 불리는 성가대가 설립됩니다. 오늘 중간 중간에 보게 될 영화 ‘신과 함께 가라’ 속의 칸토리아 교단은 이 즈음에 형성된 운동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1693년 교단이 파문당한 후 두 개의 수도원만이 남아있었는데 그들은 교황 우르반의 200번째 규범 소위 “성령은 소리이시며 찬양으로 신께 나아가라”는 규범을 좇아 노래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노래로 기도하는 네 명의 수도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와 출애굽기 34장 본문을 같이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는 사건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의 중보기도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통했기 때문에 이런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회복의 역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의지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S1 신과 함께 가라 002).
첫째, 자비하신 하나님(1-17) :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깨뜨린 처음 돌판에 있던 말을 하나님께서 그 판에 쓰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오르지 않았습니다. 양도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다듬어 올라가니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강조를 의미합니다.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도 자신을 여호와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모세를 사랑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변함이 없고 동일하십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하나님을 배신하지만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모세는 돌 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자비롭다는 말씀은 산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은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갖는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이 어떤 잘못을 해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식이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미는 무조건 자식 편을 들어 줍니다. 자식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면 보호 본능으로 그를 감싸 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진노하시지만 그의 본심은 깊은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맺으시는 것을 통해서 당신이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그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는 사랑과 진리로 균형을 이루십니다. 그는 완전하십니다. 그는 지혜로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와 허물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심으로 그의 사랑과 죄에 대한 심판의 엄위함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되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십니다. 그리고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십니다. 이것은 벌을 삼사 대까지 갚겠다는 것이 아니라 비교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자가 얼마나 많으신가를 상대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의 벌은 사랑에 비해서 0.3%에 불과합니다. 그는 우리가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해 주시는 왕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히10:17).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가 나를 기억하시도록 하려면 선을 많이 행해야 합니다. 그는 죄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기억할 것은 얼마나 많은 선을 행했는가, 얼마나 많이 섬겼는가, 어떻게 충성했는가를 기억할 것입니다.
모세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급히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이는 왕에게 은총을 입은 신하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엎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그는 간구합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9).” 모세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자신들이 존재할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임재 앞에 자신과 백성들의 악함과 음란과 교만과 고집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뻔뻔한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들이 죄악되지만 그 악과 죄를 사해 주시고 동행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그는 뻔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자신들은 망할 수 밖에 없고 소망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목이 뻣뻣한 백성들을 위해서 뻔뻔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믿음있는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언약을 맺으시되 이전보다 더 큰 이적을 베푸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10).”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전무후무한 기적을 베푸사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는 창일한 요단강을 말리우사 이스라엘이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 성을 손을 댐이 없이 함락시키시고, 태양이 머물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앞으로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큰데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그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배려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할 일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것을 삼가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게 하실 땅에서 원주민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과 언약을 세우게 되면 올무에 걸리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기브온 거민과 언약을 체결하였을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나안 거민 연합군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이스라엘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염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루면서 우상을 파괴함으로 이루어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다른 종교와 공존하면서 살고 있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국가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핍박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우상숭배의 위협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소비와 탐욕과 물질주의에 물든 경제가 우리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을 꿇도록 강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을 모두 가이사에게 드리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까지 가이사에게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김창룡 목사님은 절을 매입해 교회를 세워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당 위치를 물색하던 중, 현재 교회가 세워져 있는 절이 너무나 아름다워 교회부지로 확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절 인수에 들어갔습니다. 김목사는 매입과 함께 신당을 뜯어내고 십자가를 걸었습니다. 이 교회를 찾은 한 목사님은 “교회를 찾을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낀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이 교회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교회당이다. 기도도 절로 나온다. 찬송도 절로 나온다.”고 고백했습니다. 지친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절로 쉼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밥맛도 절로 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서 문화를 축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 죄를 축출하기 위해서 오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문화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면서 원튼 원치 않튼 이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이 문화를 어떻게 개혁해 나갈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이 쓰는 언어와 음악, 영화 그리고 관심사에 깊이 뿌리박힌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패배감과 운명주의, 두려움에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내 될 사람을 먹여 살릴 자신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심어야 합니다. 경쟁적인 문화, 상대적이고 물질적인 이 문화 속에 깊이 물들어 지치고 병든 지성인들을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울 것입니까? 우리가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대화를 할 때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잠시 화면을 보겠습니다. (S2 신과 함께 가라 004).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세계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미 가득 차 있는 세상 생각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형제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나서 세상으로 돌아갔고, 한 형제는 세상의 화려한 예배에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회복되는 방법은 없을까요? 하나님의 우려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우리는 이 점에서 매우 약합니다. 조금만 꼬투리가 생기면 마음을 빼앗기고 변질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격리되어 살 수 없습니다. 같은 문화라는 공기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적응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문화를 복음으로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대화를 하고 이해를 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 같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어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인자와 진실한 마음을 주셔서 이 시대를 잘 이해하고 젊은 청년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일년에 세 번 축제를(18-26) :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지키라고 하십니까? 먼저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무교절은 애굽에서 나온 해방절이요 광복절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로 지내다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때 자신들의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로 가축의 처음 난 모든 수컷으로 유월절 제사를 지내라고 하십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자신들을 축복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축복의 때에 하나님과 더욱 깊은 사랑의 관계,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합니다. 이때 집을 비우고 예루살렘으로 모이면 이방 나라들이 침입해 올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축제를 지킬 때 이방 나라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고 그 지경을 넓히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그 땅을 탐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여호와로 인한 축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율법도 의무도 중요하지만 기쁨과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공동체를 형성하고 믿음의 문화를 만들어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식탁 교제를 나누는 것도 축제의 일종입니다. 또한 봄 수양회, 여름 수양회, 가을 수양회, 겨울 학생 수양회를 통해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때로는 눈물도 나고 어려움도 있지만 이런 기쁨과 감사의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고통과 외로움, 슬픔을 시와 노래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시와 예술은 고통을 통해서 아름답게 창조됩니다. 아픔을 문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이면 공동체 의식이 생기고 할 일이 생기고 유대감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이런 축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잠시 화면을 보겠습니다. (S3 신과 함께 가라 005). 그들의 노래는 입만 벙긋하는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기도였습니다. 그들의 노래 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세상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 즐거워하고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정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모세의 얼굴이 빛남(27-34) :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가 불렀고 목이 시원했습니다. 그래서 40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성이 회복되었을 때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그는 기뻤습니다. 그는 또한 깊은 묵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집중했기 때문에 먹는 것 마시는 것도 초월해 버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영적 황홀경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여름 수양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을 맛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얼굴이 달덩이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그 증거판을 가지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데 그가 여호와 하나님과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 얼굴에 빛이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습니다. 본질은 표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 들에게 명령하고 그들과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을 전하고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말아야 합니다(고후3:13).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보아야 하고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진실하신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언약을 다시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그들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자 할 때 유혹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주님과 함께 가기를 기도합니다. 영화묵상을 하면서 마치겠습니다. (S4 신과 함께 가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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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회 다운로드 | DATE : 2009-06-28 10: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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