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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09년 계3강(2:12-29) 굳게 잡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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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032회 작성일 09-09-1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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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요한계시록 제 3 강                                                     
말씀 요한계시록 2:12 - 29
요절 요한계시록 2:25

굳게 잡으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우리는 오늘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타협하는 교회였고 두아디라 교회는 이중적인 교회, 부패한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교회들이 잘한 점과 책망 받아야 할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회개하여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버가모는 높은 곳이라는 뜻에 맞게 에게해에서 24km 내륙으로 들어온 곳에 해발 300m 이상의 고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버가모는 과거에 페르가문으로 불리웠습니다. 페르가문은 에우메네스 2세의 제위기간이었던 BC 197~160년 사이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 시기에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세워지는데 무려 20만권의 도서가 있었으며 이를 경계한 이집트에서는 페르가문에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피지를 발명하였습니다. 페르가문은 높은 문화수준을 구가하며 그 시대 최고의 도시로 불리었던 알렉산드리아에 비견되었습니다. BC 4세기에 세워진 아스클레피움은 당시 의과대학이었습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이곳에서  일하기도 하였고 해부학과 병리학의 창시자인 명의 갈렌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버가모의 병원은 로마 제국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할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있어 최고의 의학중심지였습니다. 로마시대에는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지고 황제숭배의 기치를 세워 기독교세력과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박해를 받으며 버가모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첫째, 타협하는 교회 :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았습니다. 이 검은 16절을 볼 때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히4:12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찌르는데 유용한 양날선 검입니다. 그는 버가모 교회의 타협하는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잘 한 점을 칭찬하십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 사탄의 권좌란 사탄의 본부를 말합니다. 당시 사탄은 황제숭배를 내세워 이 세상을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무력과 정치를 통해서 팍스로마나를 부르짖었고 그 안에서 평화와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들은 황제를 주요, 신으로 고백하고 경배하게 했습니다. 다른 지방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황제 숭배를 했는데 버가모에서는 매일 해야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도시의 구석에 서 모이고 있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요 유일한 주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핍박, 종교적인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그들은 죽는 것도 감수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어떤 성도들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발람의 가르침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타락한 선지자였습니다. 민수기 22-25장에 보면 모압 왕 발락은 자기 땅을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를 보고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을 접수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하도록 저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발락이 많은 돈을 제시하자 발람은 타협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여우같은 여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혹하도록 했습니다(민25; 31:16). 수많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우상 숭배를 하며 성적인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버가모에 있는 어떤 성도들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에 타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방향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 회개란 죄를 고백할 뿐만 아니라 죄를 끊는 것입니다.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무리 회개한다고 말을 해도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와 음행을 회개한다는 것은 우상 숭배를 그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황제숭배로 핍박을 받았다면 우리나라는 크리스천들이 조상숭배를 하지 않음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추석 명절과 신년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냅니다.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가 아닙니다. 유교의 문화에서 온 것입니다. 조선을 세운 집권자들이 자기들에게 충성을 하도록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조상숭배를 모든 사람들이 하도록 했습니다. 본래 제사는 황제에게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자기의 조상 중에서 업적이 있는 분을 기리겠다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일반 백성들도 제사를 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왕에게 충성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우리를 복주시고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찬양과 경배를 사람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신자들이 타협하는 마음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속히 가서 양날선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절에 보면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나리니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KJB)”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싸우면 파멸을 당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자는 회개한 자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주님께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십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을 가리킵니다. 회개하고 주님만을 경배하는 사람이 신령한 만나를 먹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흰 돌을 주시는데 이는 축제 때 입장을 위한 티켓 용 돌입니다.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도록 발부 받은 초청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여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부패한 교회 : 두아디아란 ‘두아의 성읍’이란 뜻입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의 신하였던 셀레우쿠스가 자기 딸의 이름을 따서 ‘두아’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으로서 군사적인 전략기지로서는 부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천연적인 요새나 골짜기,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를 위한 지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로마는 이곳에 강한 수비대를 두고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로 이 도시를 강화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두아디라는 전쟁이 있을 때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입장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시민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단결했습니다. 그것은 생업을 위해 직업 단위로 뭉쳐지고 결국 최초의 길드조직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주석으로 군인들의 필요를 만드는 산업이 번성하게 되고, 면직, 모직, 가죽, 빵 제조업, 노예 매매, 질그릇 등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각 길드가 형성되었습니다. 각 길드마다 수호신이 있어서 회원들은 자기가 가입한 길드의 신을 섬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길드는 계돈을 신전에 맡기고 신전에서는 잔치 형태를 띤 제의에 그들이 마음대로 참석하게 했습니다. 수호신의 제사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곧 여 사제인 창녀들과 음행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생업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와 행음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제의에 동참하는 것이 정당한가 부당한다 하는 것이 두아디라 교회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이 얼마나 날카로운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폐부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께 칭찬들을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를 위해 많은 사업을 벌였습니다. 사업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성도들이 돈을 벌다보니 길드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였고 형제들끼리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사업을 많이 하면 사업적으로 하기 쉬운데 그들의 동기는 사랑과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환란 가운데서 인내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업도 하나님의 일도 활발하게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버렸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더욱 열심히 주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잘 한 점이 있지만 책망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여자는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여자가 미인에다가 영적이기까지 하면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업을 위해 길드 조직에 참여하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하면서 죄의식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 여자가 주의 종들을 꾀어 그런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설득력있게 이교적 우상숭배가 복음을 손상하지 않는 문화적 요소가 있으므로 허용 가능하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여자는 자신이 선지자라고 함으로서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라고 강조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경제적 이익과 관련해서 성도들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기에 용이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가르침을 용납했습니다. 용납이란 남의 말이나 행동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편안하게 되려면 무엇인가를 용납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주님은 죄의 근원인 이 거짓 여선지자에게 강하게 도전하셨습니다. 이 거짓 선지자는 앞장서서 음행을 하였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과 부도덕을 회개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를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에게 징벌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병상에 눕게 하십니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십니다.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인다고 했는데 그 자녀들은 죄의 결과로 태어난 육신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음란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따랐던 그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징벌을 볼 때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죄는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십니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모든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죄와 싸우면서 힘들어 하는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무엇입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탄의 깊은 것이란 죄를 체험해 봄으로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든가, 자기들만이 아는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지식이 있다는 주장 등이었습니다. 두아디라에는 순수하고 우직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길드 조직 속에서 믿음의 중심을 지키는 삶 자체가 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우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길드에서 왕따를 당하고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붙잡습니다. 돈으로 성을 사고 돈으로 안전을 사고 돈으로 행복을 사고자 합니다. 그러나 돈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산다면 돈이 줄 수 없는 것까지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참된 사랑이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요, 신령한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1928년 황금의 목소리를 가진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대학 다니다가 중퇴를 하고 23살에 보험회사의 세일즈 사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방송 공개홀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이 미국 NBC 방송의 전속 가수로 데뷔하라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민했습니다. 이제 돈과 명예가 그에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섬기는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고민하며 어느 주일 아침 피아노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애송하던 시가 악보대 위에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바로 그 날 아침 그 자리에서 작곡을 했습니다. 그 노래가 우리가 오늘 부른 찬송가 102장입니다. 이 노래는 조오지 베베리 쉬에 의해서 작곡되고 그의 어머니 뤼 밀러 여사에 의해서 작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에 빌리 그래함 목사를 만나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그와 동역을 하였습니다. 그 후 이 찬송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으며, 그는 미국에서 존경받는 사역자 5인에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사상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말씀을 놓고 세상의 철학과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아니면 자기 생각을 붙잡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잡게 되면 회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내 생각이 나의 죄를 사해주지도 못합니다. 나의 생각이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인생 요절 한 말씀이라도 굳게 잡을 때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26-29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는 회개하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즉 심판의 권세를 주십니다. 그리고 새벽별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는 메시야의 통치에 함께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라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축복은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면서도 편안하게 생활하고자 하면 타협하게 됩니다. 타협이 지나치면 부패하게 됩니다. 이렇게 타협하고 부패한 신앙생활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타협하여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면 안 됩니다. 주일과 평일에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면 안 됩니다. 주님이 내게 지워주신 짐을 지고 가려면 예수님과 그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잡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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