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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09년 계1강(1:1-20) 지키는 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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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895회 작성일 09-09-0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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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요한계시록 1강
말씀 요한계시록 1:1 - 20
요절 요한계시록 1:3

지키는 자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우리는 칼빈이 65권의 성경에 대한 주석을 썼는데 요한계시록만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왜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중세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을 우민화했는데 그 결과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에 의구심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칼빈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책에 대한 주석을 굳이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사용함으로써 교회에서 이단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을 꺼려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분명히 이것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본문을 살피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다루고 계시며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끝이 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시작과 끝을 알아야 제대로 배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시작에 관해 쓴 창세기를 공부했고 이제 이 세상의 끝을 다루는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첫째, 읽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1-3) : 요한 계시록이라는 말은 사실 어패가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은 이미 요한복음에 충분히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예수님께 주셨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를 그는 받아서 전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추어진 어떤 신비가 아니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써졌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드러내셨습니다. 1-3장은 당시 교회에 주신 말씀이지만 4장부터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에 처해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한 역사가 아니라 성공한 역사, 잠시 있다가 사라질 역사가 아니라 영원한 역사에 부르심을 입었고 그 역사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주님과 복음 역사에 대한 열정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 복은 지고한 복을 말합니다. 팔복에 나타난 진정한 복입니다. 영원한 복입니다. 신령한 복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복을 받습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읽는 자”는 단수로 ‘한 사람’을 말합니다. 계시록 전체는 4.5m 정도의 하나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누구나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사본을 만드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회중의 대표자가 회중 앞에서 큰 소리로 읽습니다. 회중은 듣습니다.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은 희귀하고 고가이기 때문에 회당에 하나의 두루마리가 있어서 한 사람이 예배시간에 회중에게 큰 소리로 읽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성경을 읽는 자란 지금으로 말하면 가르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깨닫는 자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읽는 자라고 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읽기만 해도 복을 받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저부터 열심히 이 요한계시록을 포함해서 성경을 읽음으로 복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러면 계시록을 읽는 사람이 왜 복됩니까? 먼저 우리는 계시록을 읽음으로써 역사의 종말을 알게 됩니다. 이 역사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기 때문에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종말의 때를 사는 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에 대해서 담대한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시 119:97-100절에 보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우리의 원수는 사탄입니다. 계시록에는 사탄의 종말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종말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온갖 술책을 다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부지런히 읽고 가르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할 때 모든 것의 시작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공부함으로 모든 것의 끝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의 시작과 끝을 다 알아야 성경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죽음이 시작되었는데 요한계시록에는 죽음이 죽임을 당합니다. 죽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는 나라가 옵니다. 죽음의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위대한 생각들이 인류 역사를 바꾸어왔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새롭게 읽음으로 개인과 우리 모임과 세상의 역사를 바꾸는데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역사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윤회한다고 생각하면 허무한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돌고 도는 역사에 대해서 진보적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가 시작과 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성경을 가르칠 때 저는 기쁩니다. 우리가 세 명 이상의 양을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가운데 생명을 얻도록 돕고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고 지키는 사람도 복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게 되고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어 있게 됩니다.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음으로 깨어 종말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말씀이 주는 힘을 얻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 살아보고 나서 “아! 이렇게 살면 안 되었는데”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이 역사의 종말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으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그 나라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얻은 사람은 다 얻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욕심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분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욕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잘 보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도록 가르치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에서 무엇을 더하든지 빼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있습니다(22:18,19).

  진리의 말씀이 보존되도록 지키고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임은 “대학생 성경 읽기 선교회”라고 칭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지키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도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대영제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많이 하였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사랑하였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두고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총명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되었습니다.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나라의 기초를 성경 위에 두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독일은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읽게 되고나서부터 위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늘 푸르고 열매가 풍성하게 됩니다. 가을 바람과 함께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여러분은 복됩니다. 우리가 이 가을에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가르치고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영화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4-20) : 사도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합니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일곱 이상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일곱만 택했을까요? 이 일곱 교회가 모든 교회를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곱 교회가 당시 교회의 전형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일곱 교회 중의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한 교회의 모습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인류 역사의 무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활동하시는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출 3:14).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일곱 영이란 성령의 완전성을 말하는데 이사야 11:2절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5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인류 구속 역사를 위해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셨습니다. 그는 지금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충성된 증인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한마디로 왕 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 삼직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4,5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읽는 사람들은 로마제국이냐 하나님 나라냐, 황제냐 주님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주님을 선택한 자들로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 중 왕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용기와 희망을 가져야 할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6). 6절에서 나라는 원어에는 왕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제사장들이지만 동시에 다스리고 정복할 왕들입니다. 성도들이 왕 노릇 할 수 있는 때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이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도들이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아래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는 그들의 정체성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 맘몬 신의 핍박 가운데에서 구원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을 찬양 드립니다. 우리는 상업적 물질주의에 굴복할 자들이 아니라 돈을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릴 왕들이요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나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중보기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쾌락과 안일에 빠지거나 어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왕으로서 다스리고 정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초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초림 때에는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에는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실 때에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볼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여기서 찌른 자들은 그들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때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임할 심판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통곡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말씀의 시작과 끝이십니다. 그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그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십니다. 그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심판이 있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 집니다. 악은 멸망하고 선이 승리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칭찬을 받지만 자기 꾀로 산 사람은 심판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대로 모든 것이 공정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때로 불법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억울함과 불공정함과 불공평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꾸준히 투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센터 건축을 하는 동안에 법대로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민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사를 해서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적으로 볼 때는 옳지 않지만 민원 사항은 민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구청의 관리들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양보를 구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원만하게 건축이 진행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때로 손해도 보아야 합니다. 더 큰 선을 위해서 말이 안 되지만 참고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보다 위에 있는 것이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민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이런 모든 일들에 대해서 심판하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무조건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삶의 동기와 목적이 선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성경 선생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성경을 가르치고 생명을 살리는 삶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면서 고난을 당한 사람의 예를 사도 요한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언하였다는 죄목으로 밧모 섬에 유배를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제자도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인으로 살고자 할 때 환란을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환란을 당하는 세상에서 무력으로 원수들을 정복하시지 않고 심판의 때가 오기 전까지는 제자들의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도 환란을 당하고 고난을 받으심으로서 구속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인간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환란과 참음으로 확장됩니다. 레닌은 권력이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력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70년 만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과 평화를 통한 구원 역사는 느려 보이지만 확실하게 세상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겪어야 할 환난을 견디면서 꾸준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무섭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밧모 섬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은 길이 16km 너비 9km의 섬으로서 정치범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대개 재산을 몰수하고 민권을 박탈하는 도서유배는 황제가 명하고, 재산과 인권박탈이 없는 도서유배는 지방 총독이 한다고 합니다. 요한은 비교적 관대한 유배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에게 닥친 환란은 쉽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외로웠을 것입니다. 어느 주일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죄수로 살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거의 90이 넘도록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를 했지만 그에게는 고난을 참으며 사는 것이 순교적인 삶이었습니다. 그에게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 주시고 기록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명인은 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일생동안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특히 전 세계 캠퍼스에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은 것은 큰 복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 없어서 방황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일에 매몰되어 피곤하게 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활력이 생깁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인생은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우리가 가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읽고 가르치는 가운데 길 잃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제자로 키우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요한에게 사명을 맡기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도 요한이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는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일급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교회들 가운데 거닐고 계셨습니다. 그는 위엄이 넘치는 높은 분의 옷차림을 하고 계셨습니다. 거룩하고 순수하시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발은 불순물이 제거된 금과 구리의 합금이 빛나는 것처럼 힘과 안정감이 있게 교회들을 정화하시기 위해서 교회들 사이에 움직이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는데 이는 능력과 권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손에 붙잡고 계십니다. 그의 용모는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죄인에게는 공포를, 신자에게는 확신을 주는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며 전지하시며 정의와 주권과 위엄과 사랑을 지닌 왕 중 왕이십니다. 주님의 그 권세와 영광은 세상의 모든 다른 왕들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그에게 비교할 수도 없이 초라했습니다.

  요한이 그 분을 보는 순간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자와 같이 되어 움직일 수 없고 생명력을 상실할 정도로 그분의 영광 앞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동시에 본 자는 죽은 자처럼 됩니다. 요한은 지상 생활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영광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그분의 품에 기대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지상의 예수님은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밧모 섬에서 본 그리스도의 모습은 공생애 때의 모습처럼 영광이 가려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영광이 그대로 다 드러난 모습입니다. 요한은 가림 없이 드러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 감히 서서 버틸 수 없습니다. 로마의 모든 황제들도 그분 앞에서는 엎드려 죽은 자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처럼 된 사도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고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죽음과 ‘음부(하데스)’를 열고 닫을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능력으로 그것들을 정복하셨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예수님께 달린 것입니다.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예수님의 빨간 피로 씻기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신자요 목자의 직분을 지켜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면서 우리의 신앙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고난도 없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조용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토하여 내 치고 싶은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깨닫고 회개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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