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년 요2강(2:12-25) 새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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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학기 요한복음 제 2강
말씀 요한복음 2:12 - 25
요절 요한복음 2:21
새 성전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곳입니다. 성전에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합니다. 이곳에서 서로 만나 교제하며 섬기는 일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말씀과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을 합니다. 성전은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삶을 살려면 이 중심이 얼마나 거룩하고 청결해야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이 더럽고 썩어갈 때 이를 척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6) :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건은 은혜와 진리를 나타낸 점에서 아주 대조적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전에 집을 깨끗하게 하는 전례가 있습니다. 집 안에 피어 있는 곰팡이를 제거하고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를 합니다. 그릇과 가재도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가 봄을 맞이하면서 집안 대청소를 하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 40일 동안 그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가 회개에 힘쓰고 자신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회복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 안에서 어떤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양과 소를 끌고 와야 하는 사람들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양이나 소를 끌고 오다가 상처가 나기도 하고 발이라도 부러지면 제물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입구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제사용 제물을 팔았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로 제물을 삼았습니다. 성전 세를 위해서 반 세겔을 내야 했는데 당시 세계적으로 통용되던 로마돈은 가이사의 흉상이 새겨져 있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기에 부정하다고 여겨 유대인의 화폐인 세겔로 환전을 해서 드렸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가졌던 마음과 취지는 얼마나 경건하고 좋습니까? 그런데 제물을 팔고 환전을 하는 가운데 경제적인 이득이 생기고 백만 명 이상이 모여드는 유월절은 대박을 터뜨리는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도 그로 인한 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에 장사꾼들과 결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아지트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보자 눈에서 불이 튀어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15-16). 예수님의 인자하시고 은혜로운 모습만 보던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겁도 없이 당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성전의 관행에 칼을 대신 것입니다. 유월절 축제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성전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간 것처럼 성전 뜰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는 물질적인 유익에 눈이 먼 그들이 드리는 무수한 제물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지만 성전 마당만 밟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차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그들의 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듣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꿈을 더 사랑한 것, 사람을 더 의지한 것도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난당하는 자들을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성전이 죄로 인해서 곪아터지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 위해서 성전에 온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거룩한 일에 대해서 경외심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소원을 잃어버리고 있던 믿음마저 흔들린다면 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을 감당하시는 면에서 은혜로우십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책망하시되 섬세하게 하셨습니다. 비둘기를 날려 버리지 않고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소나 양은 다시 잡아올 수 있지만 비둘기는 날려 버리면 잡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바꾸고자 하신 것이지 손해를 끼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아주 인격적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지자 아무도 항거하지 못한 채 성전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책망을 하면서 사람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지나친 의협심이 발동하여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도덕적으로 수치심을 안겨 주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사람의 인격도 소중하게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베이튼 루즈에서 북서쪽으로 가면 미국 최대의 흉악범 수용소가 있습니다. 3면이 미시시피 강으로 둘러싸인 이 교도소엔 5000여명의 재소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평균 형량은 80-90년이라고 합니다. 이 안에서는 삶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갑작스레 칼부림이나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재소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재소자들이 동료 죄수들의 손에 죽어갔습니다. 시신은 장례 절차도 없이 값싼 널빤지로 만든 관에 들어가 미시시피 강 제방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묻혔습니다. 이 지옥 같은 교도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95년 초 벌 카인이라는 교도소장이 부임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부임 첫날 한 일은 식당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저급한 음식을 만들던 주방장에게 음식의 질을 높이라고 지시했고 간수들에겐 죄수들에게 모욕과 욕설을 하지 말도록 명령했습니다. 또 재소자들에게 공부나 취미생활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도록 새로운 기회를 열어줬습니다. 무엇보다 재소자들을 감동시킨 것은 사망한 재소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장중한 장례의식을 치러준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로 인해서 교도소는 몰라보게 변화되어 교도소 내에서 1000여명의 수감자들이 예술가와 신문편집인 가수 등으로 거듭나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언론들은 “어둠과 저주가 지배하던 이 교도소가 재활의 기운과 평안이 숨 쉬는 장소로 탈바꿈했다”고 칭송했고 전미 교도소들의 벤치마킹 코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인격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 목적이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어떻게 상처가 없이 행동을 바꿀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영 육간에 어린 사람들은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목표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의 행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를 말해주면 사람들은 얼른 조심하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던 사람도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면 바로 사려 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집을 지을 때 가졌던 비전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사귐의 공간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아서 이 집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집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는 영혼의 병원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한 삶을 연습하는 훈련장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을 하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곳은 전도하는 곳이요 선교하는 곳입니다. 센터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잘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성전 되신 예수님(17-22) : 예수님의 행동을 본 제자들은 무엇을 기억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기 때문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그는 구경꾼이 아니었습니다.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후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죽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순교로 나타난 것입니다. 순교는 남을 해치지 않고 대신 본인이 고통을 겪는 것이고, 남을 죽이지 않고 대신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진정한 순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척결하는 사건을 보고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따지고 들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 한마디로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격이 있으면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는데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며 놀랐습니다. 그들은 헤롯 성전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21).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 모슬렘의 손에 들어가 2000년 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 성전을 탈환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성전을 이방인에게 내어주셨을까요? 예수님을 통한 구속 역사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가 있고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 뚜껑이 시은소입니다. 거기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어린 양의 피를 뿌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뿌리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대제사장은 그의 죄로 인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이것도 쓰셔서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죄로 인한 각종 질병들이 치료가 됩니다.
그리고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 위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제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소에는 진설병과 촛대와 분향 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전에서 하던 모든 일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고 기도를 했는데 그 성전의 기능이 예수님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이제는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몸 된 성전이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길선주 장로는 일제 치하에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간수들이 그를 때릴 때마다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습니다. 간수들이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 자신의 몸에는 예수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어디를 누르든지 누르면 “예수”가 튀어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구석구석이 예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인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로마서 12: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곧 예배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졌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이제는 교회를 통해서 행하십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할 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능력을 덧입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당이 모래와 시멘트로 만들어졌던지, 벽돌로 만들어졌든지, 돌로 만들어졌든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배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선물로 받고 질병을 치유 받으며 귀신을 물리치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사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감격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봉사하고 전도하며 찬양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가정 교회는 엄연한 교회입니다.
셋째, 사람에게 자기를 의탁하지 않으신 예수님(23-25)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특히 병들고 약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창녀, 세리, 죄인,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제자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들을 믿지 않으셨고 그들을 향한 기대도 갖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추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정을 느끼고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지 않을 때 그 사랑이 곧 질투, 미움, 분노로 변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을 헌신적으로 키웁니다. 그러다가 자식이 잘못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내게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섭섭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부부 관계, 인간 관계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배신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인간은 상황이 변하면 두 얼굴을 갖게 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해하신 인간의 성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을 깊이 이해하신 후 사랑의 손길을 뻗치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그저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고 섬기기시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때 진정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성전이 되심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새 성전이 되십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삭의 삶을 통해서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습니다(창26:28).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2:12 - 25
요절 요한복음 2:21
새 성전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곳입니다. 성전에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합니다. 이곳에서 서로 만나 교제하며 섬기는 일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말씀과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을 합니다. 성전은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삶을 살려면 이 중심이 얼마나 거룩하고 청결해야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이 더럽고 썩어갈 때 이를 척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6) :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건은 은혜와 진리를 나타낸 점에서 아주 대조적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전에 집을 깨끗하게 하는 전례가 있습니다. 집 안에 피어 있는 곰팡이를 제거하고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를 합니다. 그릇과 가재도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가 봄을 맞이하면서 집안 대청소를 하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 40일 동안 그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가 회개에 힘쓰고 자신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회복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 안에서 어떤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양과 소를 끌고 와야 하는 사람들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양이나 소를 끌고 오다가 상처가 나기도 하고 발이라도 부러지면 제물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입구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제사용 제물을 팔았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로 제물을 삼았습니다. 성전 세를 위해서 반 세겔을 내야 했는데 당시 세계적으로 통용되던 로마돈은 가이사의 흉상이 새겨져 있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기에 부정하다고 여겨 유대인의 화폐인 세겔로 환전을 해서 드렸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가졌던 마음과 취지는 얼마나 경건하고 좋습니까? 그런데 제물을 팔고 환전을 하는 가운데 경제적인 이득이 생기고 백만 명 이상이 모여드는 유월절은 대박을 터뜨리는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도 그로 인한 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에 장사꾼들과 결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아지트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보자 눈에서 불이 튀어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15-16). 예수님의 인자하시고 은혜로운 모습만 보던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겁도 없이 당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성전의 관행에 칼을 대신 것입니다. 유월절 축제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성전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간 것처럼 성전 뜰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는 물질적인 유익에 눈이 먼 그들이 드리는 무수한 제물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지만 성전 마당만 밟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차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그들의 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듣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꿈을 더 사랑한 것, 사람을 더 의지한 것도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난당하는 자들을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성전이 죄로 인해서 곪아터지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 위해서 성전에 온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거룩한 일에 대해서 경외심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소원을 잃어버리고 있던 믿음마저 흔들린다면 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을 감당하시는 면에서 은혜로우십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책망하시되 섬세하게 하셨습니다. 비둘기를 날려 버리지 않고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소나 양은 다시 잡아올 수 있지만 비둘기는 날려 버리면 잡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바꾸고자 하신 것이지 손해를 끼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아주 인격적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지자 아무도 항거하지 못한 채 성전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책망을 하면서 사람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지나친 의협심이 발동하여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도덕적으로 수치심을 안겨 주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사람의 인격도 소중하게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베이튼 루즈에서 북서쪽으로 가면 미국 최대의 흉악범 수용소가 있습니다. 3면이 미시시피 강으로 둘러싸인 이 교도소엔 5000여명의 재소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평균 형량은 80-90년이라고 합니다. 이 안에서는 삶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갑작스레 칼부림이나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재소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재소자들이 동료 죄수들의 손에 죽어갔습니다. 시신은 장례 절차도 없이 값싼 널빤지로 만든 관에 들어가 미시시피 강 제방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묻혔습니다. 이 지옥 같은 교도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95년 초 벌 카인이라는 교도소장이 부임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부임 첫날 한 일은 식당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저급한 음식을 만들던 주방장에게 음식의 질을 높이라고 지시했고 간수들에겐 죄수들에게 모욕과 욕설을 하지 말도록 명령했습니다. 또 재소자들에게 공부나 취미생활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도록 새로운 기회를 열어줬습니다. 무엇보다 재소자들을 감동시킨 것은 사망한 재소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장중한 장례의식을 치러준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로 인해서 교도소는 몰라보게 변화되어 교도소 내에서 1000여명의 수감자들이 예술가와 신문편집인 가수 등으로 거듭나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언론들은 “어둠과 저주가 지배하던 이 교도소가 재활의 기운과 평안이 숨 쉬는 장소로 탈바꿈했다”고 칭송했고 전미 교도소들의 벤치마킹 코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인격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 목적이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어떻게 상처가 없이 행동을 바꿀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영 육간에 어린 사람들은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목표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의 행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를 말해주면 사람들은 얼른 조심하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던 사람도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면 바로 사려 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집을 지을 때 가졌던 비전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사귐의 공간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아서 이 집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집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는 영혼의 병원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한 삶을 연습하는 훈련장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을 하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곳은 전도하는 곳이요 선교하는 곳입니다. 센터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잘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성전 되신 예수님(17-22) : 예수님의 행동을 본 제자들은 무엇을 기억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기 때문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그는 구경꾼이 아니었습니다.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후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죽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순교로 나타난 것입니다. 순교는 남을 해치지 않고 대신 본인이 고통을 겪는 것이고, 남을 죽이지 않고 대신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진정한 순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척결하는 사건을 보고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따지고 들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 한마디로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격이 있으면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는데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며 놀랐습니다. 그들은 헤롯 성전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21).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 모슬렘의 손에 들어가 2000년 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 성전을 탈환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성전을 이방인에게 내어주셨을까요? 예수님을 통한 구속 역사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가 있고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 뚜껑이 시은소입니다. 거기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어린 양의 피를 뿌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뿌리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대제사장은 그의 죄로 인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이것도 쓰셔서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죄로 인한 각종 질병들이 치료가 됩니다.
그리고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 위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제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소에는 진설병과 촛대와 분향 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전에서 하던 모든 일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고 기도를 했는데 그 성전의 기능이 예수님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이제는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몸 된 성전이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길선주 장로는 일제 치하에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간수들이 그를 때릴 때마다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습니다. 간수들이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 자신의 몸에는 예수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어디를 누르든지 누르면 “예수”가 튀어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구석구석이 예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인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로마서 12: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곧 예배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졌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이제는 교회를 통해서 행하십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할 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능력을 덧입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당이 모래와 시멘트로 만들어졌던지, 벽돌로 만들어졌든지, 돌로 만들어졌든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배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선물로 받고 질병을 치유 받으며 귀신을 물리치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사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감격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봉사하고 전도하며 찬양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가정 교회는 엄연한 교회입니다.
셋째, 사람에게 자기를 의탁하지 않으신 예수님(23-25)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특히 병들고 약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창녀, 세리, 죄인,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제자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들을 믿지 않으셨고 그들을 향한 기대도 갖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추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정을 느끼고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지 않을 때 그 사랑이 곧 질투, 미움, 분노로 변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을 헌신적으로 키웁니다. 그러다가 자식이 잘못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내게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섭섭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부부 관계, 인간 관계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배신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인간은 상황이 변하면 두 얼굴을 갖게 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해하신 인간의 성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을 깊이 이해하신 후 사랑의 손길을 뻗치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그저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고 섬기기시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때 진정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성전이 되심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새 성전이 되십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삭의 삶을 통해서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습니다(창26:28).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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