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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요1강(1:1-18) 육신이 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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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646회 작성일 10-03-14 14:49

본문

2010년 봄 학기 제 1강
말씀; 요한복음 1:1 - 18
요절; 요한복음 1:14

육신이 되신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새 봄이 되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을 공부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성육신의 진리를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창세기 1장을 생각나게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복음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창세기의 태초는 영원의 한 시점을 뜻하고 요한복음은 영원을 의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제 2위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1-3절에 말씀대신에 예수님을 넣어서 읽어보겠습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님이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면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자신을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또 말씀은 능력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십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납니다(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헬라어의 로고스와 히브리어의 다바르에서 나온 것입니다. 로고스는 ‘합리적 생각과 그 생각의 외적 표현인 말’을 뜻합니다. 로고스는 계시의 수단이었습니다.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 또는 일로 번역됩니다. 다바르는 지적인 측면과 역동적인 측면을 지닙니다. 지적인 측면에서 다바르는 어떤 사물의 의미가 드러남으로써 그 사물의 본성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역동적인 측면에서 다바르는 그 힘이 말씀을 듣는 자에 의해서 느껴지든, 아니면 이 말씀이 역사 속에서 지니는 효력으로 존재하든 말씀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적 측면과 창조적 측면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즉 말씀이란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권능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뜻은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가 부단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공동체의 원형은 하나님이십니다. 가족과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일치와 연합의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자녀들을 섬길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남편이 생각이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생각 속에서 다양함이 나오고 풍성함이 나옵니다. 가정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질서와 연합과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겠습니다.

  또한 “말씀이 계시니라”는 뜻은 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인격성,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분이십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이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1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중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말씀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도 그가 없이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나의 인생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어야 창조의 역사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창조 역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예수님이 근원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부여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에 접붙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됩니다. 요한일서 5:11-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5-26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부활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은 자라나고 번식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은 일시적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은 무의미, 허무,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의 불완전성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생명은 완전한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대학 1학년 때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온 이후로 저는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와 건조함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생 예수님을 전하는 목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새 봄에 생명이 약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요한복음 말씀 공부와 함께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이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빛은 어두움과 대조됩니다. 어둠의 세력은 실체입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을 가로막는 죽음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어둠의 세력 아래 신음하며 부단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죄악된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 빛은 쉼 없이 비추고 있습니다. 이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빛은 어둠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어둠은 빛을 죽이지 못하지만 빛은 어둠을 죽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저주받은 존재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빛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어두운 생각을 죽이고, 자신은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음을 믿고 살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이 빛이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비추일 때 올바른 정신과 은혜로운 말과 복의 근원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빛이 비추일 때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이 생깁니다. 이 빛은 우리에게 찬란한 비전을 주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런데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고 했습니다.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둠이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명의 근원이요 수여자이신 그리스도가 왔지만 깨닫지 못하자 증거자가 왔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9-13).” 우리는 이 말씀을 니고데모를 통해서 잘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납니다. 위로부터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진리에 대해서는 3장에서 깊이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은 이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심을 포기하시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도덕적으로 연약하고 부패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한계와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죄가 없는 완벽한 몸이셨습니다. 물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피곤하시고, 갈증을 느끼시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시고, 분노도 하시고, 갈등하시고, 수난과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맛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곳에 찾아 오사 함께 하십니다. 나의 외로움에 동참하십니다. 나를 잘 아십니다. 그는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십니다. 그는 말로만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주십니다. 그의 사랑은 실제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또는 갈등을 할 때 이 땅에서 사셨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은 장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하시면서 그의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형제와 함께 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형제자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거짓으로 꾸밀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목자 생활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형제자매에게 관심이 있었으나 점차 관심이 줄어들어 결국에는 지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 받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고유한 가치와 가능성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자매와 함께 하려면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즉 형제자매의 아픔이나 기쁨을 정서적이고 지적으로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자발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제자매의 입장에서 갖는 느낌, 형제자매와 함께 갖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형제자매의 기쁨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의사소통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방적이고 자신의 약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위험을 감수하려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려면 위험을 감수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저 없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순간순간 상대방의 감정과 고뇌를 나의 것으로 동일시 할 때 함께 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하려면 잘 경청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19절에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경청하는 것도 머리로 듣는 단계, 마음으로 듣는 단계, 그가 정말 말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까지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문제가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문제를 다른 사람과 나누다 보면 자기 문제가 정리되고 또 그 문제를 객관화시킬 수 있고 해결책이 보입니다. 형제가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은 형제를 이해하는 첫 걸음입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이 있을 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내서 함께 대화를 하고 영화도 보고, 산책도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여행을 한다면 더욱 좋습니다. 우리가 가정 교회를 이루면서 함께 삶을 나누는 일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14b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등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가 죄사함을 선포하시고 눈 먼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며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면서그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역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서 저와 여러분에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불신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눈가림으로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악에 대해서 선으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나누어 줌으로 이기심과 각종 죄로 인해서 황폐된 죄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섬겨야 할 것입니다. 사탄은 핍박과 환란으로 성도들을 공격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풍요 속에서 안일하게 만들고 세속화되게 함으로서 타락시켰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예수님의 성육신의 진리를 배워서 안일과 세속의 누룩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새 센터를 건축하고 들어와 살지만 예수님의 성육신의 진리를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또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더욱 감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풍요 속에서 불평하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의 삶은 이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고갈되지 않습니다. 샘솟듯 솟아납니다.

  우리는 올 한 해 연요절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을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가정 교회 모임을 이루고 삶을 나누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우리가 부단히 성육신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애쓰는 가운데 조금이나마 구원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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