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히브리서 특강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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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히브리서 특강 제2강
약속을 믿는 믿음
말씀 : 히브리서 11:8-22
요절 : 히브리서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우리는 지난주에 믿음은 실상이요 분명한 증거가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본문 말씀은 믿음의 실제적인 예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특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는지 깊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 보면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의 3분의 1이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3분의 1도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무려 309번이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다음으로 많이 나옵니다. 물론 이름이 많이 나온다고 그것과 꼭 믿음이 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만큼 믿음의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의 위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떤 점에서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첫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다같이 8절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창세기 1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75세의 늙은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학생시절에 집을 떠나서 장막에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은데, 75세의 할아버지가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이방 땅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까? 사람들은 다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이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 부분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로 가든지, 군대를 가든지, 이사를 가든지간에 최소한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모르고 나아갔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보내시는 하나님도 전혀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어떻게 순종하여 나아갈 수 있었습니까? 본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입니까?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직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고 나아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출발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고, 성숙한 믿음의 종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 출발이 대단하고 엄청난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한마디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굳게 믿고, 단순하게 순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도 축복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은 “네가 하나님이 명하신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에덴의 모든 축복을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랑하셔서 주신 축복된 계명의 말씀이자.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음성을 듣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아브라함은 모든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나이도 많고, 환경도 열악하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고,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아담과 아브라함. 똑같이 아자 돌림인데 어떻게 그렇게 그 믿음에서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조건과 환경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에덴동산과 같이 좋은 조건 가운데 살아도 말씀을 붙들지 않고 자기고집과 자기 욕심을 앞세우며 사는 사람은 믿음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처럼 만가지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며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까지 지속되었습니까? 다같이 11절을 읽어봅시다. “믿음으로 사라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각각 100세와 90세로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잉태하는 힘을 얻어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약속을 주신 때나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나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은 동일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습니다. 분명히 외적 조건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더 쇠약해졌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가능성이 완전히 제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19-21절은 그들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과 아내 사라의 몸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지만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라도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에 부엌에서 ‘호호호 하나님이 나를 웃기시네’ 하며 웃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면 얼른 앞치마로 입을 틀어막고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악화되면 얼마나 믿음이 쉽게 약해지고, 의심하고, 불평하기를 잘합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에 더욱더 견고해졌습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말씀 앞에서 누가 ‘나는 절망적이야. 나는 체질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어. 내게는 아무 희망도 없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 자학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어차피 죽을 것인데... 하나님 안에서 잉태할 힘을 얻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내가 반복해서 실패하고 절망적일수록 이런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새롭게 잉태할 힘을 얻으십시오. 지금은 별로 싹이 보이질 않을지라도 나로 하여금 밤하늘의 뭇별과 또 해변의 모래와 같이 생육하게 하사 나를 웃게 하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때가 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매를 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쉽게 구겨지고 찢어지는 한 장의 종이와 같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처럼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면 낡고 쓸모없게 된 헌종이처럼 보입니다. 이런 종이를 구기고 찢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그 종이를 한번 벽에 딱 붙여 보십시오. 풀을 발라서 벽에 붙여 놓고 종이를 구기거나 찢으려고 해 보십시오.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이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종이 뒤에 붙어 있는 그 강하고 단단한 벽 때문에 종이를 구길 수도, 찢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종이 한 장처럼 한없이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하고 든든한 벽과 같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벽돌처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그 누구보다 연약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죽은 자와 같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에, 우리는 벽에 붙은 종이와 같이 담대할 수 있습니다. 견고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믿음의 능력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ale고 순종하여 나아가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놀라운 축복들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찬송가 344장 가사처럼 눈에는 아무증거 보이지 아니하고 귀에는 아무소리 들리지 않을지라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약속위에 굳게 서서 나아갈 때 능치 못할 일이 없을 줄을 믿습니다. 저희가 자기의 형편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므로 새로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약된 땅도, 예약된 집도, 준비된 방 한 칸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방 땅에서 장막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는 외국인과 나그네취급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배신감이 들기 쉬웠겠습니까? 15절에서는 그가 만약에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이방 땅에 거하며 자녀들과 함께 장막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소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 당대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을지라도 장차 먼 후대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소망을 간직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3절에서 아브라함의 약속에 대한 자세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지만 그 약속은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손해의식이 들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하나님께 대해 ‘믿음으로 살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신 것입니까?’ 하고 데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습니다. 여기서 환영하는 것은 ‘야~’하고 환성을 지르며 환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속을 믿었으나 그것에 조급하거나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먼 훗날, 먼 후대에 이루어질 소망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지금 이곳에서 힘들게 장막생활을 하고, 이방인같이 산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만 합니까? 조상이니까?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라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개척의 기초를 놓느라고 이 수고를 해야만 하는가?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왜 2세로서 이 길을 가야만 하는가? 내가 선택한 길도 아닌데---. 내가 왜 제자양성의 십자가를 감당해야만 하는가? 나 한 사람도 감당하기 힘들어 죽겠는데---. 우리가 만약에 우리 당대에, 그리고 이 땅에서 모든 약속을 다 성취하고 모든 축복을 다 누리고자 한다면 결코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떠나온 본향을 향해 뒤돌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뒤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큰 민족의 비전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나라에 예비 되어 있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상급을 의미합니다. 내 당대에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내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은 현재 이곳에서 장막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16a절에서는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다가도 쉽게 넘어지고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축복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내 당대에 모든 축복이 다 이루어지기 원하는 자기중심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꽃은 역사가 지난 후에 피어나고 그 열매는 하나님 나라에서 최종적으로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6b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가장 큰 축복은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아들 이삭 하나만 낳고 장막생활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그의 하나님 되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실 때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재벌 회장들의 집은 수천평, 수만평에 별의 별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기껏해야 4-50년 이상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는 재벌 회장들의 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영원히 왕노릇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째째하게 현실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나그네와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우리를 ‘거룩한 나그네’라고 했습니다.(벧전1:1) 우리가 먼 후대를 바라보는 역사적인 믿음이 있을 때에 좀 고생이 될지라도 내 당대에 기꺼이 희생하는 삶, 장막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가 현재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사는가?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희가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믿음,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배워서 이 땅에서 나그네철학을 가지고,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후손들도 이 땅에서 나그네철학을 가지고 살도록 아브라함과 같이 위대한 믿음의 유산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산지 25년 만에, 100세에 비로소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도하고 구하였던 아들이었습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의 보물 1호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 없는 삶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이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참으로 영접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삭이 저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아시잖아요? 25년을 뜸을 드려서 주시더니 이제 아들재미를 좀 보고 알콩달콩 살아보려고 하는데, 그 아들을 바치라니 말이 됩니까?”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아들 이삭이를 데리고 야밤 도주를 해서 본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오는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의 손에 매달려 폴짝폴짝 뛸 때도 아브라함은 그 이삭이의 재롱을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멈출만도 한데 그러지도 않습니다. 번제단을 쌓고 그 위에 아들 이삭의 손과 발을 묶어 올려놓고 칼을 번쩍 들 때까지 아브라함의 마음과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온전한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다같이 18,19절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만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당장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죽은 이삭을 다시 살려서라도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해서 이 시험을 생각했을 때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는 부활의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지난 40년간의 믿음의 훈련을 최종 통과하였습니다. 마지막 믿음의 졸업시험에서 당당히 A+를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을 때 자기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가? 정말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시려고 하시는 것일까?’ 이러한 하나님 편에서의 생각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삭보다 하나님 자체를 믿고 신뢰하는 것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자체를 믿고 의지할 때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상황이 진행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혀 다르게 흘러갈 때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이때 필요한 것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 자체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자체를 믿고 의지할 때 눈에 보이는 현실이 어떠하든지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약속을 믿는 믿음의 끝은 하나님 자체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삭을 바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 사건사건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넷째, 이삭, 야곱, 요셉의 축복하는 믿음.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믿음은 믿음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고 축복하는 믿음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축복의 물줄기를 조금도 손상 없이 야곱과 에서에게 잘 계승하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믿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파란 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에 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열 두 아들과 두 손자를 믿음으로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의 마지막 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였음을 말해줍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와서 93년 동안 애굽에 살고, 87년 동안 애굽에서 존경받는 총리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임종시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출애굽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날이 오면 자기의 뼈를 파다가 약속의 땅에 묻으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영화보다 믿음의 반열에 서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 역사의 미래를 내다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리 힘든 가운데서도 약속의 말씀을 놓지 않고 본향을 사모하며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축복하사 하늘의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은 후손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도성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의 이름을 인류역사상 가장 존귀케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서 믿음의 비밀과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의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
말씀 : 히브리서 11:8-22
요절 : 히브리서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우리는 지난주에 믿음은 실상이요 분명한 증거가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본문 말씀은 믿음의 실제적인 예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특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는지 깊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 보면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의 3분의 1이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3분의 1도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무려 309번이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다음으로 많이 나옵니다. 물론 이름이 많이 나온다고 그것과 꼭 믿음이 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만큼 믿음의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의 위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떤 점에서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첫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다같이 8절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창세기 1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75세의 늙은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학생시절에 집을 떠나서 장막에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은데, 75세의 할아버지가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이방 땅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까? 사람들은 다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이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 부분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로 가든지, 군대를 가든지, 이사를 가든지간에 최소한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모르고 나아갔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보내시는 하나님도 전혀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어떻게 순종하여 나아갈 수 있었습니까? 본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입니까?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직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고 나아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출발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고, 성숙한 믿음의 종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 출발이 대단하고 엄청난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한마디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굳게 믿고, 단순하게 순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도 축복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은 “네가 하나님이 명하신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에덴의 모든 축복을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랑하셔서 주신 축복된 계명의 말씀이자.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음성을 듣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아브라함은 모든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나이도 많고, 환경도 열악하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고,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아담과 아브라함. 똑같이 아자 돌림인데 어떻게 그렇게 그 믿음에서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조건과 환경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에덴동산과 같이 좋은 조건 가운데 살아도 말씀을 붙들지 않고 자기고집과 자기 욕심을 앞세우며 사는 사람은 믿음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처럼 만가지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며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까지 지속되었습니까? 다같이 11절을 읽어봅시다. “믿음으로 사라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각각 100세와 90세로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잉태하는 힘을 얻어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약속을 주신 때나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나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은 동일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습니다. 분명히 외적 조건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더 쇠약해졌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가능성이 완전히 제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19-21절은 그들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과 아내 사라의 몸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지만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라도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에 부엌에서 ‘호호호 하나님이 나를 웃기시네’ 하며 웃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면 얼른 앞치마로 입을 틀어막고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악화되면 얼마나 믿음이 쉽게 약해지고, 의심하고, 불평하기를 잘합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에 더욱더 견고해졌습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말씀 앞에서 누가 ‘나는 절망적이야. 나는 체질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어. 내게는 아무 희망도 없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 자학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어차피 죽을 것인데... 하나님 안에서 잉태할 힘을 얻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내가 반복해서 실패하고 절망적일수록 이런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새롭게 잉태할 힘을 얻으십시오. 지금은 별로 싹이 보이질 않을지라도 나로 하여금 밤하늘의 뭇별과 또 해변의 모래와 같이 생육하게 하사 나를 웃게 하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때가 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매를 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쉽게 구겨지고 찢어지는 한 장의 종이와 같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처럼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면 낡고 쓸모없게 된 헌종이처럼 보입니다. 이런 종이를 구기고 찢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그 종이를 한번 벽에 딱 붙여 보십시오. 풀을 발라서 벽에 붙여 놓고 종이를 구기거나 찢으려고 해 보십시오.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이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종이 뒤에 붙어 있는 그 강하고 단단한 벽 때문에 종이를 구길 수도, 찢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종이 한 장처럼 한없이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하고 든든한 벽과 같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벽돌처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그 누구보다 연약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죽은 자와 같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에, 우리는 벽에 붙은 종이와 같이 담대할 수 있습니다. 견고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믿음의 능력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ale고 순종하여 나아가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놀라운 축복들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찬송가 344장 가사처럼 눈에는 아무증거 보이지 아니하고 귀에는 아무소리 들리지 않을지라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약속위에 굳게 서서 나아갈 때 능치 못할 일이 없을 줄을 믿습니다. 저희가 자기의 형편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므로 새로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약된 땅도, 예약된 집도, 준비된 방 한 칸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방 땅에서 장막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는 외국인과 나그네취급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배신감이 들기 쉬웠겠습니까? 15절에서는 그가 만약에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이방 땅에 거하며 자녀들과 함께 장막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소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 당대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을지라도 장차 먼 후대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소망을 간직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3절에서 아브라함의 약속에 대한 자세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지만 그 약속은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손해의식이 들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하나님께 대해 ‘믿음으로 살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신 것입니까?’ 하고 데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습니다. 여기서 환영하는 것은 ‘야~’하고 환성을 지르며 환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속을 믿었으나 그것에 조급하거나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먼 훗날, 먼 후대에 이루어질 소망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지금 이곳에서 힘들게 장막생활을 하고, 이방인같이 산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만 합니까? 조상이니까?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라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개척의 기초를 놓느라고 이 수고를 해야만 하는가?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왜 2세로서 이 길을 가야만 하는가? 내가 선택한 길도 아닌데---. 내가 왜 제자양성의 십자가를 감당해야만 하는가? 나 한 사람도 감당하기 힘들어 죽겠는데---. 우리가 만약에 우리 당대에, 그리고 이 땅에서 모든 약속을 다 성취하고 모든 축복을 다 누리고자 한다면 결코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떠나온 본향을 향해 뒤돌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뒤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큰 민족의 비전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나라에 예비 되어 있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상급을 의미합니다. 내 당대에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내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은 현재 이곳에서 장막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16a절에서는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다가도 쉽게 넘어지고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축복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내 당대에 모든 축복이 다 이루어지기 원하는 자기중심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꽃은 역사가 지난 후에 피어나고 그 열매는 하나님 나라에서 최종적으로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6b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가장 큰 축복은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아들 이삭 하나만 낳고 장막생활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그의 하나님 되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실 때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재벌 회장들의 집은 수천평, 수만평에 별의 별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기껏해야 4-50년 이상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는 재벌 회장들의 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영원히 왕노릇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째째하게 현실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나그네와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우리를 ‘거룩한 나그네’라고 했습니다.(벧전1:1) 우리가 먼 후대를 바라보는 역사적인 믿음이 있을 때에 좀 고생이 될지라도 내 당대에 기꺼이 희생하는 삶, 장막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가 현재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사는가?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희가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믿음,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배워서 이 땅에서 나그네철학을 가지고,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후손들도 이 땅에서 나그네철학을 가지고 살도록 아브라함과 같이 위대한 믿음의 유산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산지 25년 만에, 100세에 비로소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도하고 구하였던 아들이었습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의 보물 1호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 없는 삶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이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참으로 영접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삭이 저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아시잖아요? 25년을 뜸을 드려서 주시더니 이제 아들재미를 좀 보고 알콩달콩 살아보려고 하는데, 그 아들을 바치라니 말이 됩니까?”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아들 이삭이를 데리고 야밤 도주를 해서 본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오는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의 손에 매달려 폴짝폴짝 뛸 때도 아브라함은 그 이삭이의 재롱을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멈출만도 한데 그러지도 않습니다. 번제단을 쌓고 그 위에 아들 이삭의 손과 발을 묶어 올려놓고 칼을 번쩍 들 때까지 아브라함의 마음과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온전한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다같이 18,19절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만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당장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죽은 이삭을 다시 살려서라도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해서 이 시험을 생각했을 때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는 부활의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지난 40년간의 믿음의 훈련을 최종 통과하였습니다. 마지막 믿음의 졸업시험에서 당당히 A+를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을 때 자기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가? 정말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시려고 하시는 것일까?’ 이러한 하나님 편에서의 생각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삭보다 하나님 자체를 믿고 신뢰하는 것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자체를 믿고 의지할 때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상황이 진행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혀 다르게 흘러갈 때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이때 필요한 것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 자체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자체를 믿고 의지할 때 눈에 보이는 현실이 어떠하든지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약속을 믿는 믿음의 끝은 하나님 자체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삭을 바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 사건사건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넷째, 이삭, 야곱, 요셉의 축복하는 믿음.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믿음은 믿음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고 축복하는 믿음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축복의 물줄기를 조금도 손상 없이 야곱과 에서에게 잘 계승하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믿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파란 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에 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열 두 아들과 두 손자를 믿음으로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의 마지막 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였음을 말해줍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와서 93년 동안 애굽에 살고, 87년 동안 애굽에서 존경받는 총리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임종시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출애굽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날이 오면 자기의 뼈를 파다가 약속의 땅에 묻으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영화보다 믿음의 반열에 서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 역사의 미래를 내다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리 힘든 가운데서도 약속의 말씀을 놓지 않고 본향을 사모하며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축복하사 하늘의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은 후손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도성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의 이름을 인류역사상 가장 존귀케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서 믿음의 비밀과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의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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