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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10 믿음 특강 제 1 강 (히 11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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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2,003회 작성일 10-01-1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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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믿음 특강 제 1강
요절 히브리서 11:6
믿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우리는 새해 들어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0년 새해를 향한 여러분들의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준비하며 새해를 계획하고 방향을 잡아야할 이 시점에 우리가 히브리서 특강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듣게 된 것은 매우 시기적절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3주간에 걸쳐 배우고자하는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새해에 어떠한 계획, 어떠한 방향을 잡았던지,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기대하던 그것에 기초가 되어야 하는 “믿음”에 관하여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11장은 믿음에 대한 정의와 기초, 그리고 선진들의 믿음과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믿음의 증거를 보여 주셨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의 첫 번째 강의로서 믿음의 정의와 기초, 그리고 아벨의 믿음, 에녹의 믿음, 노아의 믿음에 대해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의 정의와 기초(1-3)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씀을 통해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바라는 것이요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이 말씀 또한 믿음의 대상은 바라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금 읽은 1절 말씀에서는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한 가지를 더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믿는 대상이 허상이나 환상이나 몽상이 아니라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대상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희망사항들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바랄만한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신임을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의 믿음을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태양이 광명체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태양이 신임을 믿는 사람의 믿음은 “실상”이 아닌 “허상”인 것입니다. 태양신은 그의 신념 가운데 존재하는 “몽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허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믿음을 우리는 “미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우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실상입니까? 허상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하나님은 “실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고 또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실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그 증거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1절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을 실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보지 못한 하나님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얻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의 증거들은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또한 믿음으로 그 증거를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불리웁니다. 또한 “신앙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영국 역사를 빛낸 인물들이 안장되어 있는데 히브리서11장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빛낸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다른 시대,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보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인정을 받고 보상을 받습니까? 모터분야에서 세계일등을 하는 일본전산이란 회사는 유별난 채용시험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회사는 공채시험에 설익고 딱딱한 밥과 마른 오징어, 멸치 등의 반찬을 점심식사로 제공하고는 밥을 빨리 먹고 나오는 순서대로 직원을 채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밥을 10분내 먹지 못한 응시자들은 모두 낙방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시험을 본 이유는 밥을 빨리 먹는 사람은 대부분 결단력도 빠르고, 동작도 빠르고, 일하는 속도도 빠를 뿐만 아니라 위가 튼튼해서 기본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는 사장의 지론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고이사무엘 선교사님도 밥을 많이 먹고 빨리 먹는 분들을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사장님과 비슷한 지론을 갖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세상에서는 밥을 잘 빨리 먹던지, 일을 잘하던지 무엇이든 잘하고 성과를 내는 사람들이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아무래 증언을 해도 그는 내가 그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고 하던 분입니다. 그는 부활의 증거를 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찾아오셔서 그의 소원대로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라 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있는 자를 기뻐하시며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네,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볼까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좌우로) 제가 여담으로 한 말씀하면 일본전산의 공채 첫해 시험문제가 큰 목소리로 말하기였다고 합니다. 이는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수했을 때 반성도 빠르고 진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장의 지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요한 목자님도 앞으로 회사 직원 뽑으실 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함께 큰 목소리로 이렇게 3번을 외쳐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믿음의 사람이 되자.” (3번)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근본적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 창조신앙에서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창조적인 흥미진진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탐험할 수 있고 또한 자연법칙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신앙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창조신앙은 신앙의 뿌리와도 같습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건강한 신앙생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더욱 견고하며 깊어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 믿음의 증거(4-7)

첫째. 아벨의 믿음(4) 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여 낙원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척박한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에게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장성하여 가인은 농부가 되고 아벨은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자세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죄로 인해 낙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양을 친다고 장막생활하며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하고 힘든 삶으로 인해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낙원에 다시 돌아가게 될 소망을 바라보며 목자로서 양떼를 돌보는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양의 새끼를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는 양의 첫 새끼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 의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이 제사문제로 인해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에 대한 시기심과 살인하고자 하는 죄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하나님은 가인에게 제물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그의 마음에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행해야할 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그때 그는 분노와 시기심에 종이 되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흉악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나은 제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감사의 제사요 참회의 제사요 또한 찬미의 제사입니다. 비록 내가 선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척박한 땅일지라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예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으로 나아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기뻐 받으십니다. 새해에는 우리도 더 나은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주일예배도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드리지 않고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준비하여 드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벨의 죽음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허망해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은 당신을 기쁘게 한 그를 그토록 허망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왜 가인을 좀 더 분명하게 돕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볼 때 비극적인 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시며 영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벨의 죽음이 남긴 메시지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살아 있습니다. 말씀 속에 살아 있고 그의 믿음을 배우는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삶보다 죽음이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짐 엘리어트 선교사는 미국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많은 미국교회들이 유능하고 설교를 잘하는 그를 청빙하기 위해 경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생을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1955년 9월 29살의 엘리어트는 선교동역자 다섯명과 함께 가장 호전적인 에콰도르에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1주일도 채 못되어 그들은 몸에 화살이 꽂힌 채로 시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짐 엘리어트, 그에게는 이미 결혼한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사랑하는 아내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어트의 아내와 그의 동역자인 네이트 세인트의 여동생 라헬 세인트와 아버지가 순교할 때 5살 밖에 되지 않았던 네이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 등이 그들의 믿음을 뒤따랐고 그 결과 그들이 죽은 지 37년 만에 그들을 죽인 부족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 부족 가운데 75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경번역 봉헌 예배를 드리는 감격적인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다섯 명의 선교사를 자기 손으로 죽인 자들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죽음이 삶보다 더 강한 무언의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에녹의 믿음(5-6)  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아벨이 죽은 후 아담과 하와 사이에 셋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역사를 셋의 후손을 통해 이어가셨습니다. 에녹은 셋의 육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65세 되던 해에 첫째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는 ‘창을 던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을 던짐 같이 세상을 심판 가운데 두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창5:22-24) 하나님은 에녹을 죽기 전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림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마지막 나팔소리에 우리도 다 홀연히 변화하여 들림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들림을 우리는 ‘휴거’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죽지 않고 들림은 받은 또 다른 사례는 선지자 엘리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불병거를 보내셔서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얼마나 특별한 은혜입니까?

에녹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하나님은 그를 죽기도 전에 이렇게 급히 데려가신 것입니다. 유다서를 보면 에녹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유14,15) 에녹이 살던 시대 사람들은 불경건하고 무척이나 광포하였습니다. 라멕과 같은 사람은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사람을 쳐죽이고 도리어 이를 자랑하기까지 하였습니다.(창4:23) 이런 그들은 그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에녹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로인해 에녹은 날마다 죽을 것 같은 고난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에녹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기록하고 있습니까?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5:22) 그는 삼백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이 죽기 전에 들림을 받은 것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원하시며 우리와 동행하길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To walk with God")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To be in fellowship with God"), 하나님과 보조를 맞는 것(("Keep in step with God")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To make friend with God")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노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5-6) 예수님도 제자들과 동행하길 원하셨고 어떠한 비밀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첫째로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문제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곁에 계시며 나의 앉고 섬을 아시며 나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평소 문제가 없을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다가 문제가 생길 때만 나아가기 쉽습니다. 문제를 들고 나아가서 문제의 해답만을 찾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답을 찾고자 나아오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 즉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어찌하든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을 먹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주 한편의 소감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거룩한 습관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과 양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그는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실 때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환란 속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그의 가장 큰 소원은 다른 무엇이 아닌 그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릅니다. 우리도 올 한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므로 에녹과 같이, 다윗과 같이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노아의 믿음(7)  창세기 6:5-6을 보면 노아의 시대는 죄악으로 가득하여 사람들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고 근심하시면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일을 한탄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노아의 시대는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도 큰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시대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창세기6:9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토록 소망이 없던 시대에 노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의로운 삶을 살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심판에 대해 말씀해 주셨고 그를 위하여 방주를 짓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방주를 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어야할 방주는 추구경기장보다 더 큰 규모의 배였습니다. 이렇게 큰 방주를 지으려면 일생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노아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그가 이처럼 큰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의심할 수도 있었던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노아는 비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홍수가 오기 전에 이 땅의 모든 물은 하나님이 지면의 샘을 터뜨려서 주셨기 때문입니다.(창2:5-6). 그래서 그들은 무지개를 본 적도 없었습니다. 둘째로 노아는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배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하더라도 그 배를 어떻게 물가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모든 동물을 모으고 돌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불평하거나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이 말씀대로 다 준행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셨고 그 결과 그와 그의 가족들만이 구원을 받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노아를 통해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의무나 두려움, 또는 강요에 의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가 받은 말씀은 노아에게 충분히 이해되거나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여 행하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노아의 사랑과 신뢰가 컸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도 때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너무나 힘들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할 때도 있고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은 영적인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아를 통해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시편을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25:14) 우리도 올해 노아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들을 온전히 이루어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친밀함을 나타내어 주시며 그의 언약을 보게 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기초는 창조신앙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벨과 에녹과 노아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그의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통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도 믿음의 선진들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자식에서 자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믿음의 증거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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