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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강 2010년 신년 1강(롬1:8-32)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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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038회 작성일 10-01-03 11:36

본문

2010년 신년말씀 제 1 강
말씀 로마서 1:8 - 32
요절 로마서 1:16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경인년 새 해가 밝았습니다. 호랑이와 같이 힘차게 전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로마 선교를 꿈꾸는 사도 바울의 분명한 믿음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로마 선교를 어떤 방법론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능력을 믿고 나가고자 합니다. 이 시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깊이 영접하는 가운데 새 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노름으로 재산을 날리고 부인과 자식들에게 폭행을 일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런 사람이 교회를 다녀봤자 달라질 게 있겠어”하며 회의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무어라 가르치시던가?” “착하게 살라고 하기도 하고 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어….” 친구가 또 물었습니다. “그럼 성경은 누가 썼다던가?” “글세…, 잘 모르겠는걸.” 친구가 다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그의 대답은 모두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교회에 다니면서 자네가 배운 것이 뭔가?” 그러자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달라진 것이 있다네. 전에는 술이 없으면 못 살았는데 요즘은 술 생각이 별로 나질 않아. 그리고 전에는 퇴근만 하면 노름방에 달려갔는데 지금은 집에 빨리 가고 싶고, 전에는 애들이 나만 보면 슬슬 피했는데 지금은 나랑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기다린다네. 그리고 아내도 전에는 내가 퇴근해서 집에 가면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내가 퇴근할 무렵이면 대문 앞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린다네.” 이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로마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개척되지 않고 자생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쾌락 문화가 판치고 인본주의 헬라 문화가 지배하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로마 사회에서 믿음으로 살기가 쉽지 않은데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들이 자생적으로 믿음 생활을 시작한 것도 기특한데 그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타락한 로마 제국 속에서 성도들의 경건하고 헌신적이며 거룩한 삶이 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로마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 세우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기도에 로마 성도들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의 마음에 로마 성도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로마 성도들이 그의 마음에 가득 했습니다. 그는 로마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했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서, 학문을 하기 위해서, 관광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목적으로 나아가고자 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싶었습니다. 신령한 은사는 15절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을 볼 때 복음 사역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성도들은 이미 복음을 들어 알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나눌 때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 질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함으로 얻게 되는 유익이 무엇일까요?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로마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믿음이 견고해 짐으로 위로를 받고 사도 바울은 힘든 가운데서도 승리한 로마 성도들을 보면서 믿음의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대 사도이기 때문에 믿음의 위로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양들의 믿음을 통해서도 위로를 받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피차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큰 힘을 얻게 됩니다. 또한 믿음을 나눌 때 서로 간에 사랑의 관계성도 깊어집니다. 우리 모임에도 이렇게 서로 믿음을 나누는 가운데 피차 안위함을 받는 역사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피차 믿음의 위로를 주고받을 때 견고한 성령의 그릇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결국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근본 동기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피차 믿음의 위로를 얻고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고 싶었습니다. 열매 맺는 삶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강렬하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열매를 맺고자 하는 내적인 동기는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들에게 무슨 빚을 졌습니까? 사실 바울은 이들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빚을 진 적이 없습니다. 그가 진 빚은 복음의 빚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채무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구원하시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특히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거룩한 부담감을 갖게 합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빚진 자의 심정은 바울을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복음의 일꾼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원하시고 한국과 세계 캠퍼스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처음 얼마 동안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배타적이고 귀를 막아 버리면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더구나 오래 동안 사랑과 인내로 섬겼는데 불평하고 떠나가는 양들을 보면 빚진 자의 심정이 아니라 채권자의 심정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러나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목자님들의 속을 많이 상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라도 빚진 자의 심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빚진 자의 심정으로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고 피차 믿음의 안위를 누리며 열매 맺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복음에 대한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당시 복음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져 지성인들에게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식민지에 살던 청년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데 그를 구주로 믿고 전한다는 것이 꺼림직했습니다. 로마 성도들 가운데는 복음을 믿으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복음을 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는 사실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로마는 당시에 세계적인 군사력, 경제력, 철학, 화려한 문명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그런 것들은 복음과 족히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렇게 자랑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란 뜻입니다. 그 소식의 핵심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한다는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롭게 살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성철 스님이었습니다. 그는 일생 고행을 하며 살았는데, 고행은 육체의 욕망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련과정입니다. 결혼 직후 처자식을 남겨 두고 출가합니다. 정을 끊는 것이지요. 그 후에는 어머니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만나주질 않습니다. 심지어 돌을 던져 어머니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10년 동안, 암자에 철조망을 쳐놓아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그 속에서 홀로 지냅니다. 그 후에는 16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삽니다. 또 그 후에는 8년 동안, 한 자리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수양을 하는데 잘 때도 앉아서 잡니다. 한 번도 바닥에 눕지를 않은 것이죠. 그렇게 금욕하고, 절제하고, 도를 닦으며 결사정진 합니다. 이 정도 고행을 했으면 의인의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요? 산 속에서 철조망 치고 지냈는데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열반송이 이러합니다.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려 있다.” 자신의 죄가 너무나 많아 높이를 알 수 없는 전설의 산, 수미산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피를 토해야 한다고 합니다. 열반송을 보면서 ‘이분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깊었던 분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칩거하고, 16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8년 동안 눕지 않고 자기와 싸운 분이 이렇게 고백했다면, 이분 보다 덜 수련한 사람은 볼 것도 없을 것입니다. 감정대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범인들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까지는 깊은 자기 발견이 있어야합니다. 루터는 죄 가운데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고행하는 자신의 이기심 앞에 절망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청년의 정욕 앞에 절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1:18-3:19절까지는 인간이 처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8-23).” 여기서 죄의 뿌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감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21,22절을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하면 마음이 허무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허무해 지는 이유는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불신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열매가 없을 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지 의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버려진 자식과 같이 느껴집니다.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혼돈스럽습니다. 어리석은 판단을 내립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진전되면 감정적이 되고 정욕적이 됩니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리고 함부로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파괴된 모습을 우리는 일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병,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을 읽어보니 인간의 병든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면서 ‘성난 아이, 질투하는 아이, 의존적인 아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이, 의심 많은 아이, 잘난 체 하는 아이, 조급한 아이, 외로움에 시달리는 아이, 두 얼굴을 가진 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병든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였습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 편에서의 기여, 노력, 투쟁,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서 무언가를 얻는다고 이야기하는데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 외에 우리의 업적과 상관이 없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종교적인 교리는 없습니다. 성경은 자선, 깨달음, 명상, 지식 등등으로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도 악한 사람에게 공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공짜로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복음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오직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선물을 받을 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짜로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로 받는다면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감사해서 선물을 주면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선물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이 선물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보다 더 큰 희생을 통해서 주어진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고 이런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가 불쌍하기 때문에 구원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의 선물은 순수한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넓은 의미의 구원입니다. 성경에서 병이 낫는 것도 구원이라고 합니다. 악령에게서 벗어나는 것, 열등감에 빠져서 자기를 못났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로 귀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내면의 상처가 건드려지면 분노를 폭발하던 사람이 용서하고 평강을 유지하는 것, 경쟁심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닦달하던 사람이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 습관적으로 죄를 짓던 사람이 죄를 끊는 것, 무기력했던 사람이 가정을 꾸리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는 것, 허무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던 사람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사는 것, 어두움과 패배감에서 벗어나 빛과 희망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도 구원입니다. 사람에게 매이지 않는 것, 죄의식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무엇보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이 왜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씀했는데 그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현재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의가 지금도 계속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죄인을 무죄 방면해 주시는 의, 칭의를 말합니다. 복음에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의를 갖게 됩니다. 루터가 새롭게 깨닫게 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는 영적인 방황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로마서 3:21-22절은 말씀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로서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과 동의어처럼 사용됩니다. 시궁창 같은 인간의 처지로 내려와 불의한 죄인을 의로운 신분으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입니다.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절망 가운데, 어두움 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믿음으로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의지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손에 잡히는 것만 붙잡고 살아서도 안 됩니다. 느껴지는 것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10:17).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시고 죽은 영혼을 살리십니다.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사 그 말씀이 믿어지는 역사가 홀연히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시1:1).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삽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새해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영적인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열매들이 어떠할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의 복음 신앙이 더 깊어지고 자라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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