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송년메시지(요일1:1-10)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사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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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송년 메시지
말씀 요한일서 1:1-10
요절 요한일서 1:3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사귐
2009년 한 해를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센터 건축을 위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저는 한 해를 보내면서 목자님들의 헌신과 동역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한편 제가 드린 것은 많은 죄와 허물뿐 인 것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가 지은 죄도 다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떠나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 가쁜한 마음으로 경인년 한 해를 호랑이 같이 힘차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사귐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우리 서로 간의 사귐입니다. 이 사귐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 서로 간에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오늘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과 그리고 신자 상호간에 사귐을 갖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크리스천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합니다(1-4) : 당시에 사도 요한은 아주 늙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에 위협적인 요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이론은 플라톤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고 완전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은 악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을 부인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예수님의 임재가 크리스천들의 모임 속에 있다는 것을 조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도 의심했습니다. 계2:4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들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첫 사랑을 잃어버렸고 세상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은 사도 요한을 슬프게 했고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회복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에 나타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구유에 어린 아기로 오셨고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리고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열 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요한의 영혼을 터치하며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고 생명이 충만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고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눈물로 밤을 새운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현장을 지켜본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목이 메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40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마음에 있던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보았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보여졌고 만져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귐은 가능합니다. 사도 요한과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그와 함께 살았고 그를 만져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 뒤에 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선포는 경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 이야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8:20절은 말씀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 중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십니다. 저는 대학 일학년이 될 때까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경험도 없이 십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하나님이 있다면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분께 나의 모든 진심을 바쳐서 충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은 허무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서 요한계시록 3:20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아버지의 품에 안겼던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가정의 문제들로 인해서 저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한 아이, 무심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딱딱하고 무감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학 신입생 때에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영접한 이후로 아버지 문제가 풀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밤 하늘에 은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은하수를 보면서 이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영원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고 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저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양식으로 삼았으며 나를 아시며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보고 들을 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아는 것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큰 세계에서 그와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사귐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사귐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귐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사귐을 나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귐은 완전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함을 누리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질서가 있으면서도 평등하고 서로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원형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할 때 우리 사이에도 진리와 사랑으로 사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어 사람들의 영혼에 호소하여 그들의 영혼과 직접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함께 일하게 하고, 서로 존중하게 하고, 강력한 협동심을 이끌어냅니다. 저는 이런 수준으로 나아가는 사귐을 갖기를 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영적인 사귐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귐을 갖고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귐을 갖는 첫 번째 단계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사도 요한은 멀티미디어식으로 드러냈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도록 감동적으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만져본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생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요15:1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 대한 통찰이 생길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립니다. 아하! 그랬구나. 하는 깨달음이 올 때 기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은 기쁨이 충만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귐을 갖는 가운데 머리에서 발끝까지 기쁨이 충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서로 간에 이루어집니다(5-7) :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헬라 문화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개되고 이용 가능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지식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 비밀스러운 것은 엄격하게 제한된 멤버들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밀스러운 방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합니까? 사람들은 비밀스러운 방에서 부끄러운 짓을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두움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밀스러운 구역 속에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중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빛 가운데서 살고 때로는 어두움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실 때 모든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모를 때 우리의 마음은 어둡습니다. 또 죄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영지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알고 있는 사귐보다 더 높은 사귐을 자기네들이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불의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실되고 끊임없는 거룩함의 추구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자의 사귐은 비밀스럽고 이중적인 삶에서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빛 가운데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으로 나아오게 합니다. 벧전 2:9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모임에서 서로 만나지만 사귐은 거의 없습니다. 그 결과 어두움이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덮어버립니다. 여기서 어두움은 하나님 없는 혼돈스러운 삶을 말합니다. 사귐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서로 진실되어야 하고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고통과 마음 고생이 따릅니다.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귐의 그 순간은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통하여 옵니다. 우리가 사귐을 갖는다고 할 때 시시콜콜한 문제들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서로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씨름하는 문제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됩니다. 자아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이해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내면의 탐구를 깊이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처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들의 모든 숨겨진 갈등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숨겨진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환영하셨고 하나님의 말씀과 공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7절에서 가장 놀라운 약속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십시오. 우리는 숨겨진 갈등들로부터 열려진 빛 가운데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제가 됩니다. 죄의 무거운 짐들은 풀려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독소들은 제거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위해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삶에 효력을 끼칩니다. 죄의 모든 세력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순수하고 깨끗해집니다.
셋째, 진리 안에서 계속 새롭게 되는 우리의 사귐(8-10) : 우리가 서로 교제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빛 가운데 걸어야 합니다. 빛 가운데 걷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죄를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죄가 없다’는 말은 특정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죄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도 죄인이 아니라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프로이드 심리학을 통해서 서구에서 만연한 것입니다. 프로이드 심리학은 죄의식의 객관적인 근거를 부정합니다. 또한 이 말은 특정한 개인은 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죄를 가진 적이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죄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 속에는 진리가 그 속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살피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범한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수평적인 것은 성도 상호간의 사귐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죄를 고백하고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은 한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죄를 자백하고 새롭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의 몸이 병들었을 때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어떤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되면 할 수 있는 한 그냥 버티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언제 돌아왔습니까?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그는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돌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그가 돌아온 후에도 연회에 오기를 거절하는 형과 회복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죄책감을 가진 죄인들은 그 영혼에 죄의 무거운 짐을 느낍니다. 우리는 더럽고 구토가 남을 느낍니다. 우리는 내가 의롭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오래 간직하고 있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내 양심에 가책을 느낄 때 민감하게 회개하고 고백하십시오.
죄로부터의 자유는 아버지와 그 아들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은혜로우시고 항상 열려 있고 가까이 할 수 있는 구주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께 가까이 가도록 격려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잘 해결할 때 부족함과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과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주장은 자신이 지금 죄를 짓고 있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사람이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까지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눔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가족인 형제자매님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더욱 깊은 사귐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지난 한 해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깨끗하게 된 마음으로 새 해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일서 1:1-10
요절 요한일서 1:3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사귐
2009년 한 해를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센터 건축을 위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저는 한 해를 보내면서 목자님들의 헌신과 동역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한편 제가 드린 것은 많은 죄와 허물뿐 인 것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가 지은 죄도 다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떠나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 가쁜한 마음으로 경인년 한 해를 호랑이 같이 힘차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사귐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우리 서로 간의 사귐입니다. 이 사귐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 서로 간에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오늘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과 그리고 신자 상호간에 사귐을 갖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크리스천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합니다(1-4) : 당시에 사도 요한은 아주 늙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에 위협적인 요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이론은 플라톤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고 완전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은 악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을 부인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예수님의 임재가 크리스천들의 모임 속에 있다는 것을 조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도 의심했습니다. 계2:4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들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첫 사랑을 잃어버렸고 세상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은 사도 요한을 슬프게 했고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회복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에 나타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구유에 어린 아기로 오셨고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리고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열 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요한의 영혼을 터치하며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고 생명이 충만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고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눈물로 밤을 새운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현장을 지켜본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목이 메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40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마음에 있던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보았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보여졌고 만져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귐은 가능합니다. 사도 요한과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그와 함께 살았고 그를 만져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 뒤에 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선포는 경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 이야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8:20절은 말씀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 중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십니다. 저는 대학 일학년이 될 때까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경험도 없이 십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하나님이 있다면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분께 나의 모든 진심을 바쳐서 충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은 허무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서 요한계시록 3:20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아버지의 품에 안겼던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가정의 문제들로 인해서 저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한 아이, 무심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딱딱하고 무감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학 신입생 때에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영접한 이후로 아버지 문제가 풀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밤 하늘에 은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은하수를 보면서 이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영원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고 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저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양식으로 삼았으며 나를 아시며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보고 들을 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아는 것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큰 세계에서 그와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사귐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사귐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귐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사귐을 나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귐은 완전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함을 누리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질서가 있으면서도 평등하고 서로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원형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할 때 우리 사이에도 진리와 사랑으로 사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어 사람들의 영혼에 호소하여 그들의 영혼과 직접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함께 일하게 하고, 서로 존중하게 하고, 강력한 협동심을 이끌어냅니다. 저는 이런 수준으로 나아가는 사귐을 갖기를 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영적인 사귐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귐을 갖고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귐을 갖는 첫 번째 단계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사도 요한은 멀티미디어식으로 드러냈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도록 감동적으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만져본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생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요15:1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 대한 통찰이 생길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립니다. 아하! 그랬구나. 하는 깨달음이 올 때 기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은 기쁨이 충만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귐을 갖는 가운데 머리에서 발끝까지 기쁨이 충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서로 간에 이루어집니다(5-7) :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헬라 문화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개되고 이용 가능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지식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 비밀스러운 것은 엄격하게 제한된 멤버들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밀스러운 방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합니까? 사람들은 비밀스러운 방에서 부끄러운 짓을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두움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밀스러운 구역 속에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중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빛 가운데서 살고 때로는 어두움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실 때 모든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모를 때 우리의 마음은 어둡습니다. 또 죄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영지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알고 있는 사귐보다 더 높은 사귐을 자기네들이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불의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실되고 끊임없는 거룩함의 추구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자의 사귐은 비밀스럽고 이중적인 삶에서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빛 가운데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으로 나아오게 합니다. 벧전 2:9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모임에서 서로 만나지만 사귐은 거의 없습니다. 그 결과 어두움이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덮어버립니다. 여기서 어두움은 하나님 없는 혼돈스러운 삶을 말합니다. 사귐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서로 진실되어야 하고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고통과 마음 고생이 따릅니다.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귐의 그 순간은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통하여 옵니다. 우리가 사귐을 갖는다고 할 때 시시콜콜한 문제들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서로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씨름하는 문제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됩니다. 자아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이해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내면의 탐구를 깊이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처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들의 모든 숨겨진 갈등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숨겨진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환영하셨고 하나님의 말씀과 공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7절에서 가장 놀라운 약속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십시오. 우리는 숨겨진 갈등들로부터 열려진 빛 가운데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제가 됩니다. 죄의 무거운 짐들은 풀려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독소들은 제거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위해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삶에 효력을 끼칩니다. 죄의 모든 세력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순수하고 깨끗해집니다.
셋째, 진리 안에서 계속 새롭게 되는 우리의 사귐(8-10) : 우리가 서로 교제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빛 가운데 걸어야 합니다. 빛 가운데 걷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죄를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죄가 없다’는 말은 특정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죄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도 죄인이 아니라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프로이드 심리학을 통해서 서구에서 만연한 것입니다. 프로이드 심리학은 죄의식의 객관적인 근거를 부정합니다. 또한 이 말은 특정한 개인은 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죄를 가진 적이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죄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 속에는 진리가 그 속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살피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범한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수평적인 것은 성도 상호간의 사귐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죄를 고백하고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은 한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죄를 자백하고 새롭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의 몸이 병들었을 때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어떤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되면 할 수 있는 한 그냥 버티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언제 돌아왔습니까?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그는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돌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그가 돌아온 후에도 연회에 오기를 거절하는 형과 회복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죄책감을 가진 죄인들은 그 영혼에 죄의 무거운 짐을 느낍니다. 우리는 더럽고 구토가 남을 느낍니다. 우리는 내가 의롭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오래 간직하고 있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내 양심에 가책을 느낄 때 민감하게 회개하고 고백하십시오.
죄로부터의 자유는 아버지와 그 아들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은혜로우시고 항상 열려 있고 가까이 할 수 있는 구주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께 가까이 가도록 격려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잘 해결할 때 부족함과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과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주장은 자신이 지금 죄를 짓고 있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사람이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까지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눔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가족인 형제자매님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더욱 깊은 사귐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지난 한 해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깨끗하게 된 마음으로 새 해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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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회 다운로드 | DATE : 2009-12-27 13: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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