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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09년 성탄 3강(눅2:1-14)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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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861회 작성일 09-12-20 10:59

본문

2009년 성탄 제 3 강
말씀 누가복음 2:1-14
요절 누가복음 2:12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메리 크리스마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요”라는 노래 가사가 있듯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구유에 누이신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주님의 겸손과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면 마음이 열리고 푸근해집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가 형제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깊은 사귐을 나누고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가이사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시이저가 암살을 당하자 안토니와 레비두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여 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이런 그에게 최고의 지위를 인정하여 “장엄하고 숭고하며 최고로 존경받는 황제”라는 뜻의 아구스도라는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그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고, 훌륭한 행정가였습니다. 그는 제국의 내란을 종식시키고 번영과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세금을 거두고 국가의 정책을 세우기 위해서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올라갔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해산달이 되어 배가 산만큼 불렀습니다. 지금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하라는 영을 내렸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1955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시무할 교회를 찾고 있는 중 두 교회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 와서 한 번 설교를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한 곳은 테네시주에 있는 아주 큰 교회였고 약 2천명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또 한 곳은 알라바마주에 있는 백 명 미만이 모이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킹 목사는 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흑인 목사로서 정상적으로 신학교육을 받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까 상당히 엘리트 목사라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목사 내외는 마음 속으로 ‘내가 2천 명이 모이는 큰 교회에 담임목사가 되었으면’하는 희망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큰 교회로부터는 거절을 당하고 정작 청빙이 온 것은 알라바마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실망스러웠으나 결국 작은 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부임하자 일 년 뒤에 그 유명한 ‘로자 파커스’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알라바마주의 몽고메리 지역에 사는 흑인인 로자 파커스라는 부인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같은 버스 앞자리 반은 백인석이고, 뒷자리 반은 흑인석으로 흑백이 분리되어있을  때였습니다. 피곤에 지친 로자 파커스 부인은 뒷자리는 흑인들로 만석이었고, 백인석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백인석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한 백인이 운전사에게 불평을 늘어놓았고 파커스부인은 몽고메리시의 인종분리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녀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마틴 루터 킹은 인권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최연소로 35세에 노벨 평화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말하기를 “십년 전에 내가 이 교회에 부임할 때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에 보내셨을까?’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불평했지만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나라가 1994년 IMF 국제 금융제재를 받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때 평소에 선교사로 살고자 소원하던 분들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세계 각지로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이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가가 되었습니다. 누가 진정한 역사의 주인입니까? 누가의 기록을 볼 때 역사의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도구입니다. 한 나라에서 대통령은 역사의 중심이 됩니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은 세계역사의 중심이 됩니다. 하물며 아구스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중심축에 서 있는 그 왕을 쓰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역사의 진정한 중심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역사의 핵은 구속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history)'를 '그의 이야기(His story)'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세상 왕들, 정책들, 기타 환경들을 쓰셔서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런 역사관을 가질 때에 운명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이 시대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누울 곳이 없던 아기 예수님 :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언어로 표현하면 “서울역 지하도에서 애를 낳아 신문지에 쌓아 두었더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가난한 그들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양간에 가서 아이를 낳아 구유에 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양간은 바위로 된 벽을 깎아 만든 동굴로서 그 안에는 짐승의 여물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과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잘 드러냅니다.

  당시 여관은 대상들의 숙박소였습니다. 이것은 대형 건물이었으므로 여행자가 자유로이 들어가서 자신과 짐승을 위한 잠자리를 구할 수도 있고, 음식과 짐승의 먹이를 준비할 수도 있었습니다. 비록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기는 했지만 베들레헴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쉬기 위해 찾아간 곳도 바로 이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축사에서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해산하는 여인에게 방 한 칸 내줄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메시아가 자기 땅에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도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왜 이렇게 버림을 받으면서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3-4).”

  오늘날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연예인들은 잘 맞이하는데 예수님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성탄이 되면 송년회, 동창회, 콘서트 등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마음의 방은 없습니다. 높은 마음, 세상 것으로 채워진 마음에는 아기 예수님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자기 의에 차 있는 사람의 마음에도 주님은 오시기가 어렵습니다. 바쁜 마음 속에도 주님이 거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제들로 가득 채워진 마음에도 주님은 거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제에 눌려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빈 마음, 겸손한 마음에 주님은 오실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축사에서 태어나시고 여물통에 뉘신 예수님을 묵상하고 자기 의를 내려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의지하던 사람들, 직장, 돈, 소망 등에 실망하고 계신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이 임하실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 주님은 새롭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여러분에게 구원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큰 기쁨의 좋은 소식 : 그러면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이 누구에게 전해졌습니까?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목자들은 양치는 사람들인데 여러 직업 중 비천한 일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축을 남의 땅으로 몰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또 그들은 가축에서 나온 소산을 착복하기도 하고 도적질을 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이 될 자격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나온 목자들은 죄인일지라도 충성스럽게 밤에 자기 양떼를 지켰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권력자들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비천한 자들, 소외된 자들, 사회적 계급 중 최하위에 속한 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자기 아들의 탄생에 대한 첫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낮고 천한 자들의 목자로 오셨습니다. 목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메시아를 경배하기 위해 부담 없이 외양간에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의 마음에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또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슬퍼하며 낮아진 마음에 주님은 임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배척을 받아 외롭고 슬픈 마음에 주님은 위로자로 오십니다. 이 세상의 허망함을 알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에 주님은 임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임한 그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드디어 구세주가 오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희망하고 기다리던 바로 그 분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위한 특정한 복이 아니라 온 민족을 위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의 사역이 미칠 범위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였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예수님에 대해서 삼중의 명칭을  사용하여 그 장중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구주는 구원자란 뜻이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 부어졌습니다. 주란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헬라어 호칭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 적용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구원자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호칭은 또한 가이사 황제와 대조됩니다. 아구스도 황제는 온 세상에 큰 기쁨과 평화를 준 황제입니다. 그는 신격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아구스도는 당시에 구세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이 온 세상에 큰 기쁨과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인류의 본질문제는 죄입니다. 죄 때문에 아픔과 슬픔과 절망이 있습니다. 죄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고 죽습니다. 죄만 없다면 모든 불행의 요소가 사라집니다. 돈이 없는 것이 사람의 본질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하고 문제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돈을 갖고자 합니다. 돈만 있으면 문제가 없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 더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죄입니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까? 구주가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영적인 왕국을 세우시는 동시에 그들을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시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죄의 종으로서 멸망으로 끌려가는 생활을 하는 전 인류에게 구주 예수님의 탄생보다 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넷째,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 : 그러면 천사가 제시하는 ‘구주 탄생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마리아는 태어난 아기를 위해서 침대 대용으로 짐승의 여물통을 사용했습니다. 천사는 분명히 목자들이 즉각 이 아기를 찾아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목자들은 궁궐이나 부자 집에서 아기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이들은 이런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외양간에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제대로 찾도록 준 표적은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였습니다. 왕 중의 왕이요 주의 주이신 분이 가난하고 비천한 구유 안에 뉘어 계십니다.

  그러면 구주께서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신 데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목자들처럼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위해 오셨음을 말합니다.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사건들을 세계 역사와 연관 지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당시 정치적 상황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과 최초의 로마 황제 아구스도와의 대조는 1세기 독자들에게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구스도라는 이름을 얻은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 황제로서 광대한 로마 제국의 지역을 통치하는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였습니다. 8월(August)은 그를 기릴 목적으로 이름을 삽입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환경에서 태어나셨고, 가축의 여물통에 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복하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비천하게 오신 분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신비이며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벨기에 태생 다미엔(Damien)이 1893년 태평양의 고도인 몰로카이(Molokai) 섬에 선교하러 들어갔습니다. 그 섬은 나병환자 수용소였습니다. 십 년을 보냈지만 그의 각오와는 다르게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몰로카이 섬 주민들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건강을 축복으로 받았으니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병들었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느냐?”고 불평했습니다. 다미엔은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저에게 문둥병을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건강한 것이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면 저에게 문둥병을 주십시오.” 그는 일부러 문둥병 환자들과 피부접촉을 가지기도 하고 심지어 문둥병 환자들의 배설물까지 먹기도 했습니다. 1년 후 결국 그는 문둥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피부가 썩어 들어갔습니다. 그때 문둥병 환자들을 향하여 “우리가 비록 문둥병에 걸렸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천국을 예비하고 계십니다”라고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제 몸이 문둥병으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심령은 사랑으로 싱싱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사실 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9:58)”고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결국 죄인 중의 괴수로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양들과 함께 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또 동역자들끼리도 낮아져서 섬기는 가운데 내면을 울리는 사귐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공간에서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소통함으로 진정한 사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형편을 돌아보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낮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소유한 여러분은 값진 진주보다 귀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섬기는 여러분은 정말로 은혜를 받은 분들입니다.

  그때 홀연히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환상적인 찬양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목자들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은 하나님의 영광이 발산하는 눈부신 광채에 의해서 흩어졌고, 그들 옆에는 주의 사자가 서 있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메시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전쟁이나 싸움이 끝난 후에 오는 평화가 아니라 죄인 된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생기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를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죄는 예수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공짜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의 기쁨인 구원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시되 구유에 누이시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에 동참하시고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 부요함을 주십니다. 아름다우신, 그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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