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년 요한복음 제 15 강(15:1-17)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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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학기 제 15 강
말씀 요한복음 15:1-17
요절 요한복음 15:5
열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시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택하셨습니다. 이 열매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맺습니다. 열매 맺을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열매 맺는 비결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하나님 아버지를 농부에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의와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극상품 포도나무로 간주했습니다(사 5:1-7). 그러나 그들은 몹쓸 나무가 되었습니다. 악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실패한 포도나무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이상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이 실패한 포도나무를 예수님이 대신하십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도 이제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서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방 종교나 바리새인들이 거짓 포도나무라면 예수님은 이런 거짓들과는 그 본질이 다른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그러면 농부는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여기에서 두 가지 가지치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에 대해서 가해지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립니다. 이 가지는 죽어 있는 가지이거나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아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불필요한 가지입니다. 이런 가지는 형식적으로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거해 버립니다.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인데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를 합니다. 작은 송이가 많으면 값나가는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크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순을 따줍니다.
열매를 더 맺게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나 역경을 통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고난이나 역경을 많이 겪으면서 사람은 인물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은 또 영적인 연단이나 훈련, 혹은 절제를 통해서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광야라는 악조건 속에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광야 훈련의 내용은 일용할 양식 먹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훈련을 받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영적 전쟁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기본적인 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고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에 중국대사였던 김하중씨는 시시콜콜 기도론으로 유명한데 그는 매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지 않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간증집 「하나님의 대사」가 나왔을 때 출판사에서는 책이 잘 팔리기 위해서 언론 인터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진정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면 기도에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도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세속적인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삶은 단순합니다. 단순한 삶에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집중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말합니다. 즉 경건한 삶이나 인격의 덕목을 뜻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갈 5:22-23). 또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말합니다(엡 5:9).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Back to yourself). 사역을 잘 하고자 몸부림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주님은 어떻게 가지치기를 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우리 마음에 불순물들을 제거해 줍니다. 우리가 말씀에 비추어 회개하고 욕심을 버릴 때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제거해 줍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대한 욕망이나 출세와 같은 것들에 대한 소망을 이미 정리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참 포도나무의 가지인 제자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 비결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 깨끗해진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변함없이 그대로 머물러야 합니다. 거한다는 것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거한다는 것은 밖에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문 밖에서 서성이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방관자로 살아갑니다. 방관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허무의식과 함께 외로움을 타고 방황합니다. 그런 사람은 문 밖에서 방황하면서도 문 안으로 잘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대해서 남의 교회를 말하듯이 하고, 교회의 실수가 나의 실수이고 교회의 부족이 나의 부족함임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거하다는 말은 문 밖에서 서성이며 비판하거나 남의 일인 양 방관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거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접촉해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면 거한다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문 밖에서 문 안으로 들어와 서로 접촉이 시작되면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그와 친밀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모습입니다. 골로새서 2:6-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예수님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으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거기서 생명력을 얻고 그의 성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인생관, 가치관이 예수님 중심이 되어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참 포도나무의 진액을 받아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셋째, 거한다는 것은 상호보완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거하는 것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입니다. 여자 없이 남자만 존재할 수 없고, 부모없이 자식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먹이고 속을 썩이는 자식도 나의 자식이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힘들게 하는 남편도 나의 남편이요,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동시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중심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께 묻고 그의 지시를 받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믿음의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면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모든 일에 실패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즉 성숙한 내면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오기로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살아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의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가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불신이 죄라는 사실은 성령께서 깨우쳐주십니다.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경고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특권은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자들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갖습니다. 올바른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자들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믿어지고 힘이 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그 말씀대로 믿고 행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말씀대로 믿고 순종했을 때 말씀대로 부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서양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버리고 인간 이성을 앞세울 때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서 사람들의 영성을 메마르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유럽 교회가 텅텅 비어버렸고 교회가 디스코텍이나 술집으로 팔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때로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지혜로우십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따라서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우리가 말씀대로 믿고 기도할 때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됩니다(8).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지 못한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바로 나로부터 믿음의 사람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고 가릴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거듭나는 역사가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많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또 어디에 거하라고 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서로 형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고통을 나누면 반감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감당해 주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쌍방향적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지만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함께 놀고, 함께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 교회 모임을 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정 교회 모임에 잘 참석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가진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그가 제자들을 위해 크게 사랑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는 제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고 싶으십니까? 기쁨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사랑하십시오.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형제를 위해서 시간을 내고 작은 희생을 실천해 보십시오. 형제를 위해서 음식을 마련하고 섬기는 것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기쁘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지 말고 먼저 형제를 사랑하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기쁨을 받은 상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이 더욱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월드컵 축구를 구경하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것은 4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누리는 기쁨은 언제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지된 자로서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면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벗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십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들입니다. 우리의 친구로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제자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도 시키는 대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깊이 이해하고 함께 행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대화를 하게 되고 함께 정보를 나누고 함께 문제를 공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내가 원해서 제자의 길을 가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택하여 세우셨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나를 택하셨습니까? 우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매를 맺고자 하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제자의 특징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전도와 제자 양성의 열매도 결국 사랑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치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전도 할 수 있습니다.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성숙한 제자로 자라나도록 해산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연합하게 되고 그 결과 재생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십니다. 보통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강력하게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열매를 맺는 일이 우선이고 기도와 그 응답은 나중에 옵니다. 이 말씀은 7-8절과 대조가 됩니다. 앞에서는 기도가 선행하고 그 응답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종합해 볼 때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와 열매 맺는 삶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 응답을 받아 열매를 맺게 됩니다. 또 열매를 맺은 결과 더욱더 하나님께 기도하여 모든 응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그 열매를 맺는 것은 제자 공동체, 즉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가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면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증명이 됩니다. 생활 속의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꼭 붙들고 여기서 진보를 보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5:1-17
요절 요한복음 15:5
열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시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택하셨습니다. 이 열매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맺습니다. 열매 맺을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열매 맺는 비결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하나님 아버지를 농부에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의와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극상품 포도나무로 간주했습니다(사 5:1-7). 그러나 그들은 몹쓸 나무가 되었습니다. 악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실패한 포도나무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이상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이 실패한 포도나무를 예수님이 대신하십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도 이제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서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방 종교나 바리새인들이 거짓 포도나무라면 예수님은 이런 거짓들과는 그 본질이 다른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그러면 농부는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여기에서 두 가지 가지치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에 대해서 가해지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립니다. 이 가지는 죽어 있는 가지이거나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아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불필요한 가지입니다. 이런 가지는 형식적으로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거해 버립니다.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인데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를 합니다. 작은 송이가 많으면 값나가는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크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순을 따줍니다.
열매를 더 맺게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나 역경을 통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고난이나 역경을 많이 겪으면서 사람은 인물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은 또 영적인 연단이나 훈련, 혹은 절제를 통해서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광야라는 악조건 속에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광야 훈련의 내용은 일용할 양식 먹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훈련을 받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영적 전쟁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기본적인 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고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에 중국대사였던 김하중씨는 시시콜콜 기도론으로 유명한데 그는 매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지 않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간증집 「하나님의 대사」가 나왔을 때 출판사에서는 책이 잘 팔리기 위해서 언론 인터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진정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면 기도에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도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세속적인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삶은 단순합니다. 단순한 삶에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집중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말합니다. 즉 경건한 삶이나 인격의 덕목을 뜻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갈 5:22-23). 또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말합니다(엡 5:9).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Back to yourself). 사역을 잘 하고자 몸부림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주님은 어떻게 가지치기를 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우리 마음에 불순물들을 제거해 줍니다. 우리가 말씀에 비추어 회개하고 욕심을 버릴 때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제거해 줍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대한 욕망이나 출세와 같은 것들에 대한 소망을 이미 정리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참 포도나무의 가지인 제자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 비결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 깨끗해진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변함없이 그대로 머물러야 합니다. 거한다는 것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거한다는 것은 밖에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문 밖에서 서성이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방관자로 살아갑니다. 방관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허무의식과 함께 외로움을 타고 방황합니다. 그런 사람은 문 밖에서 방황하면서도 문 안으로 잘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대해서 남의 교회를 말하듯이 하고, 교회의 실수가 나의 실수이고 교회의 부족이 나의 부족함임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거하다는 말은 문 밖에서 서성이며 비판하거나 남의 일인 양 방관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거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접촉해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면 거한다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문 밖에서 문 안으로 들어와 서로 접촉이 시작되면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그와 친밀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모습입니다. 골로새서 2:6-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예수님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으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거기서 생명력을 얻고 그의 성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인생관, 가치관이 예수님 중심이 되어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참 포도나무의 진액을 받아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셋째, 거한다는 것은 상호보완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거하는 것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입니다. 여자 없이 남자만 존재할 수 없고, 부모없이 자식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먹이고 속을 썩이는 자식도 나의 자식이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힘들게 하는 남편도 나의 남편이요,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동시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중심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께 묻고 그의 지시를 받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믿음의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면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모든 일에 실패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즉 성숙한 내면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오기로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살아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의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가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불신이 죄라는 사실은 성령께서 깨우쳐주십니다.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경고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특권은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자들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갖습니다. 올바른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자들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믿어지고 힘이 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그 말씀대로 믿고 행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말씀대로 믿고 순종했을 때 말씀대로 부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서양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버리고 인간 이성을 앞세울 때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서 사람들의 영성을 메마르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유럽 교회가 텅텅 비어버렸고 교회가 디스코텍이나 술집으로 팔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때로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지혜로우십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따라서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우리가 말씀대로 믿고 기도할 때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됩니다(8).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지 못한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바로 나로부터 믿음의 사람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고 가릴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거듭나는 역사가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많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또 어디에 거하라고 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서로 형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고통을 나누면 반감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감당해 주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쌍방향적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지만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함께 놀고, 함께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 교회 모임을 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정 교회 모임에 잘 참석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가진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그가 제자들을 위해 크게 사랑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는 제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고 싶으십니까? 기쁨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사랑하십시오.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형제를 위해서 시간을 내고 작은 희생을 실천해 보십시오. 형제를 위해서 음식을 마련하고 섬기는 것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기쁘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지 말고 먼저 형제를 사랑하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기쁨을 받은 상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이 더욱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월드컵 축구를 구경하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것은 4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누리는 기쁨은 언제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지된 자로서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면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벗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십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들입니다. 우리의 친구로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제자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도 시키는 대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깊이 이해하고 함께 행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대화를 하게 되고 함께 정보를 나누고 함께 문제를 공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내가 원해서 제자의 길을 가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택하여 세우셨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나를 택하셨습니까? 우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매를 맺고자 하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제자의 특징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전도와 제자 양성의 열매도 결국 사랑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치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전도 할 수 있습니다.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성숙한 제자로 자라나도록 해산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연합하게 되고 그 결과 재생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십니다. 보통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강력하게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열매를 맺는 일이 우선이고 기도와 그 응답은 나중에 옵니다. 이 말씀은 7-8절과 대조가 됩니다. 앞에서는 기도가 선행하고 그 응답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종합해 볼 때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와 열매 맺는 삶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 응답을 받아 열매를 맺게 됩니다. 또 열매를 맺은 결과 더욱더 하나님께 기도하여 모든 응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그 열매를 맺는 것은 제자 공동체, 즉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가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면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증명이 됩니다. 생활 속의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꼭 붙들고 여기서 진보를 보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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