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년 요한복음 제 14 강(13:36-14:14)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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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학기 제 14강
말씀 요한복음 13:36 - 14:14
요절 요한복음 14:6
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오늘 유명한 말씀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찾는 사람을 구도자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갈 때 길이 여럿 있는 것처럼 구원의 길도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 죽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만드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찾는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목적지로 삼으면 죽음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이 시간 삶의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와 그 가는 길을 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심령이 괴로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는데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서 밤에 빵 조각을 받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시 후에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영접하기보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 자신들이 갈 수 없다는 말씀에 놀라서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지금은 내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가시고, 유다는 배반하고, 수제자도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정신적인 공황 또는 진공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해졌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공동체는 핵심 리더들을 잃고 다 흩어질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의 청춘을 주님을 위해서 드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와 능력과 영향력을 볼 때 자신들의 장래가 환하게 열리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가시고, 유다도 배반하고, 베드로도 그를 부인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자신들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세상을 살 때 나의 꿈이 깨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깨어져버립니다. 의지하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멀리 떠나버립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 세상의 문제들을 헤쳐 나갈 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손에 맥이 풀리고 의욕이 상실됩니다. 삶이 다 허무해 보입니다. 자신은 쓸모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에게 나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내가 그렇게 가벼운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문제 앞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근심은 근심을 낳습니다. 근심은 마음이 나누이게 만듭니다. 근심을 하면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근심을 하면 힘을 낭비하게 됩니다. 근심은 미래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근심은 사탄이 쓰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지하실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리 태양이 환하게 비추어도 어두운 것처럼 근심의 방 속에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근심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근심은 끊임없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하는 근심의 95%이상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근심을 멈추십시오.
대신에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염려는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근심에 대한 해답은 믿음뿐입니다. 믿으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때 그들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염려보다 비전으로 충만했습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도 근심하기보다 믿음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흔들리고 불안해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책임져주십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 결혼문제, 자녀들의 교육문제, 제자양성, 인간관계, 승진 등등 근심하고 염려하는 문제들을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것들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예수님은 제자들이 걱정하는 문제의 원인을 아시고 실제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아버지 집으로 가십니다. 아버지 집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입니다. 예수님은 가시지만 조금 후에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에 다시 오시지만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격적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셔서 근심 가운데 있는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셔서 교통하시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21절을 보면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또한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크리스천들이 환란의 때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특권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축복의 때보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컸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평안을 누릴 때에도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사명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축복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지 않으면 이 세상 것에 만족해 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평안과 축복 속에서 이름뿐인 신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우리 안에 세상 소망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 깊이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쓰지 않으면 세상이 우리를 세속적인 사람들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시기를 강력히 권면합니다. 이렇게 힘을 쓰다보면 임계상황을 넘어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때가 올 줄 믿습니다. 또 이렇게 힘을 쓸 때 각 요회가 배가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제자들이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장소로 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물리적인 장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심많은 도마의 질문을 받고 유명한 자기 선언을 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선포는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핵심이며 교훈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그는 죄로 인해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심으로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 길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 한 가운데로 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가 휘장이 되어 그 몸을 찢으사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히10:20). 그러므로 이 길을 거부하는 자들은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이며 생명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핵심인 ‘로고스’ 개념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것인데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 말씀이십니다(1:14). 이 말씀은 곧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자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본성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1:4)” 이 생명은 영원한 것이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생명이심을 믿는 자는 그의 자녀가 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며 영원히 멸망치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길, 진리, 생명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자이시오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으며 모든 죄악된 것을 그의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 아버지도 알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제자들이 그를 알았고 또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빌립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의 소원은 모든 사람들의 소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은 소원 때문에 수많은 우상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알게 되고 보게 됩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다 알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신비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안 믿어지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가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는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거라사 광인을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데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영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도 하게 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일, 죄사함을 전하는 대제사장의 일, 정복하고 다스리고 섬기는 왕의 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질적으로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것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질적으로는 똑 같은 일이지만 일의 범위나 규모 면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여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신 이후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이런 큰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큰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큰일을 할 수 있는지 그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우리를 통해서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 친히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말씀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입니다. 오직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만이 이런 큰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40일 특별 새벽기도를 하는 것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지치고 힘들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한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은혜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우리는 계속해서 이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서 지금도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내주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 속에서 탄식하면서 중보기도 해 주십니다. 기도는 노동입니다. 영적 전쟁은 먼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기도에 실패하면 모든 일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현상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이 있다면 회개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큰 비전을 갖지 않고 작은 일에 머문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꿈꾸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한계를 짓는 일은 불신으로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죄인이 변화되어 구원을 받고 제자로 산다는 것은 큰일입니다. 병든 사람이 치료되어 건강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큰일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면 백명, 천명, 만명에게서도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서 큰 꿈을 꾸고 큰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3:36 - 14:14
요절 요한복음 14:6
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오늘 유명한 말씀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찾는 사람을 구도자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갈 때 길이 여럿 있는 것처럼 구원의 길도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 죽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만드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찾는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목적지로 삼으면 죽음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이 시간 삶의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와 그 가는 길을 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심령이 괴로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는데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서 밤에 빵 조각을 받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시 후에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영접하기보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 자신들이 갈 수 없다는 말씀에 놀라서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지금은 내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가시고, 유다는 배반하고, 수제자도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정신적인 공황 또는 진공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해졌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공동체는 핵심 리더들을 잃고 다 흩어질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의 청춘을 주님을 위해서 드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와 능력과 영향력을 볼 때 자신들의 장래가 환하게 열리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가시고, 유다도 배반하고, 베드로도 그를 부인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자신들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세상을 살 때 나의 꿈이 깨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깨어져버립니다. 의지하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멀리 떠나버립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 세상의 문제들을 헤쳐 나갈 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손에 맥이 풀리고 의욕이 상실됩니다. 삶이 다 허무해 보입니다. 자신은 쓸모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에게 나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내가 그렇게 가벼운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문제 앞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근심은 근심을 낳습니다. 근심은 마음이 나누이게 만듭니다. 근심을 하면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근심을 하면 힘을 낭비하게 됩니다. 근심은 미래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근심은 사탄이 쓰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지하실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리 태양이 환하게 비추어도 어두운 것처럼 근심의 방 속에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근심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근심은 끊임없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하는 근심의 95%이상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근심을 멈추십시오.
대신에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염려는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근심에 대한 해답은 믿음뿐입니다. 믿으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때 그들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염려보다 비전으로 충만했습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도 근심하기보다 믿음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흔들리고 불안해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책임져주십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 결혼문제, 자녀들의 교육문제, 제자양성, 인간관계, 승진 등등 근심하고 염려하는 문제들을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것들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예수님은 제자들이 걱정하는 문제의 원인을 아시고 실제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아버지 집으로 가십니다. 아버지 집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입니다. 예수님은 가시지만 조금 후에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에 다시 오시지만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격적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셔서 근심 가운데 있는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셔서 교통하시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21절을 보면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또한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크리스천들이 환란의 때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특권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축복의 때보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컸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평안을 누릴 때에도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사명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축복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지 않으면 이 세상 것에 만족해 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평안과 축복 속에서 이름뿐인 신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우리 안에 세상 소망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 깊이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쓰지 않으면 세상이 우리를 세속적인 사람들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시기를 강력히 권면합니다. 이렇게 힘을 쓰다보면 임계상황을 넘어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때가 올 줄 믿습니다. 또 이렇게 힘을 쓸 때 각 요회가 배가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제자들이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장소로 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물리적인 장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심많은 도마의 질문을 받고 유명한 자기 선언을 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선포는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핵심이며 교훈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그는 죄로 인해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심으로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 길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 한 가운데로 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가 휘장이 되어 그 몸을 찢으사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히10:20). 그러므로 이 길을 거부하는 자들은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이며 생명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핵심인 ‘로고스’ 개념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것인데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 말씀이십니다(1:14). 이 말씀은 곧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자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본성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1:4)” 이 생명은 영원한 것이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생명이심을 믿는 자는 그의 자녀가 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며 영원히 멸망치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길, 진리, 생명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자이시오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으며 모든 죄악된 것을 그의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 아버지도 알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제자들이 그를 알았고 또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빌립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의 소원은 모든 사람들의 소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은 소원 때문에 수많은 우상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알게 되고 보게 됩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다 알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신비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안 믿어지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가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는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거라사 광인을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데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영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도 하게 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일, 죄사함을 전하는 대제사장의 일, 정복하고 다스리고 섬기는 왕의 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질적으로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것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질적으로는 똑 같은 일이지만 일의 범위나 규모 면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여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신 이후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이런 큰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큰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큰일을 할 수 있는지 그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우리를 통해서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 친히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말씀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입니다. 오직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만이 이런 큰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40일 특별 새벽기도를 하는 것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지치고 힘들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한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은혜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우리는 계속해서 이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서 지금도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내주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 속에서 탄식하면서 중보기도 해 주십니다. 기도는 노동입니다. 영적 전쟁은 먼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기도에 실패하면 모든 일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현상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이 있다면 회개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큰 비전을 갖지 않고 작은 일에 머문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꿈꾸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한계를 짓는 일은 불신으로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죄인이 변화되어 구원을 받고 제자로 산다는 것은 큰일입니다. 병든 사람이 치료되어 건강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큰일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면 백명, 천명, 만명에게서도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서 큰 꿈을 꾸고 큰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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