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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여름수양회 초청 특강(요1:29-51) 와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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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776회 작성일 10-06-2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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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수양회 특강                                                               
말씀 요한복음 1:29-51
요절 요한복음 1:39

 와서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이제 여름 수양회가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이번에 다윗 동산에서 갖는 여름수양회는 동교, 영남, 인천 센터가 연합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연합수양회인 만큼 모든 면에서 더 풍성할 것입니다. 새로운 강사들과 풍성한 내용으로 은혜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셨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번 수양회를 통해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제자들의 고백이 우리와 양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34) : 세례 요한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질타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고,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메시지는 죄에 찌든 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갖게 했습니다. 회개한 사람들은 자유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그 죄를 해결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구원자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눈과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안내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지고 간다는 말은 지고 가서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백성이 용서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은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린 양을 성전으로 끌고 와서 그 머리 위에 안수하고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가 양에게 옮겨진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 다음에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 손으로 그 양을 잡습니다. 자기의 죄를 지고 갈 양을 죽이면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처참한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며 어린 양에게 안수하고 그 양을 죽이면, 제사장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에 뿌리고, 양의 고기와 기름을 불살라 제사를 드립니다. 레위기 4: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같이 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어린 양’은 죄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되는 속죄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내 죄를 속하기 위해서 대신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고 간다’는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한 번씩 대 속죄일에 속제 제물을 드리고 나서 흠 없는 염소 한 마리를 데려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무인광야로 가서는 죄와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십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와 싸우면서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죄는 마치 암과 같습니다. 암세포는 다른 세포들보다 몇 배나 빨리 자라면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합니다. 암세포는 사람의 영양분을 다 취해서 더 이상 취할 것이 없을 때까지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조기에 암세포를 발견해서 떼어내는 것이 최선의 치료책입니다. 암세포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것처럼 죄는 사람이 죽기까지 성장과 영향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람이 죄를 없애려고 노력해 보면 죄가 얼마나 질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요한은 세상 죄와 싸우면서 사람들이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이 어떠한지를 보았습니다. 죄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정죄와 형벌이 따릅니다. 죄는 저주와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죄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임재를 누리며 그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2000년 전의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이 지금의 내 죄하고 무슨 상관이야?” 하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고 간다는 동사는 현재 분사로서 현재에도 계속해서 지고 간다는 역동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한 번으로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속죄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30). 또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세례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기능하기에 적합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고 성령의 내재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시기 때문에 그의 생명력을 공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말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성령의 충만함을 효과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세례는 단 하나 밖에 없는 최초의 체험이고 충만은 계속적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반복해서 받아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능력있는 삶, 거룩한 삶,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거나 거스르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어 주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힘써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 믿음으로 구하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말씀 공부와 기도와 예배에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더욱 충만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와서 보라(35-51) : 35,36절을 봅시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스승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그들이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정말 내가 원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제목을 분명하게 잡아야합니다. 두 제자의 기도 제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는 동문서답같이 들립니다.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는데 어디 사시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깊이 대화하고 그의 사상과 인격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한 목자와 함께 있는 양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스승과 함께 살면서 도제 수업을 받았습니다.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과 인격을 배웠습니다. 같이 사는 가운데 스승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름수양회에서 3박 4일 동안 함께 먹고 자고  놀면서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중심으로 교제를 나눌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와서 보라”는 말은 와서 체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든지 변화를 깊이 체험하려면 집중해서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우리는 여름 수양회에 참여해서 짧은 시간 동안 일곱 강에 해당하는 말씀을 공부하고 메시지를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감은 두세 편을 써서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메시지를 듣고 소감을 나누는 가운데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소감을 듣다 보면 예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여름 수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소감을 듣는 중에 예수님을 만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깊이 발견하고 영접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안드레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41절을 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그는 형제 시몬을 찾아가서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 메시아를 만난 감격이 그의 고백 속에 흠뻑 배어 있습니다. 그는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죄에 대한 책망을 많이 듣고 심령이 눌려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감격을 혼자서 가만히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몇 마리의 고기에 울고 웃는 형제 시몬을 찾아갔습니다. 시몬,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 같이 가 볼래! 안드레는 고민하고 있는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시 왔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놀라운 예언을 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42).” 시몬은 얼마 후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시몬은 모래처럼 가벼운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열매가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어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가 데려온 어린 아이로 인해서 굶주렸던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꼬투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감격은 감격을 낳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낳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내가 데려온 그 한 사람이 변화되어 얼마나 놀라운 일을 일생동안 해 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기대를 갖고 초청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번 수양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정말 중요한 안드레와 같은 일을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43,44절을 봅시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예수님은 친히 빌립에게 전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빌립은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그는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사실 이 말은 나사렛 사람을 비웃는 당시의 속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출신으로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십니다. 그는 소외된 사람이었고, 가난하셨고, 중앙 무대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연약한 자들, 상처받은 사람들을 잘 이해하십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무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와서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를 초청했습니다. 안드레는 형제를 데려왔고, 빌립은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데리고 여름 수양회에 가고자 하십니까? 우리가 이번 여름수양회에 형제 자매, 친구, 양들을 초청하여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쉼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여름 수양회에는 권세 있는 말씀, 듀엣 드라마, 인생소감, 영상드라마, 찬양, 아름다운 교제, 맛있는 음식과 다과, 레크레이션과 운동 경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초청한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할 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합니까? 우리가 진정 보여 주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잘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양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우리 가운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모습, 서로 격려하고 부족함을 도와주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또 와서 보라는 말은 즉시로 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6:2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와서 보라!”고 하는데 다음에, 나중에 하다가 대부분 때를 놓칩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함께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자 칭찬을 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칭찬하시는 말씀을 듣고 어떻게 나를 아시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나다나엘은 고백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0,51) 이 장면은 야곱이 고향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갈 때에 길에서 자다가 꿈을 꾼 내용입니다. 그는 이 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개인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이 수양회에 처음 참석하는 분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40일 특별 새벽 기도를 하는 가운데 여름 수양회 초청과 프로그램 준비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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