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년 요한복음 제 12 강(12:20-36)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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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학기 요한복음 제 12강
본문 요한복음 12:20-36
요절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한 알의 밀알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의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우리가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밀알이 죽는 것은 씨알이 싹이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씨가 흙 속에 묻혀서 썩고 죽음으로 양분을 배젖에 주어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진정한 생명을 얻고 어제와는 달라진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생명을 얻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였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말씀들 그리고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계를 지배할 만한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철학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산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전후 문맥과 33절을 볼 때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왜 영광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에게 속죄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또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만족하게 하셨고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의 세력을 깨뜨리셨습니다. 율법이 더 이상 인간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 알의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100개에서 120개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5년 동안 다시 경작하면 5년 후에는 무려 1백억 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을 가마니에 담으면 1만 7천 가마니가 되고, 200명이 2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 됩니다. 한 알의 밀에는 이렇게 큰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에는 생명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한 알의 밀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가능성이 무한한 밀알이 죽지 않으면 3천년이 지나도 한 알 그대로입니다. 이는 엄청난 손실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떨어짐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이 땅에 성육신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영광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밀알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기대합니다. 로또와 같이 우연히 일확천금을 얻기를 바랍니다. 또 뽑기 식으로 승리하기를 바라고 수고 없이, 희생 없이 열매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정한 영광을 얻는 진리를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에서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고서 그가 죽는다고 했을 때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죄악 된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제자 양성을 하려면 양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고 순종하기까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양 속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또 내 속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목자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투쟁하지 않고 양을 거룩한 제자로 키울 수 없습니다. 양은 목자를 그대로 따라합니다. 양을 치기 위해서 말씀을 잘 준비하고 먹을 것으로 섬겨야합니다. 이런 생활을 감당하려면 자기 훈련이 있어야 하고 개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일용할 양식과 새벽 기도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자기부인을 해야 합니다. 좀 더 눕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꾸준히 먹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을 하기 위해서 육신의 안일을 매일 죽여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알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내 감정대로 살고 싶은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새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자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제자의 영광입니다.
유한나 선교사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는 수필에서 자기 생애 최고의 날은 언제 일까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한 날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린 날일까?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그 이상의 최고의 날이라면 결혼 후 첫아기를 해산한 날이었다고 말합니다. 한 생명체를 자신의 몸 안에서 열 달 가까이 품었다가 이 세상에 탄생시킨다는 일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인 여성들만이 임신과 해산을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모든 여성들이 임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감내 할 수 있는 것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해산의 고통을 맛보면서도 목자 생활을 하는 것도 이러한 생명 탄생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교회, 생명을 번식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나 한사람부터 희생해야 합니다. 나부터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알의 밀알의 진리를 깊이 새기게 하시고 그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자기 것을 챙기는 것입니다. 관심이 오직 자기에게만 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부요하게 하고 자신만을 편안하게 하고 자기만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그 생명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생명을 사랑하는데그 생명은 죽어갑니다. 자기의 외모를 아름답게 만들지만 늙어갑니다. 부를 쌓지만 소유할 것은 없고,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몸의 기능은 쇠퇴해 갑니다.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현재 생명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생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일 더하기 일은 이이지만 생명에서는 일 더하기 일이 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거상들은 돈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을 얻으려고 합니다. 상도를 지키고 사람을 얻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기를 미워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먼저 갖는 것이요, 자기 시간, 자기 돈, 꿈, 계획, 자기 성질, 체질, 식성, 습관, 삶의 양식 등을 더 높은 가치와 진리를 위해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부인하면 사생활이나 개성, 자신의 독특성이 죽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치고 다듬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다이아몬드도 원석만으로는 아름다움을 발산할 수 없습니다. 장인이 깎고 다듬어야 합니다. 축구 선수도 재능이 있다고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보니 월드컵에 나간 선수들은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이 아닙니다. 경기 일정에 맞추어서 맞는 음식을 먹습니다. 고강도 훈련을 하지만 그것을 싫어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골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훈련을 받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사모할 때 자기의 생명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사모함이 생명에 대한 미움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육적인 생명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가장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산다는 세례의 진리를 알 때 우리는 믿음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죽음으로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생명을 살리는 선교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갈2:20절에서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은 많은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정신을 제자도에 적용하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자에게 천국이 주어집니다. 영생이 보장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순종할 때 체험되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사람들에 의하여 멸시를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존중을 받습니다. 이러한 영광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광입니다.
마리안느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렛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들어와서 43년간 그들의 생애를 들여 한국의 병든 환자들과 가정들을 돌보았습니다. 아무리 환자들이 말려도 상처에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고 하며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환자들의 환부에 약을 직접 발라주며 간호와 봉사활동을 하며 그들의 젊음과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 당시 약품과 치료여건이 열악하였던 한국에서 그들은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약품과 지원금을 받아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200명 가까이 되는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들을 위해 영아원을 운영하며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70세가 넘었을 때 “나이가 들어 일을 잘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때는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말해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가 왔다.”는 편지를 남기고 조용히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43년전에 그곳에 올 때 가지고 왔던 낡은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든 채로 오스트리아로 고국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봉사하면서도 수백장의 감사장이나 공로패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 그들에게 주는 정부 훈장도 직접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을 찾아와서 주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들은 한 알의 밀알의 진리를 실천하였습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외국인으로서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외국인으로서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부족한 점이 있었으면 용서해 달라.”고 이별편지를 써 놓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땅에 떨어져 죽을 수 있었습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 민망하고 마음이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는 이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자신이 왜 이 땅에 왔는지 새롭게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앞세우심으로 자기 생명을 미워하셨습니다. 반대로 자기 생명을 앞세우는 것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기도로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기도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그러나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거룩한 열정이 생깁니다. 기도할 때 속사람이 강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납니다. 골로새서 2:14-1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동시에 이 세상의 주관자인 사탄이 축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됩니다. 이제 그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들리심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불신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함으로써 사탄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자들이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여기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제는 헬라인도, 한국인도, 중국인도, 일본인도, 미국인도, 영국인, 태국인, 우즈벡인도 다 포함됩니다. 말 그대로 온 세상 만민들이 한 사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로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죽는 예수님의 죽음은 이처럼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의 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고 섬기는 가운데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밀알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친히 그렇게 사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12:20-36
요절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한 알의 밀알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의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우리가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밀알이 죽는 것은 씨알이 싹이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씨가 흙 속에 묻혀서 썩고 죽음으로 양분을 배젖에 주어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진정한 생명을 얻고 어제와는 달라진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생명을 얻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였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말씀들 그리고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계를 지배할 만한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철학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산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전후 문맥과 33절을 볼 때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왜 영광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에게 속죄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또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만족하게 하셨고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의 세력을 깨뜨리셨습니다. 율법이 더 이상 인간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 알의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100개에서 120개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5년 동안 다시 경작하면 5년 후에는 무려 1백억 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을 가마니에 담으면 1만 7천 가마니가 되고, 200명이 2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 됩니다. 한 알의 밀에는 이렇게 큰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에는 생명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한 알의 밀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가능성이 무한한 밀알이 죽지 않으면 3천년이 지나도 한 알 그대로입니다. 이는 엄청난 손실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떨어짐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이 땅에 성육신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영광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밀알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기대합니다. 로또와 같이 우연히 일확천금을 얻기를 바랍니다. 또 뽑기 식으로 승리하기를 바라고 수고 없이, 희생 없이 열매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정한 영광을 얻는 진리를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에서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고서 그가 죽는다고 했을 때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죄악 된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제자 양성을 하려면 양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고 순종하기까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양 속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또 내 속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목자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투쟁하지 않고 양을 거룩한 제자로 키울 수 없습니다. 양은 목자를 그대로 따라합니다. 양을 치기 위해서 말씀을 잘 준비하고 먹을 것으로 섬겨야합니다. 이런 생활을 감당하려면 자기 훈련이 있어야 하고 개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일용할 양식과 새벽 기도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자기부인을 해야 합니다. 좀 더 눕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꾸준히 먹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을 하기 위해서 육신의 안일을 매일 죽여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알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내 감정대로 살고 싶은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새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자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제자의 영광입니다.
유한나 선교사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는 수필에서 자기 생애 최고의 날은 언제 일까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한 날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린 날일까?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그 이상의 최고의 날이라면 결혼 후 첫아기를 해산한 날이었다고 말합니다. 한 생명체를 자신의 몸 안에서 열 달 가까이 품었다가 이 세상에 탄생시킨다는 일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인 여성들만이 임신과 해산을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모든 여성들이 임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감내 할 수 있는 것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해산의 고통을 맛보면서도 목자 생활을 하는 것도 이러한 생명 탄생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교회, 생명을 번식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나 한사람부터 희생해야 합니다. 나부터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알의 밀알의 진리를 깊이 새기게 하시고 그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자기 것을 챙기는 것입니다. 관심이 오직 자기에게만 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부요하게 하고 자신만을 편안하게 하고 자기만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그 생명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생명을 사랑하는데그 생명은 죽어갑니다. 자기의 외모를 아름답게 만들지만 늙어갑니다. 부를 쌓지만 소유할 것은 없고,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몸의 기능은 쇠퇴해 갑니다.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현재 생명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생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일 더하기 일은 이이지만 생명에서는 일 더하기 일이 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거상들은 돈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을 얻으려고 합니다. 상도를 지키고 사람을 얻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기를 미워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먼저 갖는 것이요, 자기 시간, 자기 돈, 꿈, 계획, 자기 성질, 체질, 식성, 습관, 삶의 양식 등을 더 높은 가치와 진리를 위해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부인하면 사생활이나 개성, 자신의 독특성이 죽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치고 다듬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다이아몬드도 원석만으로는 아름다움을 발산할 수 없습니다. 장인이 깎고 다듬어야 합니다. 축구 선수도 재능이 있다고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보니 월드컵에 나간 선수들은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이 아닙니다. 경기 일정에 맞추어서 맞는 음식을 먹습니다. 고강도 훈련을 하지만 그것을 싫어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골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훈련을 받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사모할 때 자기의 생명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사모함이 생명에 대한 미움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육적인 생명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가장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산다는 세례의 진리를 알 때 우리는 믿음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죽음으로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생명을 살리는 선교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갈2:20절에서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은 많은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정신을 제자도에 적용하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자에게 천국이 주어집니다. 영생이 보장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순종할 때 체험되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사람들에 의하여 멸시를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존중을 받습니다. 이러한 영광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광입니다.
마리안느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렛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들어와서 43년간 그들의 생애를 들여 한국의 병든 환자들과 가정들을 돌보았습니다. 아무리 환자들이 말려도 상처에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고 하며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환자들의 환부에 약을 직접 발라주며 간호와 봉사활동을 하며 그들의 젊음과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 당시 약품과 치료여건이 열악하였던 한국에서 그들은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약품과 지원금을 받아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200명 가까이 되는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들을 위해 영아원을 운영하며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70세가 넘었을 때 “나이가 들어 일을 잘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때는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말해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가 왔다.”는 편지를 남기고 조용히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43년전에 그곳에 올 때 가지고 왔던 낡은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든 채로 오스트리아로 고국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봉사하면서도 수백장의 감사장이나 공로패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 그들에게 주는 정부 훈장도 직접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을 찾아와서 주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들은 한 알의 밀알의 진리를 실천하였습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외국인으로서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외국인으로서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부족한 점이 있었으면 용서해 달라.”고 이별편지를 써 놓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땅에 떨어져 죽을 수 있었습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 민망하고 마음이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는 이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자신이 왜 이 땅에 왔는지 새롭게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앞세우심으로 자기 생명을 미워하셨습니다. 반대로 자기 생명을 앞세우는 것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기도로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기도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그러나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거룩한 열정이 생깁니다. 기도할 때 속사람이 강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납니다. 골로새서 2:14-1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동시에 이 세상의 주관자인 사탄이 축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됩니다. 이제 그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들리심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불신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함으로써 사탄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자들이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여기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제는 헬라인도, 한국인도, 중국인도, 일본인도, 미국인도, 영국인, 태국인, 우즈벡인도 다 포함됩니다. 말 그대로 온 세상 만민들이 한 사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로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죽는 예수님의 죽음은 이처럼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의 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고 섬기는 가운데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밀알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친히 그렇게 사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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