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년 요한복음 제 11 강(11:1-44) 부활과 생명
페이지 정보

본문
2010년 봄 학기 제 11강
본문 요한복음 11:1 - 44
요절 요한복음 11:25
부활과 생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오늘 말씀은 나사로가 병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육체가 병들어 죽게 될 때 그 고통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병들면 대신 병을 앓더라도 낫게 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고통 하는 것은 우리가 당하는 일상입니다. 또한 죽음도 일상적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 절망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을 주십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서 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를 집안의 기둥으로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들르셔서 식사도 하고 귀한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이때 마르다는 요리사와 같이 이것저것 맛있는 요리로 예수님을 섬기고자 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잃지 않으리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만 해도 좋다고 마르다를 격려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란하고 행복하던 집안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나사로가 운동을 하다가 무리를 했는지 몸살로 누워버렸습니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펄펄 끓는 듯 했습니다. 그러더니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으아, 으아, 으으으 ~ 다급해진 마르다와 마리아는 동네에서 달리기를 가장 잘한다는 사람 편에 소식을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예수님께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어떤 부담을 주거나 압력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오라비를 낫게 해 달라는 말도 없습니다. 속히 방문해 달라는 부탁도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요구를 하기보다 예수님의 사랑에 호소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강력하게 병들어 죽게 된 오라비를 살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주님의 권위와 능력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월권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과 능력, 지혜를 믿고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아뢰는 것이 성숙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전언을 듣고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 이 말은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아셨습니다. 나사로는 심부름꾼들이 베다니를 떠난 직후에 죽었습니다(17,39). 그러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뜻이 있는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나 이런 심각한 병을 보고 “죽을병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심각한 병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굉장히 긍정적이십니다. 예수님은 문제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심각한 문제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문제가 없는 때가 없습니다.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피로에 빠질 수도 있고 더 힘 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힘들 때 물러나면 안 됩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믿음으로 죽고자 힘을 다해서 투쟁하면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실력이 붙고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세 남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당장 달려가지 않은 것은 그들을 향한 아가페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당장은 마음이 아프고 섭섭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기 위해서 부활 신앙을 심어주고자 하셨습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땜빵식으로 사람을 돕지 아니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직장도, 결혼도, 집도 아니고 근본적으로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되 먼저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아이들에게 고기를 쥐어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신앙을 심기 위해서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따라서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십니다. 우리는 양들을 도울 때 꾸준히 일대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도록 일용할 양식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자립적인 신앙인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목자의 사랑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과 개인 신앙이 자라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사랑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섬겨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훈련하는 사랑은 더 큰 사랑입니다. 그들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도록 훈련하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편에서도 그렇고 받는 사람 편에서도 아픔이 따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을 때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스스로 일용할 양식과 주일 예배, 일대일 등 기본적인 훈련들을 새롭게 하는 가운데 더욱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1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라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빛이 없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지만 그들의 마음은 어두웠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꼼짝하기를 싫어하는 제자들을 두려워하는 유대인들이 있는 곳으로 함께 데려가십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한 선교사님은 선교지에서 007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배운 것은 007은 맡은 바 사명은 반드시 성취한다는 것과 그 사명을 완수하기 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완수합니다. 두려워하는 상황에 계속해서 직면하다보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시면서 그를 깨우려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잠을 자고 나면 몸이 회복되어 모든 것이 개운합니다. 그래서 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잠을 더 자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그들을 위하여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게 된 것으로 인해 기쁘셨습니다. 문제를 통해서 제자들이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믿음이 자라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내가 지금 당한 문제 앞에서 믿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도마는 이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면서 무슨 의사같이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이제 완전히 죽어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일찍 오셨다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면 오빠는 죽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섭섭한 마음, 회의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비록 나사로의 몸이 이미 썩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죽은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막연하지만 구해야 할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막연하게 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안다고 말했습니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나리라”며 합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의 상태가 우리 대부분의 상태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현재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물러나지 않고 다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마르다에게 강조합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지금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들이 육체적인 죽임을 당할지라도 다시 육체적인 부활로 살아나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체험하려면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나사로는 육신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살리십니다.
마르다는 오직 두 가지 생명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즉 이 땅에서의 육체적인 생명과 마지막 부활 때 경험하게 될 미래의 생명입니다. 미래적인 생명은 어떤 점에서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이고 막연한 개념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생각 속에 나사로는 지금 이 둘 중 어느 것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없이는 장래의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참된 생명, 육체적인 죽음 후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생명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죽음이 발생하는 것은 미래적인 사건인데, 그것이 현재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실은 현재적인 문제입니다. 사망은 죄의 결과로 생겨나게 된 우리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보편적인 사실이며 우리의 모든 꿈과 목적을 제약하는 최종적 영역입니다. 조만간에 모든 사람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사별의 충격과 그것이 미래에 드리우는 긴 그림자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더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활신앙의 능력은 벽제 화장터에 가면 가장 리얼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불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면 대조가 됩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밝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당한 죽음의 세력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세력을 능히 이기고 슬픔에 찬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죽음과 그로 인한 권세에 시달립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인 절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육신은 젊지만 실제 삶은 생기가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세력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은 먼 미래, 어느 추상적인 세상에서 일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이곳에서, 지금 부활과 생명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오늘 삶의 현장에서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절망적인 문제 앞에서도 소망을 갖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전도에 힘쓰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양성을 이루는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으면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합니다. 요 5: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27).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셔서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마르다는 믿는다고 말하였지만 무덤 앞에서는 그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돌을 옮겨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는 도우십니다. 4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순종으로 그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르다가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쌓였습니다.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죽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죽음의 권세 아래 무기력하고 허무하고 눌려 있는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주시며 살리십니다. 우리 가운데 영적으로 죽었다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현재적으로 믿고 무덤에서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11:1 - 44
요절 요한복음 11:25
부활과 생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오늘 말씀은 나사로가 병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육체가 병들어 죽게 될 때 그 고통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병들면 대신 병을 앓더라도 낫게 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고통 하는 것은 우리가 당하는 일상입니다. 또한 죽음도 일상적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 절망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을 주십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서 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를 집안의 기둥으로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들르셔서 식사도 하고 귀한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이때 마르다는 요리사와 같이 이것저것 맛있는 요리로 예수님을 섬기고자 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잃지 않으리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만 해도 좋다고 마르다를 격려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란하고 행복하던 집안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나사로가 운동을 하다가 무리를 했는지 몸살로 누워버렸습니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펄펄 끓는 듯 했습니다. 그러더니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으아, 으아, 으으으 ~ 다급해진 마르다와 마리아는 동네에서 달리기를 가장 잘한다는 사람 편에 소식을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예수님께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어떤 부담을 주거나 압력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오라비를 낫게 해 달라는 말도 없습니다. 속히 방문해 달라는 부탁도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요구를 하기보다 예수님의 사랑에 호소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강력하게 병들어 죽게 된 오라비를 살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주님의 권위와 능력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월권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과 능력, 지혜를 믿고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아뢰는 것이 성숙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전언을 듣고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 이 말은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아셨습니다. 나사로는 심부름꾼들이 베다니를 떠난 직후에 죽었습니다(17,39). 그러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뜻이 있는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나 이런 심각한 병을 보고 “죽을병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심각한 병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굉장히 긍정적이십니다. 예수님은 문제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심각한 문제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문제가 없는 때가 없습니다.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피로에 빠질 수도 있고 더 힘 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힘들 때 물러나면 안 됩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믿음으로 죽고자 힘을 다해서 투쟁하면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실력이 붙고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세 남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당장 달려가지 않은 것은 그들을 향한 아가페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당장은 마음이 아프고 섭섭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기 위해서 부활 신앙을 심어주고자 하셨습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땜빵식으로 사람을 돕지 아니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직장도, 결혼도, 집도 아니고 근본적으로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되 먼저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아이들에게 고기를 쥐어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신앙을 심기 위해서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따라서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십니다. 우리는 양들을 도울 때 꾸준히 일대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도록 일용할 양식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자립적인 신앙인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목자의 사랑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과 개인 신앙이 자라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사랑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섬겨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훈련하는 사랑은 더 큰 사랑입니다. 그들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도록 훈련하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편에서도 그렇고 받는 사람 편에서도 아픔이 따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을 때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스스로 일용할 양식과 주일 예배, 일대일 등 기본적인 훈련들을 새롭게 하는 가운데 더욱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1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라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빛이 없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지만 그들의 마음은 어두웠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꼼짝하기를 싫어하는 제자들을 두려워하는 유대인들이 있는 곳으로 함께 데려가십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한 선교사님은 선교지에서 007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배운 것은 007은 맡은 바 사명은 반드시 성취한다는 것과 그 사명을 완수하기 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완수합니다. 두려워하는 상황에 계속해서 직면하다보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시면서 그를 깨우려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잠을 자고 나면 몸이 회복되어 모든 것이 개운합니다. 그래서 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잠을 더 자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그들을 위하여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게 된 것으로 인해 기쁘셨습니다. 문제를 통해서 제자들이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믿음이 자라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내가 지금 당한 문제 앞에서 믿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도마는 이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면서 무슨 의사같이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이제 완전히 죽어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일찍 오셨다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면 오빠는 죽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섭섭한 마음, 회의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비록 나사로의 몸이 이미 썩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죽은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막연하지만 구해야 할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막연하게 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안다고 말했습니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나리라”며 합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의 상태가 우리 대부분의 상태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현재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물러나지 않고 다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마르다에게 강조합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지금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들이 육체적인 죽임을 당할지라도 다시 육체적인 부활로 살아나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체험하려면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나사로는 육신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살리십니다.
마르다는 오직 두 가지 생명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즉 이 땅에서의 육체적인 생명과 마지막 부활 때 경험하게 될 미래의 생명입니다. 미래적인 생명은 어떤 점에서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이고 막연한 개념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생각 속에 나사로는 지금 이 둘 중 어느 것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없이는 장래의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참된 생명, 육체적인 죽음 후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생명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죽음이 발생하는 것은 미래적인 사건인데, 그것이 현재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실은 현재적인 문제입니다. 사망은 죄의 결과로 생겨나게 된 우리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보편적인 사실이며 우리의 모든 꿈과 목적을 제약하는 최종적 영역입니다. 조만간에 모든 사람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사별의 충격과 그것이 미래에 드리우는 긴 그림자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더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활신앙의 능력은 벽제 화장터에 가면 가장 리얼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불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면 대조가 됩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밝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당한 죽음의 세력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세력을 능히 이기고 슬픔에 찬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죽음과 그로 인한 권세에 시달립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인 절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육신은 젊지만 실제 삶은 생기가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세력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은 먼 미래, 어느 추상적인 세상에서 일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이곳에서, 지금 부활과 생명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오늘 삶의 현장에서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절망적인 문제 앞에서도 소망을 갖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전도에 힘쓰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양성을 이루는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으면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합니다. 요 5: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27).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셔서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마르다는 믿는다고 말하였지만 무덤 앞에서는 그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돌을 옮겨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는 도우십니다. 4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순종으로 그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르다가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쌓였습니다.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죽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죽음의 권세 아래 무기력하고 허무하고 눌려 있는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주시며 살리십니다. 우리 가운데 영적으로 죽었다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현재적으로 믿고 무덤에서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2010_John11.hwp (0byte)
72회 다운로드 | DATE : 2010-06-06 15:39: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