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복음 2010년 요9강(9:1-12) 세상의 빛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896회 작성일 10-05-23 18:09

본문

2010년 봄 학기 요한복음 제 9강
본문 : 요한복음 9:1 - 12
요절 : 요한복음 9:5

세상의 빛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우리에게는 각자 운명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운명이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초인간적 위력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생각되는 길흉, 화복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돌봄 없이 자란 어린 시절로 인해서 사랑의 결핍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지만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훈육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몸이 허약한 것도 어린 시절 잘 먹지 못해서 생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일생 허약한 몸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에서는 일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하니 슬픕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자 애를 쓰지만 죄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죄짓는 자신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죄와 싸우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자신을 던져버립니다. 그런 삶은 얼마나 어둡습니까? 육적인 맹인이 있듯이 영적인 맹인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믿고 어두움에서 나와 밝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구걸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일생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는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둡습니다. 그의 생각 속에는 영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는 봄날 활짝 핀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태양 빛의 그 찬란함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얻는 정보의 90%가 눈을 통해서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백번 물어보는 것보다 한 번 보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영화 「블랙」에 보면 여주인공의 어린 시절의 삶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답답함과 고통이 어떠한지요? 그래서 소리를 지르고 감정대로 행하다보니 마치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부자 아빠를 두고 좋은 선생을 만나서 치료를 받고 대학 졸업장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이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그들의 질문 속에는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죄의 결과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출애굽기 34:7절에 보면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과대 해석하여 아버지가 잘못하는 바람에 자식이 병들었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한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종 질병에 대해서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거나 조상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병들어 고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있는 인생 실패자들이나 병든 자들이 모두 죗값을 치르는 것이라면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잘 살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일부 유대인들은 태아가 산모의 자궁 속에서 심각한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죄와 고통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당시 유대인들은 병이나 불행의 원인을 인과론적으로 보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바로 이런 인과론의 대표자들일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보면 질병과 죄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징벌로 병을 얻게 되고, 그래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과 질병으로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은 늘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우리의 모든 불행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우리의 제한적인 자원에 의존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질병을 포함한 모든 불행은 죄가 가져온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장애를 보는 시각이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이 항상 1대1로 상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죄를 지어서 그 결과로 고난 받는 것이 명백하면 회개를 권고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전혀 다른 렌즈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렌즈로 보십니까?

  3절을 보면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의 원인을 죄로 보지 않으십니다. 현재의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불행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일들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가 장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즉 그의 장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치유의 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그 불행의 원인을 따지는 것보다 그 불행을 없애는 일이 더 중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언급하기보다는 치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장애조차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애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위장된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억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의 죄인가 따지기 시작하면 시간만 갑니다. 사실 이 맹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지 제자들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맹인은 침묵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말이 많습니다. 원래 주인공은 말이 없고 구경꾼들이 말이 많은 법입니다. 고난을 받는 당사자는 침묵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우리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누구의 죄인가 따지지 시작합니다. 남편의 죄인가, 아내의 죄인가, 스탭 목자의 죄인가, 평신도의 죄인가, 학생들의 죄인가, 시대의 문제가 물질주의, 개인주의, 쾌락주의라며 문제의 원인을 따지다 보면 시간이 잘 갑니다. 이렇게 입만 움직이고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시면서 그의 인생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과거 지향적이고 예수님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제자들은 부정적인데 예수님은 긍정적입니다. 제자들은 어두운데 예수님의 마음은 밝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 대해서 선한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 사람이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에베소서 2:10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레이시(M. Lacy)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허리가 50도 정도로 구부러지는 척추만곡증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런대로 잘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허리가 구부러진 것에 익숙해 왔으므로 특별히 이로 인한 불편함이나 아쉬움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척추만곡증에 걸리게 되었는가? 왜 남들은 똑바로 서서 걸어다니는데 나만이 이렇게 구부러져 있는가?’ 그의 몸은 어디를 가나 웃음거리요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아픔과 슬픔을 보면서 그에 대해 논쟁이나 즐기고 있는 그들을 볼 때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목사님께서 심방을 오셨습니다. 잠시 후에 또 다시 그가 대화의 대상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 제가 죄가 많은가 봐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레이시는 순간적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의 비참함이 왜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그는 순간적으로 온몸을 망치로 얻어 맞은 듯 멍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의 이 비참함이 무엇을 위한 것이라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라니?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나의 인생에도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무엇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 어떤 뜻을 두셨다는 말인가?’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순수한 눈물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척추만곡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누가 언제 행해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불행을 없애고 행복을 주는 일입니다. 질병을 없애고 건강을 주는 일입니다. 운명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일입니다. 그 일들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누가 해야 합니까?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밤이 오면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낮에만 일을 할 수 있고 밤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낮에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데 여유를 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성령을 보내사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각장애인의 치유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제자들이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불행의 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제한된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한 번  우리가 생명을 가진 이 세상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한가하게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을 때, 기회가 왔을 때 일해야 합니다. 또는 기회를 만들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흰머리를 휘날리면서 캠퍼스 선교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자의식이 생겨서 캠퍼스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오를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도 기회입니다. 몸이 아프고 쇠하면 캠퍼스에 오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캠퍼스 선교를 중심으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연령층이 넓어졌지만 학생들이 우리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과 장년층도 캠퍼스 선교를 향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2세들이 크는 것은 금방입니다. 이들이 캠퍼스의 주인들이 되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불행의 원인을 따질 시간에 시각장애인의 치유를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 전에 먼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자신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십니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은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어둠과 절망을 몰아내는 희망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이 사람의 어둠과 절망을 없애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위해서 거창한 수술 도구와 시설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흔한 침과 진흙을 이겨서 일하셨습니다. 침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아스팔트로 덮인 서울에서 진흙은 찾기가 쉽지 않지만 당시는 밟히는 것이 흙이었습니다. 우리는 없는 것을 찾지 말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런데 ‘바르다’는 단어가 기름을 바를 때 쓰는 단어와 같습니다(anointed). 이는 성령의 기름을 바르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는 것은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또 주님께서 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쓰신 재료들을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과거에 믿음의 영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지금 그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9:4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습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신앙의 영웅들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우리는 죽은 영웅들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역자, 지금 내 곁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위인들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흙과 기도의 침을 이겨서 성령님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맹인의 눈에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바르셨을까요?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흙을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현장에서 치유하지 않으시고 실로암 못으로 보낸 일은 예상 밖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그 사역의 성격을 설명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순종을 원하십니다. “실로암”은 ‘보내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실로암’의 말뜻을 설명함으로써 예수님의 숨은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실로암으로 그 사람을 ‘보내십니다.’ “실로암 못”은 바위를 판 못으로 예루살렘에 건설된 큰 산등성이 남쪽 끝에 위치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개발한 주요 급수 시스템이 일부를 이루었습니다. 올해 제가 그곳에 갔을 때는 물이 얼마 없었습니다.

  이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성전부터 실로암 연못까지의 거리는 2Km 정도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실로암 못에서 씻을 때 시력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보냄 받은 자’ 즉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즉 진흙이나 연못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눈을 뜨게 해 준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일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사람의 순종입니다. 운명의 극복은 순종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역사하려면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순종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인간의 불행, 어려움, 아픔, 질병 등의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가능합니다. 순종을 통해서 운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실로암 못으로 보내신 사실은 요단강에서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나은 사건과 비교됩니다(왕하 5:1-14).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병을 고쳐주는 자가 병 고침을 받아야 되는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생명역사를 창조합니다.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의미도 바로 이 점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변화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어떤 운명적인 요소가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잘 변화되지 않는 성품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자신, 분노하는 자신, 낮은 자존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내면적인 성찰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인 눈을 뜨고 자기의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성령의 능력과 말씀에 순종함으로 해결 받아야 합니다. 나쁜 성품들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운명과 충돌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운명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말씀의 진흙을 기도로 이겨서 마음의 눈에 발라 순종하는 가운데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순종을 축복해 주사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운명적인 병들을 치유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55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