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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요한복음 8강(7:53-8:12) 용서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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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마가
댓글 0건 조회 2,059회 작성일 10-05-16 15:58

본문

2010년 요한복음 8강

용서의 은총

말씀; 요한복음 7:53 - 8:12
요절;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는 17세기 중엽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는 간통녀임을 나타내는 A(Adultery)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녀는 간통죄로 인해 평생 가슴에 이 글자를 달고 살도록 선고 받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에게도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 상대였던 성직자 딤스데일은 그의 설교로 날이 갈수록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지만 깊은 정죄감에 고통당합니다. 한편 이 사실을 알게 된 전 남편 틸링워드는 집요하게 딤스데일의 죄의식을 고소하는 역할을 합니다. 7년의 세월 후 목사는 교수대로 올라가더니,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신의 가슴을 헤쳐 보입니다. 그의 가슴에도 자신의 죄를 상징하는 A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습니다. 이 작품에는 17세기 미국의 준엄한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죄의식으로 고통하는 인간 영혼의 문제가 깊이 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죄가 드러난 여인은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공동사회의 모범적인 여성, 강인한 여성으로 살아가지만, 죄를 감춘 채 존경받으며 이중생활하는 성직자는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고 죄책감으로 마음의 병을 앓으며 죽을 때까지 고통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죄와 용서의 문제는 우리 삶에서,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정죄와 용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죄받아 마땅한 한 여인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용서의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어둠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초막절 명절이 끝나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집 대신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이곳에서 쉬셨다고 했습니다.(행 1:12, 눅 21:37) 아침 일찍(At dawn) 예수님은 다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백성들이 다 나아오자 예수님은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은혜로운 아침 말씀잔치가 열렸습니다.
       
이 때 갑자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여럿이 소란스럽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한 여인을 잡아 끌어 오고 있었습니다. 끌려 온 그 여자는 사람들 한가운데 세워졌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간음죄(특히 결혼한 남녀의)에 대해 엄히 정죄하셨습니다. 그 죄인을 돌로 쳐서 죽이므로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라고 명하셨습니다.(레 20:10, 신 22:22-24) 십계명의 제 7계명에도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음죄에 대해 왜 이렇게 분명하게 정죄하셨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풍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서구와 다르지 않은 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살려는 이들이 도리어 시대에 뒤쳐진 취급을 받고 천연기념물이니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간음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할까요? 창세기의 요셉을 생각해 봅시다. 요셉은 소위 꽃남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반해 주인 보디발의 아내는 계속 그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은 한치의 흔들림 없이 끈질긴 죄의 유혹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주인의 아내와 간음하는 것을 주인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또는 배반하는 것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가 그렇지만, 간음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잠6:32)라고 말씀했습니다. 고전 6:18에서는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히 13:4에서는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를 좇아야 하겠습니다.(딤후2:22)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여인을 잡아 온 것은 율법을 따르고 이스라엘을 악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올바른 동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를 고발하여 없애고자 하는 미움과 시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제물에 불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독기서린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않으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더욱 의기양양하여 다그쳐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이 말씀은 먼저는 여인,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무리들에게까지 조용하지만 천둥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돌로 치라 하시므로 여인의 죄와 그 형벌을 인정하셨습니다. 즉 여인이 돌에 맞아 죽을 만한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니까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행위로 옮겨지는 간음만 간음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음욕까지 넓은 의미의 간음이라고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즉 죄를 지은 이 여인은 정죄받아 마땅하지만 죄 없는 자만이 여인을 정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같은 죄인인 너희는 이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돌을 들고 여인에게 던질 태세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수군댔을 것입니다. “저런 음탕한 년은 죽어 마땅해 예수님도 저런 저질은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그들은 여인을 정죄하느라 자기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드러난 죄인이고 그들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일 뿐입니다.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것보다 남의 단점과 잘못이 더 잘 보이고 그것을 더 잘 지적합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는 마음, 정죄의 심령이 가득할 때,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합니다. 또 이런 사람은 사랑의 공동체를 깨트리는 역할을 하기 쉽습니다. 혹시 당신의 손에 정죄의 돌이 쥐어져 있습니까? 자신은 의로운데 정죄하는 그 사람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시간 정죄의 돌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죄의 권한 대신에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II.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 사람들은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성전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적어도 양심은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죄로 인해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버팁니다. 결국 성전에는 예수님과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인은 예수님 앞에 홀로 남아 서 있습니다. 여인을 정죄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앞에 단독자로 서 있습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용서의 음성입니다. 여인을 정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 여인이 누구입니까? 이 여인은 당연히 정죄 받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에는 죽음이 따른다.’는 진리의 예로 삼아야 하는 범죄자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 계셨다면 그렇게 되었을 운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 정죄의 돌을 던지지 않으시고 용서의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그녀에게 새로운 삶, 제 2의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리고 왜 이 여인을 용서하실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내비둬” 그럼 예수님도 ‘네가 어쩌다 실수로 그랬겠지. 이번 한번만 눈감아 준다.’ 하신 걸까요?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이 여인은 왜 특별히 용서해 주셨습니까? 거룩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추악한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의 추함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고민을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믿습니다. 벧전 2:24은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힘들게 오르셨을 때, 이 여인의 죄도 함께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벌거벗겨 조롱 당하실 때, 이 여인의 수치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대못에 손과 발이 찢기고 붉은 피를 뚝뚝 흘리실 때, 이 여인이 마땅히 받아야 했던 죄의 대가가 치러졌습니다. 여인이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받아야 했던 정죄와 버림받음, 분노와 심판이 고스란히 예수님께 쏟아 부어졌습니다. 여인에게 베푸신 용서의 은총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의 피와 자신의 죽음으로 맞바꾼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죄 범한 여인이 값없이 은혜로 받은 용서의 가치입니다.

‘정죄와 용서’, 이는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그리고 사람에게 정죄와 용서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중요한 만큼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셨을 때 모두가, 예외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이며 허물덩어리이기 때문에 아무도 정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근대의 저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는 책에서 인간 존재는 세가지 근본적 불안 앞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간파한대로 우리는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죄의식과 정죄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죄사함의 은혜를 갈구하게 되고 십자가 아래 나아가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고 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사역입니다.(요16:8) 죄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가 회개함으로 새롭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를 더욱 간절하게 만들고, 죄를 미워하게 하며, 열심 있게 만들어 줍니다.(고후 7:11)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죄의식은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정죄의식으로 인해 우리는 무기력해 집니다. 자신이 부정하고 무능하며 쓸모 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어울리며 교재를 나누지 못하게 합니다. 그가 나를 정죄하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죄의식에 시달리는 사람이 주의 진리 안에 있는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건강한 열정을 갖고 교회와 사명을 섬길 수 있을까요? 정죄의식은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리 존재를 불안하게 하고, 눌리게 하며, 부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성 문제를 겪게 만듭니다. 정죄에 시달리는 것은 고소자 마귀의 짓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정죄의식에 시달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어떤 정죄감이 있습니까? 새벽기도를 잘 못한다는 정죄감, 역사를 잘 못 섬기고 양을 못친다는 정죄감,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에게 잘 못해준다는 정죄감,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에 넘어진 뒤 오는 정죄감, 감정대로 화를 낸 뒤의 불의감 등. 우리는 크고 작은 여러 정죄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죄의식을 어떻게 떨쳐버리고 용서의 은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정죄감을 붙들고 있지 말고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본문의 여인은 비록 타인에 의해서지만 자신의 죄가 숨김없이 예수님께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게 된 여인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는 어둠입니다. 어둠의 속성은 빛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고백되고 드러나지 않으면 놀라운 용서의 은총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1:8,9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진실되이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정죄감을 붙들고 있을 때 무슨 유익이 있었나요? 그것을 붙들고 있다고 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해가 될 뿐입니다. 지체하지 말고 우리는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죄의식에 시달리면서도 왜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까? 그것은 용서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Therefore, there is now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왜 여기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까?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하고 그 은혜를 누리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를 믿고 회개하므로 정죄의식에서 자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의 용서를 은혜로 받은 여인이 돌아가서 전과 같이 죄를 짓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여인의 상태는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될 것이고 사단의 다스림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는 예수님이 주신 크신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인은 탕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용서를 받은 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이 말씀은 용서의 은총을 값싸게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해줍니다. 용서의 은혜는 내가 필요할 때마다 뽑아서 쓰는 티슈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죄사함을 주시는 목적은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따르게 하려 하심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더 이상 어둠에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으로 부르셨습니다. 여인 자신의 의지와 성실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어둠을 이기고 빛 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십자가에서 내 대신 정죄를 받으시므로 값없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주님, 또한 세상의 빛되신 주님을 따르도록 삶의 방향을 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죄짐을 내려놓고 자유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둠에 다니지 않고 빛되신 주님을 따르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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