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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요7강(7:25-52) 생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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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781회 작성일 10-05-0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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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학기 요한복음 제 7강
말씀 요한복음 7:25 - 52
요절 요한복음 7:38

생수의 강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초막절 끝 날에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의 초청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오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오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목마름을 느낍니다. 마치 우물이 있지만 근원이 말라버린 것 같습니다. 강바닥이 마른 것 같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하고 다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면서 그냥 다닙니다. 기도를 해도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거듭남이 무엇인지, 구원받은 자의 기쁨이 무엇인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삽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제가 캠퍼스에서 만난 한 학생의 모습이 이러했는데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의 초청은 당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이 이루어진 날은 명절 끝날 인데 초막절 끝날을 말합니다.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들이 올리브와 포도와 같은 농작물을 거두어들이고 나서 칠일 동안 지키는데 이때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절기에는 자녀들과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겼습니다. 특별히 이때는 축제에 참여하는 자들이 잎이 무성한 가지들로 직접 만든 천막에서 야영을 했습니다. 텐트 즉 천막은 옥상이나 집 주위, 들판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도 실감나게 이 말씀을 체험해 보려면 지금 월드컵 경기장 근처에 있는 난지 공원 캠핑장에서 야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텐트에서 야영을 할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 중에 물을 주심을 감사하는 것과 그 해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비를 간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할 때 백성들이 목이 말라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가 반석을 향해서 명령을 내렸을 때 반석에서 물이 나와 백성들이 생수를 마셨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실로암 못에서 떠온 물을 대제사장이 성전 뜰에 있는 바위에 부었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흘러내릴 때에 백성들은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온 것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여인의 뜰에 세워진 거대한 가지가 달린 촛대들의 불빛 밑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축하를 하였습니다. 다음 주가 홍대 축제 기간인데 아마 그 이상으로 흥청거렸을 것입니다. 초막절 행사에서 칠일 간만 물을 붓고 팔일 째는 붓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팔일에는 이러한 의식을 전혀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거룩한 성회를 회집하여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물의 의식이 없는 날, 즉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제단에서 희생제물이 바쳐지는 바로 그 날, 예수님께서 모집된 회중을 향해서 외치셨습니다.

  37,38절을 다시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우리가 사마리아 여인을 공부하면서 생각해 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돈에 목이 마릅니다. 패션에 목이 마릅니다. 사람들의 인정에 목이 마릅니다. 지식에 목이 마릅니다. 성공에 목이 마릅니다. 사랑에 목이 마릅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것으로는 우리의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목마름으로 인해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지 전에 목이 말랐습니다. 허무로 인해서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무엇을 열심히 해도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런 뻥 뚫린 가슴이 사라지고 생명의 충만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답답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시원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입니다. 막연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산 사람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말이 많은 것은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 같지만 또 다르기 때문에 말이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사십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생수의 강이라고 부릅니다.

  누구든지 목이 마르거든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온다는 것은 중간태로서 하나님께서 이끄셔야 하고 또 내가 결단을 하고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받고자 와야 합니다. 와서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목마른 자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 44:3, 슥 14:8, 겔 47장). 이 말씀은 에스겔의 예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동쪽을 향한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물은 아라바 방향으로 내려가서 사해 바다를 살리고, 그 물이 도달하는 곳마다 생물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를 보았습니다. 더욱이 그 자신은 친히 천사의 인도를 받아 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에스겔의 발목까지 찼던 물이 나중에는 너무나 많이 흘러나와서 더 이상 건너지 못할 정도로 큰 강을 이루었습니다(겔 47:1-9). 요한계시록 21장 말씀대로 생수의 강 양쪽에 열두 나무가 자라며 달마다 새로운 과실을 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납니다. 그 배는 예수님의 배를 가리킵니다. 생수의 강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넘쳐납니다. 그러나 37절과 38절이 바로 연결되면 그 배는 예수님을 믿는 자의 배를 가리킵니다. 한글 성경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경들이 이 해석을 취하고 있습니다. “배”는 신체의 일부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히브리어에서는 ‘사람의 인격의 심연 또는 내면의 마음’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배란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생명수의 근원이시오 제공자란 사실입니다. 이 생명수는 그것을 받아 마시는 자의 속에서 영생에 도달하기까지 끝없이 솟아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시며,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은 물 근원이십니다. 즉 이 말씀은 겔 47장과 슥 14장의 성취로서, 예수님께서 성전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에서 나오리라고 약속된 물을 예수님 자신이 제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기능을 완전히 대치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 약속된 종말적인 성전의 성취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마지막 날 물을 나르는 의식이 진행될 때 예수님은 지금까지 상징으로 보였던 것이 드디어 현실로 도래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물 공급자로 제시한 것은 자신이 초막절의 영원한 완성임을 보여줍니다. 초막절의 상징이 가리키는 새로운 시대가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둘째,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목이 마릅니다. 이성에 목말라 하고, 사랑에 목말라 하고, 쾌락과 돈에 목말라 합니다. 아무리 퍼 먹고 마셔도 족함을 모르고 목말라 합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사람이 만든 종교는 결코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생수만이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만족이 있으니 말이 많아지고 웃음꽃이 만발합니다. 인상을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생수의 강이 그 배에 흐르는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영혼의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그 삶이 늘 푸르릅니다. 다들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어떤 사람은 얼굴에 빛이 있고 찬양이 그 입에 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고 병들어도 위축되지 않으며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고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사람은 남들이 볼 때 약간 미친 것 같기도 합니다. 가진 것이 없는데도 즐겁고 기쁘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하여 결국 열매를 맺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 풍성한 생명을 주게 됩니다. 남에게 얻으려던 자가 이제는 남에게 주게 되고, 필요한 것을 도와주며 공급해줍니다. 그가 남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은 자기 것이 넘쳐서가 아닙니다. 안드레와 같은 심정과 믿음이 있고 주님께서 공급하심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피곤을 느끼지 아니하는 풍성함이 있게 됩니다. 은혜를 남에게 끼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타인에게까지 미치는 사람이 됩니다. 결국 이 물은 그 사람에게만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즉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영향을 끼치려면 흘러 넘쳐야 합니다. 졸졸 흐르면 영향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홍수와 같이 콸콸 흘러넘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생수는 누구에 관한 말씀입니까? 39a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생수의 강들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로 가서 마시는 자,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령님의 풍성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님의 풍성함을 통해서 더 이상 목마르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갈증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메마른 사람, 메마른 가정, 메마른 캠퍼스, 메마른 사회에 생명을 넘치도록 주는 통로가 됩니다.

  이 성령님은 언제 어떻게 임하십니까? 39b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기서 영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사 오순절에 믿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담대하게 외국어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요엘 선지자를 통한 예언이 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자기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세계에 흩어져 거룩한 백성이요 복음 전도자요, 제자 양성가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계속해서 우리의 배에서 성령의 생수가 흐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변함없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현재 문제 앞에서 역동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의 꿈과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은 하버드 대학을 나왔지만 몽골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는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더 내려놓음」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고자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아닌 것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에서 돌이키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교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더 깊이 예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특히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계속해서 흐르게 됩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 배에 흐를 때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강물이 흐르게 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의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신앙이 자란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온전하게 하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각종 다양한 은사를 우리 각자에게 그 뜻대로 부어 주십니다. 은사가 없는 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찾아서 은사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가 있어서 성경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전도를 해야 하지만 어떤 분은 전도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 분은 전도하는 것을 부담 없이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찬양의 은사가 있습니다. 찬양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배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어떤 분들은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기도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영분별의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훈련하는데 탁월합니다. 가르치는 은사도 있습니다. 정베드로 목자님은 명강사가 되는 소원이 있는데 가르치는 은사를 넘치게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분은 지도력의 은사가 있습니다. 긍휼의 은사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사 교회를 성숙하게 하는데 이 한 몸을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생수의 강은 정결하게 하는데 가장 많이 쓰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거룩함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삽니다. 경건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온전한 분이십니다.

  물이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물은 모든 식물과 동물들의 생활에도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물이 공급되자 앙상하던 나무 가지들에 싹이 나고 잎이 나와 자라고 있습니다. 꽃들은 그 화려함을 자랑하듯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물은 생명수입니다. 성령님이야말로 생명수이십니다. 이 생명수를 마시는 자마다 꽃과 같이 아름답게 그 인생을 꽃피웁니다. 푸른 나무와 같이 자라 그늘을 만들고 열매를 남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립니다. 더 나아가 그 생명이 흘러넘쳐 메마른 대지를 살아나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복이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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