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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요6강(6:1-15) 원대로 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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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649회 작성일 10-05-0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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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학기 제 6강
말씀 요한복음 6:1 - 15
요절 요한복음 6:11

원대로 주신 분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목동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수많은 신앙인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38년 된 병자와 굶주린 5000명의 육적인 필요도 채워주십니다. 인간의 행복은 영적, 육적인 필요가 다 채워질 때 오는 것입니다. 목자 예수님은 그의 양인 우리가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도록 일하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마음도 넉넉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변은 자연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휴양을 하기에 좋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당한 휴식을 취할 때 능률적이고 창조적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번 달에 그런 기회를 가정교회별로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자 큰 무리가 따라나섰습니다.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아서입니다. 그들은 어떤 영적 소원을 가지고 따랐다기보다는 호기심을 가지고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어떤 이적을 행하실까 기대감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대 이동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도 좋고 성실하고 가능성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양 무리들의 목자요 영적인 지도자로 자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가 목자로서 양들의 필요를 알고 예수님과 함께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의 배고픔을 잘 아셨습니다. 대개 나와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는 민감하기 쉬운데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에는 둔감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자로서 큰 무리를 먹일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넓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대 목자로 자라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홍익대학을 오르내리는 만 명의 학생들을 볼 때마다 이들을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먹이라고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빌립에게 묻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해결책을 강구하는 식의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얻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빌립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동참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복음 역사는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행하시고 우리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잘 살피고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것은 목사가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이 원하는 것을 알고 주님이 움직이시는 방향으로 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고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십니다. 이 시험은 그를 훈련하고 키우기 위한 것이지 괴롭히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가를 알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빌립이 가진 목자로서의 자질, 능력, 심정 등을 알아보고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빌립이 이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 이것도 가져오고 저것도 가져오고 하는 어떤 행위적인 방법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과연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를 시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는 믿는 것입니다(6:29).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태산을 옮겨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능력입니다. 죠지 뮬러는 믿음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브리스톨에서 고아들의 참상을 보았습니다. 당시 고아들을 수용하고 있는 구빈원의 실상은 아이들이 먹지 못해 해골처럼 말라있거나 병이 들어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엄마, 엄마! 울다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기진하여 쓰러져 있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들이었습니다. 죠지 뮐러는 구빈원의 아이들로 인해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설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반대는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브리스톨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중이었고 처음에는 학교를 운영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볼 많은 물질이 없었습니다. 동역자들은 “학교를 세우면 공부만 가르치면 되지만 고아원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공부도 가르쳐야 하므로 많은 물질이 필요한데 어디서 물질을 얻습니까?”하며 그를 매몰차게 몰아 세웠습니다. 특별히 헨리 크리익 목사님은 이런 충고를 주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면 뭐든지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리하게 기도한다면 분명 하나님을 놀리는 일이에요.” “현실을 보고 언제나 가능한 것만 선택해 기도하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어요.” 죠지 뮐러는 고아원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맥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오직 믿음으로 고아원을 개척했던 프랑케 전기를 읽고 용기를 다시금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조용히 고아원 설립을 위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그의 아들이 가슴과 목에 유행성 염증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더욱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대신 고아들을 살려 그들을 내 자식처럼 키우고자 하는 결심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고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 가운데 우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빈민가 브리스톨에 고아원이 세워지기를, 주님이 원하심을 믿습니다. 제가 고아원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아무래도 1천파운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빈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뜻을 받아주신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죠지 뮐러는 내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81편 10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말씀을 묵상하다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힘을 덧입고 혼자 조용히 부르짖는 기도를 계속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고아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 마음 가운데 불러 일으켜 주신 소원임을 믿습니다. 이 소원을 이루어야할 장본인은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직 당신의 종으로만 일할 뿐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옵소서”하며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고아원설립을 위해 바자회나 모금운동을 하자고 제안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원하는 사람들의 성금과 성물로만 이일을 하고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기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드디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0파운드를 가져온 부인을 필두로 일생을 벌어 모은 100파운드의 돈을 가져온 부인도 있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부엌 용품, 큰대야, 주전자, 음료수 컵, 반찬담는 그릇 등 많은 그릇과 용구들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가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2000명을 먹이는 고아원을 일생 운영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것도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품고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5000명을 먹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빌립은 주님의 마음을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없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쪼그라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의 일만 생각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친히 먹이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외형적인 방법론에 말려든 것입니다. 그는 큰 숫자에 지배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해야 할 일 앞에서 계산만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빌립을 통해서 경고를 받고 안드레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안드레는 어떤 시도를 했습니까? 그는 예수님께 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 것도 아니고 어린 아이의 것을 가리키며 이 애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가지고 아이 것을 뺏어 먹자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의 행동은 참 유치해 보입니다. 그는 아이의 것을 가지고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며 쑥스러운 듯이 말합니다. 그는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을 위해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이 작은 것에서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그 애를 설득하여 예수님께 드리도록 했습니다. 자기에게 없다고 낙담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찾았고 드디어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심정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뭐라도 해 보고자 시도합니다. 빌립이 머리만 돌리고 있을 때, 안드레는 손발을 움직여 뭔가를 찾아 다녔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머리만 돌리는 사람에게는 자꾸 없는 것만 생각나고,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심정을 가지고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오병이어도 눈에 띄고, 가능성도 보이는 법입니다.

  안드레는 어찌하든지 큰 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했습니다. 오병이어가 작은 것이지만 주님께 드리면 그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능성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굶주린 무리를 먹이는 위대한 일을 시도했습니다. 기적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좀 부족한 것 같지만 심정이 있는 사람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숫자에 지배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무리라는 숫자와 보리떡 다섯 개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비교는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합니다. ‘무엇에 비해서’라는 수사가 동원되는 순간 삶의 리듬은 헝클어지고 내 목표는 초라해지거나 허황돼 보이기 시작합니다. 딱 한 가지, 비교해도 좋은 것이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기도 하고 성장이라고도 말합니다. ‘비교’는 자신의 발전과 성장에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안드레는 비교하는 대신에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확실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 말을 볼 때 안드레 역시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현실과 예수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아이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빌립과 차이가 없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빌립보다 조금 더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많은 것, 큰 것만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적은 것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적은 것을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적은 것일지라도 받으시고 쓰십니다. 이렇게 하셔야만 당신의 영광이 더욱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미성숙한 믿음, 적은 믿음, 연약한 믿음을 받으셨습니다. 큰 믿음, 엄청난 믿음, 성숙한 믿음만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작은 믿음 앞에서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크든 작든 생명력이 있으면 역사합니다. 이 ‘작은 믿음’은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믿음’으로 발전했습니다. ‘작은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안드레의 믿음이 완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숙한 것도 아닙니다. 아직 어리고 연약하고 작고 보잘 것 없는 믿음입니다. 마치 보리떡 다섯 개 같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안드레의 작은 믿음을 주님은 받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믿음으로 최선의 것을 드리면 주님은 그것으로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에게서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앉히도록 하셨습니다. 오십 명씩, 백 명씩 앉히는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곳에 잔디가 많기 때문에 초장 위에 있는 양들과 같이 모두가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11). 원대로 주시는 주님은 풍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안에서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말린 물고기 두 마리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이것을 받으시고 축사하실 때 오천 명이 원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4:19절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리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근원적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큰 무리가 배부른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제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았다고 해서 귀한 줄을 모르고 낭비하면 그 축복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남은 것을 거두는 가운데 주님께서 얼마나 풍족하게 주셨는가를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때 궁핍한 때에도 믿음을 지키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그 선지자’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으킬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말합니다(신 18:15-19). 즉 메시아를 말합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강제로서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15a). 그들의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세상적인 의미의 왕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는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빵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밥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뷔페를 먹어도 그때뿐 이튿날이 되면 역시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  인간에게 빵 문제는 생존을 위한 기본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타락 이후의 자연환경은 더 이상 그 요건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씨족과 부족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배부르고 등을 따뜻하게 해줄 인물을 그들의 지도자와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처사는 지극히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도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자신이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적인 죽음을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께 빵의 메시아가 되도록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최고 가치를 자아실현이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 뜻을 성취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취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빵문제가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런 문제는 계속해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알고 원대로 채우시는 풍성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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