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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요5강(5:1-18) 돕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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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642회 작성일 10-04-25 14:14

본문

2010년 요한복음 제 5 강
본문 요한복음 5:1 - 18
요절 요한복음 5:8

돕는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누가 진정 여러분을 돕는 자 입니까? 대개는 아내나 남편, 아버지, 어머님이시지요? 때로는 형제자매, 목자님, 선교사님, 동역자들, 친척, 의사, 친구, 교수님 등등 여러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때, 절망적일 때 누가 진정 우리의 도움이요 힘이 되겠습니까? 이 시간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어떻게 도와주셨는지 배우는 가운데 주님의 도움을 우리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명절이면 사람들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축제를 즐기며 들뜨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절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었습니다. 명절의 의미가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누워있는 이곳은 특수한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명절을 함께 즐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밀린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한 가지 희망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망 중에도 희망을 안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 희망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희망은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긍휼의 집이라는 베데스다 연못은 천사가 가끔 내려온다는 것과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 한 사람만이 낫는다는 제한이 있었습니다. 확정되지 않은 어떤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얼마나 막연합니까? 천사가 내려오는 것은 천사 맘이기 때문에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환자들은 이 막연한 기대에 희망을 걸고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마치 로또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당첨될 가망성은 낮지만 희망을 갖고 살기 위해서 복권이라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움직이는 것도 막연한데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나음을 받게 됩니다. 오직 일등만 나음을 받는 것입니다. 2등은 기억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이것을 볼 때 긍휼의 집인데 경쟁으로 인해서 실패와 좌절을 많이 겪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서 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CEO중 한 명인 윤종영부회장은 늘 긴장하여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중압감이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즐겁게 경쟁할 수 있다면 성취감이 클 것입니다. 자기가 전력질주하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의 즐거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경쟁 사회에서도 동병상련을 느끼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움직일 때 양보라는 미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때는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생각이 모두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넘어진 자를 잔인하게 짓밟고 나아가게 됩니다. 일반 사회에서 밀리고 밀린 사람들이 또 다른 경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화장터가 부족해서 죽어서도 경쟁해야 한다고 합니다. 경쟁의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선의의 경쟁이란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사람들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이고 그 삶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는 끊임없이 경쟁해 왔지만 김연아는 경쟁을 즐기고 어떤 점에서는 초연한 면이 있기 때문에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올림픽에서 승리한 이후에 유럽에서는 졌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사람이 실패를 경험한 이후에 승리를 체험하면 실패감이 만회가 됩니다. 그러나 승리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본문에 나온 사람은 38년 동안 병자로 있었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패배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경쟁에서 밀리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자신은 본래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가 누워있는 자리는 그의 분신과 같았습니다. 파파로티가 손수건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같이 그는 자리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워있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오래 누워있으면 허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38년 동안 누워있었던 이 사람에게는 사치스러운 말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야심도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현실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열등감에 찌들고 찌들어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과 고뇌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게 찾아가셨고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도 각자 고질적인 병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죄로 인해서 깊은 내면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과 상처와 기분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당연한 질문을 예수님은 왜 하셨을까요? 그에게는 그 질문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다보니 낫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린 채 그냥 누워 지내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원하지 않았지만 계속 누워있는 것이 이제는 더 편안하게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이 아직도 계속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그에게는 낫고자 하는 소원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포자기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치료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깊이 병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낫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소원이 강렬할수록 행동이 분명해 집니다. 소원이 강하면 열정이 생깁니다. 소원이 있어야 약도 잘 듣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강력한 소원을 갖도록 격려합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시37:4).” 이를 볼 때 소원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이 아직까지 병을 치료하지 못한 문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빠른 것, 기회를 잘 잡는 것, 자기보다 잘 난 것을 봐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 원망, 피해의식, 쓴 뿌리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물이 동하면 자기를 연못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세계에 갇혀서 한계적인 방법으로 치유를 받고자 하지만 이는 거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는 자력구원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밖에서 누군가 그를 구원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도와주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아래로부터 위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 이 말씀은 이미 내가 너를 치료했다. 그러니 너는 일어나 걸어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신의 무능력을 탄식하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의 명령은 어쩌면 놀리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육체적인 병처럼 나약해진 그의 소원에 도전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운명에 스스로 잡혀가는 그 병자에게 적극적 행동의 가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제까지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보통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치료할 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13). 예수님은 이 사람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그 능력을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치료의 능력을 베푸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예수님은 왕의 신하와 같이 우리가 간청하기를 원하십니다(4:47). 때로는 예수님께서 역사하시기 전에 믿음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나 우리의 허락이나 심지어 우리의 믿음도 필요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능력과 은총을 드러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연못에서 발견한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굳이 믿음 없는 이 사람을 택하여 치유한 사건을 통해 계시하고자 하신 것도 바로 이점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겉으로 볼 때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릴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님 자신이 참으로 돕는 분이십니다. 만일 베데스다 연못이 실제로 치료하는 능력의 도구였다면, 예수님께서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연못 속으로 들어가도록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연못의 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연못에 요행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어디서 인생의 고질적인 병을 치료받고자 합니까? 아픈 상처를 어디서 치유하고자 합니까? 의사와 약의 도움을 받습니다. 상담사의 치료도 받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치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본질문제인 죄를 어디에서 해결하려고 합니까? 어떤 이들은 말로는 낫고 싶다고 하지만 실은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죽지 못하여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항간의 미신에서 치료받고자 합니다. 혹은 기약 없는 요행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생 ‘대박’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과연 인생의 ‘대박’을 실현할 수 있습니까? 헛된 미신이나 가망 없는 요행으로는 이런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오래된 고질적인 문제도 즉시 또는 점차로 해결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생의 병을 치료하십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돕는 자이십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짠하다는 생각만을 갖기 쉽습니다.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을 품습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그들을 바라볼 때, 동정과 연민의 눈으로 보기 보다는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불쌍하다고 여기고 끝나는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돈만 준다고 그들의 문제를 적절히 돕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 그들에게 새로운 빛이 임하도록,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방향에서 돕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 그 이름의 권세가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더 근본적인 힘과 위로를 줄 수 있는 방법은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이름 권세 앞에 나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세단계가 있습니다. 우선 육체적 치유입니다. 사람은 모든 질병과 육체적 불균형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 정신적 치유입니다. 인생의 무의미, 허무, 절망, 좌절, 방황 등에 대한 해답과 방향을 제시받아야 합니다. 가장 높은 단계는 영적 치유입니다. 죄, 사탄,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그리고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될 때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기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디까지 도우셨습니까? 

  이 사람이 나은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병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병이 나았다고 해도 안식일이니 하루 더 누워 있으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안식일을 지켜야하니 아예 일어나지를 말라는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적이다 보니 긍휼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38년 동안 누워 있다가 자립적으로 걸어가게 된 회복의 역사를 인해서 감격해야 마땅한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얼굴을 붉히며 흥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거의 평생 동안 장애인으로 지내왔던 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전통에 규정된 안식일 규례 파기였습니다.

  병에서 나음 받은 사람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고침을 받은 사람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이미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도우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 그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님이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이래로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쉴 뿐만 아니라 일도 해야 합니다. 즉 안식일에는 두 가지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자신의 쾌락, 이익, 건강 등을 위한 일은 쉬고 사람을 살리고 이웃을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에 우리가 음식을 사먹고 교제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는 것은 성경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병들어 누워 있던 사람을 도우시되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날 때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예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도움을 적극적으로 청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 받고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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