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년 요4강(4:1-26) 영생의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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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학기 제 4강
말씀 요한복음 4:1 - 26
요절 요한복음 4:14
영생의 샘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지성인 중의 지성인인 니고데모를 만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소원을 갖고 찾아왔지만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천하고 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스스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예수님과 대화를 해 나갈수록 영적인 깨달음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영생의 샘물을 마시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과거를 정리하게 도우십니다. 과거가 정리된 사람은 치유가 일어납니다. 회복된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꿈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습니다. 이 시간 사마리아 여인을 도우시는 예수님을 우리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숫자에 민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숫자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요한을 시기하였는데 이제는 예수님께로 옮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요한과 비교하는 것을 아시고 요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로 가시는데 요단강 동편 길로 돌아서 가지 않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셨습니다(지도1). 많은 유대인들은 갈릴리로 갈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 길을 비켜서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물물교환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과 혼혈이 되어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순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살지만 히브리어가 아닌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 문화를 가지고 있고 아랍 사람들과 더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반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장벽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길로 지나가셨습니다.
오늘날 대학 캠퍼스는 마치 사마리아와 같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안티 세력의 영향을 받고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취업을 위한 준비와 공부로 바쁩니다. 장래에 대한 준비와 이성에 대한 갈망으로 시간을 내서 성경 공부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목마름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알고 찾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캠퍼스는 여전히 희어져 추수할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 곁에 이르자 피곤하여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때는 정오였습니다. 이때는 날씨가 너무 뜨거워 그 지방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집 안에서 낮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와 우물가는 조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탁을 받을 때 정상적인 여인이라면 물 한 바가지를 떠 줄 것입니다. 좀 더 마음을 쓰는 여자라면 버들잎이라도 따서 천천히 먹도록 배려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 이유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었습니다. 밖에서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하지 않던 시대 분위기를 생각할 때 여인의 반응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지친 나그네가 물 한 모금 달라는 것을 야박하게 대하는 이 여인의 마음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아마 “모든 남자는 도둑놈”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은 피해의식 때문에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서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더 당당하게 나가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지성인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지만 이 여인에게는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수준에 맞게, 마음에 와 닿게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생뚱맞은 반응을 보셨지만 그녀와 공감대가 통하도록 대화를 이끌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을 말합니다. 생수는 저수지나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과 구분되는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물로서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약코를 죽이려고 자신이 존경하는 야곱과 비교를 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중동 지방인 유대 사회에서 우물은 축복을 상징합니다. 건기에 이슬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우물은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 야곱의 우물은 율법의 언약 체계를 상징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에 의해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성취해야 하는 율법의 의는 더 완벽한 것을 요구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취직에 목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돈에 목이 마릅니다. 죽도록 일해서 월급을 타지만 순식간에 없어져버리고 쌓이지를 않습니다. 패션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옷에 목마르고 액세서리에 목이 마릅니다. 유행이란 것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항상 옷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형에 대한 목마름으로 풍선 아줌마가 되기도 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목마름은 끝이 없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컴퓨터 게임에 목이 마릅니다. 하루 종일 놀고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평신도목자님들은 휴식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때로는 피곤해서 원 없이 쉬어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풍요가 목마름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경제적인 풍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무엇엔가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는 목마르지 않는 물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입니다. 이 생수는 야곱의 우물과 전혀 다릅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자연적인 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영적인 물입니다. 이 물의 특징은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마시는 사람의 배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13-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어떻게 마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주시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마시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고 마셔야 이해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우리의 살과 피가 되며 그것이 신앙이 됩니다. 우리가 항상 목말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명상이나 이해가 아니라 경험입니다. 영원한 생수와 신앙은 객관적인 이론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입니다. 계시록 21:6절은 말씀합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 말씀과 같이 생명수 샘물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생명수 샘물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수 샘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만족시키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변치 않는 사랑,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만족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자를 존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받을 자격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자라는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나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하셔서 구원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쉼이 필요한 목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돈이 없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록펠러는 33세에 백만 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휄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나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심히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여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목마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은 목마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선물은 나에게 자격이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지만 값없이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자는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 여인이 갈증으로 물 긷기를 반복하면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얼마나 자주 공허감과 소외감을 되풀이 했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마음에서 생수가 터지도록 돕기 위해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움찔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꺼내기 싫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여자에게 남편 문제는 듣기 싫은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인의 목마름을 일으키는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갈증은 남자를 향한 애정으로 표출되었고, 사연이 어찌되었든 간에 별난 개인사를 만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어디에 가면 남자들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소위 ‘작업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대낮에 홀로 물을 길러 오는 일은 그녀의 수치이며 죄의식이며 공허한 노동의 반복을 뜻합니다. 남편문제의 복잡함은 목마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목마름은 사람을 쾌락적이 되게 합니다. 육신의 본성대로 살게 합니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목마름을 잊기 위해서 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 더한 수치심을 안겨다 줍니다. 가정에 풍지풍파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고자 남편 문제를 꺼내셨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남편 문제를 거론하자 마음이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발뺌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정도 되면 여자는 두 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술을 잘 하시고 봉합도 말끔하게 하십니다.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심을 깨닫고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알려주는 사람이요 죄문제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시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점점 더 진지해지고 있습니다. 더 영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 문제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왜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의 남편 문제는 외상일 뿐이고 사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지 않은 데에 문제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했지만 잘못된 예배로부터 목마름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남자를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거짓된 사마리아교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목마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할 때만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이제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제사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기초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사 단 한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십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기서 영이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고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즉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실체’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성전으로 오셨기 때문에 참다운 예배는 성령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진리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예배만이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와서 헛생각을 극복하고 말씀에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참된 예배를 드릴 때 생명을 얻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릴 때 생수를 마시듯이 속이 시원합니다.
여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시면 그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여인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기쁨이 충만하여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그녀의 목마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갈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성령을 받고도 그냥 목마름을 느낀다면 그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 편에 무슨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물과 쓰레기로 수로가 막히듯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청소를 매일 해야 하듯이 회개하고 말씀을 먹는 생활을 매일 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 더욱 깨끗하고 풍성한 생수를 마시게 될 줄 믿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신 사람은 이 생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퍼줄수록 더욱 풍성하게 솟아납니다. 그 결과 생명의 열매가 시절을 좇아서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4:1 - 26
요절 요한복음 4:14
영생의 샘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지성인 중의 지성인인 니고데모를 만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소원을 갖고 찾아왔지만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천하고 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스스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예수님과 대화를 해 나갈수록 영적인 깨달음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영생의 샘물을 마시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과거를 정리하게 도우십니다. 과거가 정리된 사람은 치유가 일어납니다. 회복된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꿈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습니다. 이 시간 사마리아 여인을 도우시는 예수님을 우리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숫자에 민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숫자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요한을 시기하였는데 이제는 예수님께로 옮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요한과 비교하는 것을 아시고 요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로 가시는데 요단강 동편 길로 돌아서 가지 않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셨습니다(지도1). 많은 유대인들은 갈릴리로 갈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 길을 비켜서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물물교환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과 혼혈이 되어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순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살지만 히브리어가 아닌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 문화를 가지고 있고 아랍 사람들과 더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반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장벽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길로 지나가셨습니다.
오늘날 대학 캠퍼스는 마치 사마리아와 같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안티 세력의 영향을 받고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취업을 위한 준비와 공부로 바쁩니다. 장래에 대한 준비와 이성에 대한 갈망으로 시간을 내서 성경 공부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목마름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알고 찾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캠퍼스는 여전히 희어져 추수할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 곁에 이르자 피곤하여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때는 정오였습니다. 이때는 날씨가 너무 뜨거워 그 지방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집 안에서 낮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와 우물가는 조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탁을 받을 때 정상적인 여인이라면 물 한 바가지를 떠 줄 것입니다. 좀 더 마음을 쓰는 여자라면 버들잎이라도 따서 천천히 먹도록 배려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 이유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었습니다. 밖에서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하지 않던 시대 분위기를 생각할 때 여인의 반응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지친 나그네가 물 한 모금 달라는 것을 야박하게 대하는 이 여인의 마음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아마 “모든 남자는 도둑놈”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은 피해의식 때문에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서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더 당당하게 나가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지성인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지만 이 여인에게는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수준에 맞게, 마음에 와 닿게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생뚱맞은 반응을 보셨지만 그녀와 공감대가 통하도록 대화를 이끌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을 말합니다. 생수는 저수지나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과 구분되는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물로서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약코를 죽이려고 자신이 존경하는 야곱과 비교를 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중동 지방인 유대 사회에서 우물은 축복을 상징합니다. 건기에 이슬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우물은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 야곱의 우물은 율법의 언약 체계를 상징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에 의해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성취해야 하는 율법의 의는 더 완벽한 것을 요구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취직에 목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돈에 목이 마릅니다. 죽도록 일해서 월급을 타지만 순식간에 없어져버리고 쌓이지를 않습니다. 패션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옷에 목마르고 액세서리에 목이 마릅니다. 유행이란 것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항상 옷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형에 대한 목마름으로 풍선 아줌마가 되기도 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목마름은 끝이 없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컴퓨터 게임에 목이 마릅니다. 하루 종일 놀고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평신도목자님들은 휴식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때로는 피곤해서 원 없이 쉬어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풍요가 목마름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경제적인 풍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무엇엔가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는 목마르지 않는 물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입니다. 이 생수는 야곱의 우물과 전혀 다릅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자연적인 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영적인 물입니다. 이 물의 특징은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마시는 사람의 배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13-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어떻게 마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주시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마시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고 마셔야 이해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우리의 살과 피가 되며 그것이 신앙이 됩니다. 우리가 항상 목말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명상이나 이해가 아니라 경험입니다. 영원한 생수와 신앙은 객관적인 이론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입니다. 계시록 21:6절은 말씀합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 말씀과 같이 생명수 샘물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생명수 샘물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수 샘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만족시키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변치 않는 사랑,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만족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자를 존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받을 자격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자라는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나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하셔서 구원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쉼이 필요한 목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돈이 없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록펠러는 33세에 백만 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휄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나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심히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여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목마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은 목마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선물은 나에게 자격이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지만 값없이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자는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 여인이 갈증으로 물 긷기를 반복하면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얼마나 자주 공허감과 소외감을 되풀이 했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마음에서 생수가 터지도록 돕기 위해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움찔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꺼내기 싫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여자에게 남편 문제는 듣기 싫은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인의 목마름을 일으키는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갈증은 남자를 향한 애정으로 표출되었고, 사연이 어찌되었든 간에 별난 개인사를 만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어디에 가면 남자들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소위 ‘작업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대낮에 홀로 물을 길러 오는 일은 그녀의 수치이며 죄의식이며 공허한 노동의 반복을 뜻합니다. 남편문제의 복잡함은 목마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목마름은 사람을 쾌락적이 되게 합니다. 육신의 본성대로 살게 합니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목마름을 잊기 위해서 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 더한 수치심을 안겨다 줍니다. 가정에 풍지풍파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고자 남편 문제를 꺼내셨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남편 문제를 거론하자 마음이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발뺌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정도 되면 여자는 두 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술을 잘 하시고 봉합도 말끔하게 하십니다.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심을 깨닫고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알려주는 사람이요 죄문제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시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점점 더 진지해지고 있습니다. 더 영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 문제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왜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의 남편 문제는 외상일 뿐이고 사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지 않은 데에 문제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했지만 잘못된 예배로부터 목마름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남자를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거짓된 사마리아교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목마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할 때만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이제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제사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기초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사 단 한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십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기서 영이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고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즉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실체’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성전으로 오셨기 때문에 참다운 예배는 성령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진리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예배만이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와서 헛생각을 극복하고 말씀에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참된 예배를 드릴 때 생명을 얻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릴 때 생수를 마시듯이 속이 시원합니다.
여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시면 그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여인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기쁨이 충만하여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그녀의 목마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갈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성령을 받고도 그냥 목마름을 느낀다면 그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 편에 무슨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물과 쓰레기로 수로가 막히듯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청소를 매일 해야 하듯이 회개하고 말씀을 먹는 생활을 매일 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 더욱 깨끗하고 풍성한 생수를 마시게 될 줄 믿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신 사람은 이 생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퍼줄수록 더욱 풍성하게 솟아납니다. 그 결과 생명의 열매가 시절을 좇아서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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