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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 요한복음 부활 특강(20:1-31)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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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580회 작성일 10-04-11 13:46

본문

2010년 봄학기 부활절 특강
말씀 요한복음 20:1 - 31
요절 요한복음 20:17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복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아픈데도 많고 병든 곳도 많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서서히 온 몸으로 퍼져나갑니다. 우리의 육신은 후패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질 때 영생을 얻습니다. 평강을 얻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더 나아가 부활 신앙으로 죽음의 세력으로 인해서 패배적인 삶을 살던 데서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를 체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복이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첫째, 믿음의 증거를 얻습니다(1-10)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장사 지내고 난 후에 집에 돌아왔지만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다른 제자 요한은 나가서 무덤으로 달음박질쳤습니다. 젊은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무덤에 이르렀지만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사려 깊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격이 달랐지만 팀을 잘 이루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우리도 기질과 성격, 은사가 다 다르지만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깁니다.

  베드로가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이는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마리아나 대제사장의 말을 반박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누군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잘 정돈해 놓았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어떤 도둑놈이 시체를 훔쳐 가면서 무덤 안을 정리했겠습니까? 또 예수님을 나사로와 같이 몸을 감쌌던 것을 풀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19,26절에서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이 방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이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은 부활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위인들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화려한 무덤으로 과시합니다. 왕릉은 모두 거대한 봉분을 하고 있고 비석들이 멋있게 서 있고 십이지신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권력과 평판이 높을수록 그의 무덤은 규모를 크게 하고 아름답게 장식합니다. 인간의 영광은 무덤의 영광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이 무덤의 영광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증거인 빈 무덤으로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유일한 빈 무덤의 종교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11-18) :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통곡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해서 시체를 찾지 못하고서는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의 시체라도 보지 못하면 위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리아가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이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울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떠나고 마리아만 혼자 무덤에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녀와 함께 하셨습니다. 내 곁에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아내도 다 떠날지라도 예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우리가 고통 받고 있을 때, 절망하고 있을 때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자기 슬픔이 크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많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근심이 많으면 가능성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천사들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두 번씩 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부탁을 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는 선입관과 슬픔에 압도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돕기 위해서 점진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마리아의 마음 문을 열어 주기 위해서 공감대를 형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부르시니 그제야 마리아의 영적인 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자기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에야 눈이 떠졌습니다. 이름은 그의 전 존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 받았던 사랑을 기억할 때 마리아는 영적인 눈이 떠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고 마리아는 그를 꼭 붙들어 두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의 발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과 합쳐진 기쁨에 찬 경배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붙잡지 말라고 하실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머무르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녀만 계속해서 예수님께 매달리고 또 그로 인한 복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더 중요한 사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마리아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최초의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구약과 유대교법은 여자는 증인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자를 택하셨습니다. 이는 여자가 남자와 동일한 자격으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자의 지위가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제 형제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형제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이제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은 예수님만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이 되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형제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같이 이제 제자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아들과 딸이 되는 길이 십자가 부활을 통해 열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 이루어진 가장 큰 복입니다.

  오늘날은 이기주의가 매우 팽배합니다. 자기만을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귐을 갖지만 매우 피상적입니다. 온 라인 상에서 친구 관계를 맺지만 서로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며 느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공동체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공동체 됨을 회복해야 합니다. 장막 생활과 가정 교회 모임을 통해서 삶을 나누고 교제하면서 참된 공동체 훈련을 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예수님의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초청하여 사랑을 해 주고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거듭나도록 돕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평강을 얻습니다(19-31) :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나서 자신들을 죽이리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나사렛 예수 당을 뿌리 뽑기 위해서 핍박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자매님들이 슬픔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에 형제들은 두려움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매님들과 달리 형제들은 장래에 대한 안정이 확보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안정 문제의 핵심도 결국은 죽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14: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에게 진정한 평강을 주겠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땅의 평강이 아니라 하늘의 평강이요, 순간적인 평강이 아니라 영원한 평강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독하고, 일에 실패하고, 낙담하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세상을 저주하고, 죽음의 세력에 시달리며 불안해 할 때에 주님은 평강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6:33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평강을 주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주겠다는 평안은 약속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평강은 실현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평강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예수님은 인간이 가진 모든 죄악, 고통, 질병, 불안, 저주, 죽음 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염려와 근심, 불안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불안해하면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평강은 부활하신 후에 성취된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평강을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모든 죄악이 용서받고 기도의 응답은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평강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평강을 달라고 기도만합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이미 주어진 평강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 고난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한번 고난이 지나갔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고난이 찾아옵니다. 인생 끝날 때까지 고난이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문제를 피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나라로 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지나가면 다른 문제가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고난, 위기, 불안,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맞설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평강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시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입니다. 이미 온 평강을 선언한다면 그 평강이 역사할 것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넷째, 사명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간구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순절에 임할 성령의 예표입니다. 복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의 출처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다 함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삶 속에 모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로 모시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님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선교 명령을 동반하고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의 공통점입니다.(마28:16-20, 막16:14-18, 눅 24:44-53, 행 1:6-8, 갈 1:15-16). 주님은 선교 명령을 보냄의 형식으로 주셨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은 전권을 대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대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예수님을 드러내야 합니까? 2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제자들을 통해서 그 일을 전세계에 확산시키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죄사함을 선포함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죄사함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일입니다. 죄씻음을 받고 하나님께 회복되어 하나의 생명 즉 영생을 얻도록 하는 일이 교회의 일입니다. 교회는 죄 용서의 전달자입니다. 제자들이 가지 않고, 용서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계속 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있게 됩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전하지 않아서 용서를 못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막중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캠퍼스에도 나아가야 합니다. 전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추측하건대 그때 도마에게 바쁜 일이 생겼던지 참혹한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후에 도마가 믿음이 떨어져서 방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평소에 잘 참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말을 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기쁨이 충만해서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열 사람의 눈보다 자기의 눈을 더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완벽하다. 나는 실수가 없다. 나는 확실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는 흥분해서 말하는 제자들을 보고 ‘이 사람들 너무 감정적인 거 아냐? 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 없이 믿는 거지? 믿을 만한 증거를 대면 될꺼 아냐, 왜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걸까? 라고 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을 위해서 여드레가 지났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깊은 애정과 긍휼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수할 때 예수님은 야단치지 않고 믿음을 갖게 되길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부활의 주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에게 의심을 풀어주고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사진1).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 도마는 예수님을 좋아하고 동료들이 좋아서 공동체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료들의 말을 거절하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일에 인색했습니다. 여기서 도마에게 믿음이 없었다기보다 믿음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믿음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오랜 세월 예수님을 믿어온 크리스천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믿음이 점점 식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알맹이가 다 빠져 나가고 나중에는 껍데기와 형식만 남게 됩니다. 결국 열심, 봉사, 찬송, 기도 등도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도마가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는 불신의 상태에서 확실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근거는 부활 사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도마의 이 고백은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믿음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의 증거를 듣고 믿습니다. 부활 신앙이 생기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서 선한 일을 위해서 젊음을 불태우고 싶습니다. 우리 가운데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신앙으로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캐나다 험버 센터의 박디모데 선교사님은 좋은 직장을 얻었지만 삼 주만에 급성백혈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암에서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짤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 신앙을 덧입고 탄원서를 썼습니다. 자신은 직장에 들어갈 소망으로 암과 싸워 이겼는데 암에서 낫고 나니 직장에서 짜르면 어떻게 하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임원들이 감동을 받고 다시 일하도록 통보해 왔습니다. 임요한 목동은 한 직장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부활 신앙으로 도전하여 서류가 전달되지 않은 것을 알아내고 다시 면접을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한 목자님은 부활 신앙으로 40만 불의 손해를 볼 것을 면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워진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사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을 덧입고 이 세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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