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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십자가(19:1-30)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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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556회 작성일 10-04-0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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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부활절 특강(1)
말씀 요한복음 19:1 - 30
요절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지난 주 해군 천안함 침몰 사고가 있었는데 한주호 준위가 구조업무를 하다가 순직했습니다. 그는 배 안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던졌고 잠수시간을 연장하다가 질소마취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전설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훈련된 170여명의 UDT 요원들이 감압 장비가 한 대 밖에 없는 가운데서 구조 작업을 위해 과감히 몸을 던져 잠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준위의 죽음이 빛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던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죄와 사망 권세 가운데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희생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죄 문제란 심연과 같습니다. 죄란 인간이 힘으로는 다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점이 있습니다. 죄의 세력은 매우 강하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우리를 결박하고 있던 죄의 사슬이 끊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진행되는 과정들을 살펴봄으로서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유대인의 왕 예수님(1-6).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당하십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18:38). 그러면 석방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유월절이면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놓아 주기를 원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무리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라는 강도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재판이 계속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 법정에서 형이 확정되기 전에 채찍질하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시고,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일곱 가닥의 채찍에는 납덩이와 뼛조각이 붙어 있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그런 채찍으로 예수님의 벗은 등과 몸에 120대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사실 우리 죄인들이 받아야 할 징벌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질병과 여러 원인으로 인한 상처에서 나음을 받도록 채찍에 맞으셨습니다(사 53: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서서히 더해졌습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꾹 눌러 씌웠습니다. 핏방울이 이마로부터 얼굴을 타고 목으로, 온 몸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가시나무는 아담이 타락하고 나서 땅에 생긴 저주의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왕관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가시관은 온 몸을 찌르는 고통과 눈물, 희롱과 멸시, 낮아짐과 저주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시관보다 왕관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왕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군인들은 짙은 남색에 붉은 빛이 도는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자색은 왕의 색을 뜻했습니다. 군인들은 바보 왕과 같은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렸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밖에 나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4).” 왜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고 우리 앞에 서셔야 합니까? “보라 이 사람이로다.” 저자는 빌라도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챨스 스펄전은 청소년 시절 죄로 인해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눈이 많이 와서 목사님이 예배 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습니다. 한 집사님이 대신 강대상에 서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했습니다. 스펄전은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의 죄 짐이 벗겨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 그는 변화되어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6-16). 빌라도가 분명히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두 번째 말했는데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이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까? 7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대답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사람이 되어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이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이유는 십계명 중 1-4계명을 범한 우상숭배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사형권한이 없기 때문에 로마인의 법대로 가장 가혹하고 치욕적인 십자가형에 처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신 21:22-23).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고 세 번째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왜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를 속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속죄제물을 삼기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속죄제물이 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자는 없습니다. 구원자라고 말하는 다른 사람들은 하나의 구도자 일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극한 고통과 수치를 참으셨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내가 전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십자가, 나의 사랑 십자가, 내가 전할 십자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재판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존재가 너무나 신비했습니다. 또 그가 쓴 「빌라도의 보고서」에 보면 예수님 앞에 섰을 때에 무릎이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밤에 아내의 꿈자리가 너무나 뒤숭숭했기 때문이었습니다(마 27:19). 빌라도는 이 일을 담당하는 일을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이 재판을 자신이 책임지고 끌고 가는 것이 꺼려졌습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재판을 해 보았지만 이런 재판은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해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입을 열기 위해 위협하면서 권위를 부렸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당히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1).” 지상의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시고 그에게 일정한 권한을 주셔서 일하게 하십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권한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지라도 그것은 빌라도의 권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행2:23).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사명인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사명인의 길을 갑니다. 우리는 일생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이야기를 쓰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겸손하게 하나님이 주신 신자의 길, 목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놓으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약점을 잘 알고 붙들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정치가로서 유대에서 민란이 일어난다거나 가이사의 충신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장래가 없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의 협박을 받을지라도 의로운 길을 간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옷을 벗을 각오로 올바른 길을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반역에 동조하는 것이요 그러면 당신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간교한 협박에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였습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유월절 예비일 정오는 유월절 희생양을 잡기 시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유대인들이 그들의 왕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십자가에서 처형할 것을 요구한 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임으로써 그의 구원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난 야수와 같이 소리질렀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고 물었지만  대제사장들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b).”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배신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신데 가이사 외에는 그들에게 왕이 없다고 하니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입니까! 그들은 가이사가 왕이요 신이라는 것을 부정했기 때문에 성전세를 환전해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장났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하면서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하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때는 모세의 중보기도로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입니다. 그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백성이 창조되고,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십자가 밑에 있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새 언약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셨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운데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끔찍한 장면을 단지 한 단어의 헬라어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누구도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당당하게 왕적인 죽음을 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두 강도의 신분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두 강도와 같은 입장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셋째, 다 이루었다는 의미(23-30).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했습니다. 예수님은 법정 스님보다 더한 무소유로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피까지 모두 쏟으셨습니다.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입니다.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라 나누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누가 얻나 제비를 뽑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성경이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프리(J. P. Free)는 그의 유명한 저서 고고학과 성경 역사에서 캐논 릿돈(Canon Liddon)에 의하면 구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된 332개의 구별된 예언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모든 예언들이 한 사람에게 성취될 수학적 확률은 입니다. 은 확률이 제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예언의 성취는 그 이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벌거벗겨지셨습니다. 그는 저와 여러분이 당해야 할 수치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모든 인간에게 생명의 물을 주셨던 주님(4:14; 7:37-38)께서 목마르신 중에 돌아가신 것은 실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십자가에서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생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입에 대자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먼저 끝내다, 끝마치다, 완수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는 구속 역사를 다 이루시고 하나님의 계시를 다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예언을 성취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이므로 예루살렘 성전 체제의 모든 의미와 기능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은 지불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죄의 댓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치루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제 2의 아담이신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하나님과 인간을 막고 있던 장벽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희생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제사장의 손에서 칼은 떨어졌습니다. 그 희생제사의 효력을 믿는 모든 사람은 자기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일이 없어졌습니다(히 10:18). 이후로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는 외침은 승리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기쁨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다 이룬 후에 이렇게 만족감을 표시하셨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 이 부르짖음은 좌절당한 순교자의 임종이 아니라, 승리자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어 가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함은 어리석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죽음이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신 일 외에 우리가 뭔가를 더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종과 같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나에게 진 일백 달란트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자기 의를 내려놓고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값없이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죄의 심연이 너무나 깊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충만히 덧입을 때  우리도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영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사람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일생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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