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년 요3강(3:1-15) 거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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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학기 제 3강
말씀 요한복음 3:1-15
요절 요한복음 3:5
거듭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는 계란을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계란이 다 같은 계란이 아닙니다. 암탉이 혼자서 낳은 계란은 무정란이고, 수탉의 씨를 받아서 낳은 계란은 유정란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 봐서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빛에 비추어 난황이 있으면 유정란이고, 없으면 무정란이라고 합니다. 또 소금물에 넣어서 가라앉으면 유정란이고 뜨면 무정란이라고 합니다. 더욱 확실한 것은 암탉의 날개 밑에 들어가 20일이 지난 후에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유정란에서는 생명이 나오고 무정란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대로 썩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원하는 대학에 들어왔지만 인생의 무의미와 공허함을 느끼는 대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아기자기하게 살고 있지만 삶의 목표가 없고 활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당연히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임에 잘 나온다고 회심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은 모태 신앙인데 구원의 감격을 맛보지 못해서 영적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우리는 니고데모와 대화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니고데모는 당시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공부에도 두각을 나타내서 스펙이 좋았고 젊은 나이에 산헤드린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몰약과 향품 백 근을 가져다가 장사지냈습니다. 이는 그의 재력이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분리 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깨끗하지 않다고 하는 것들로부터 분리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암송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조용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공무로 인해서 바쁘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의식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예수님과 지성인 니고데모는 야자수 밑에서 깊은 영혼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그가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을 행해서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예수님이 “진실로”를 반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쓰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보자마자 그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다,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조상대대로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니 매우 도발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뜻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17). 거듭난 사람은 삶의 변화가 분명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하나님 중심, 타인 중심으로 변화됩니다. 사람에 대해서 사랑이 생깁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집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새롭게 관계성이 맺힙니다. 자연이 죽어 있던 데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거듭났을 때의 체험을 견딜 수 없는 기쁨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생명으로 충만해 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목적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성경을 읽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생각이 됩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듭나는 것은 느낌만이 아닙니다. 지식과 의지적인 결단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는 생뚱맞은 대답을 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그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의 최고봉에 있었지만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물은 사람 편에서 해야 할 회개와 믿음을 뜻하고 성령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요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죄에 대한 후회나 한탄도 포함됩니다. 회개는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포괄합니다. 믿음은 지식과 동의, 신뢰를 포함하는데 의지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실 사람 편에서 해야 할 회개와 믿음도 성령께서 역사 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책감을 주십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치 햇빛이 비치면 방 안에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죄가 다 인식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구주라는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거듭남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탄생하는 것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내가 현재의 부모님이나 이 나라나 이러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사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제 아무리 거룩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그 종교성 때문에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날 때만이 영생을 보장 받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성공한 인물, 지식이 많은 인물, 사람들에게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인물, 철저한 경건의 모습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죄인들에게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을 말씀했다면 쉽게 수긍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원래 죄악 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씻음을 받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듭남의 절대적 필요성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든 혹은 존경을 받든, 인생의 최고 수준에 있든 혹은 밑바닥 수준에 있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탄생이 있어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그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거듭나기 위해서 믿음의 개인적인 측면과 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활동 측면도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역사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데 전하는 사람이 없이는 들을 수 없습니다. 전하는 사람은 보내는 공동체가 없이는 안 됩니다. 또한 새로운 신자들이 물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제 속에 들어오는데 그들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활동, 제자들 간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되고 그 가치와 세계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이러한 것들의 결합 속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은 우리 속에 겸손, 온유, 평화, 절제, 진실 등의 창시자이고,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구별하는 총명이 가득하신 분이며, 옳은 일과 옳지 않는 일을 분간하여 사람들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로 우리의 부정과 불결을 씻어버리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시키심으로 회개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평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어떤 때에는 느린 걸음으로, 선택 받은 사람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며, 그들의 죄책을 깨끗이 없애며, 그들을 성전으로 주께 바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 마음을 새롭게 하여 진정한 순결에 이르게 하시며, 그들이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며, 이 싸움은 죽음이 와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람은 거듭났다, 저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한 인간의 거듭남은 금방 구별이 되기도 하지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거듭남은 단회적인 것이지만 변화는 일생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으로 태어난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이 불면 때로 나무도 뽑히고 전신주도 쓰러집니다. 간판이 날아가고 플랭카드가 찢어집니다. 산들 바람이 불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 줍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은 태풍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나고 디모데와 같은 사람은 산들 바람과 같이 조용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거듭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구원을 받을 때입니다. 바로 지금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좀 더 하나님과 거듭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알고 싶어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은 후 자신이 묵고 있는 곳에서 하루를 함께 지내자고 청하셨습니다. 안드레는 자기의 죄를 인식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기 위해서 조용한 대화가 필요했습니다. 안드레는 충동적이고 성격이 급한 형 시몬을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아주 다르게 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나 장차 게바라 하리라.” 예수님은 이 변덕스러운 젊은이에게 자신을 믿으면 그의 성격이 반석같이 단단하게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거듭나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과격하고 성마른 성격을 바꿔줄 힘과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믿어야 했습니다. 다음 날 예수님은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는 또 다른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단순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아주 직설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빌립은 이어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율법에 충실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특별한 요구를 들어주면서 말씀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1:51).”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은 모두 다르게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고 어떤 사람은 금방 깨닫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니고데모의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는 영적인 교만입니다. 그는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니고데모와 유대인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1-12).”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로서 또 하늘에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늘 일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영접할 수 있고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을 들어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14-1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백성들이 다시 모세에게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민수기 사건을 모형론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들려서 매달리셨습니다. 니고데모도 모세에 의해 장대에 달려 들려 올려진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들려지는 예수님을 바랄 볼 때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리 뱀이 하나님께서 출애굽 세대에게 마련해 주신 구원의 방도였듯이, 십자가에 들려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구원의 방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신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편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습니다.
거듭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둘째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또한 “회개하고 믿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 말씀은 당신이 스스로 구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넷째,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 고백은 당신이 예수님께 돌아왔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당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가능한 빨리 다른 사람에게 증언할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제 거듭난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면 우유를 먹는 것처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일대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또한 가정 교회에 참여하여 영적인 가족으로서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사랑과 교제를 나누도록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영상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들과 같이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그 위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친구는 애벌레에서 고치를 만들고 나비가 되어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이 애벌레는 먼지 속을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면서 꿀을 먹고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삽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3:1-15
요절 요한복음 3:5
거듭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는 계란을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계란이 다 같은 계란이 아닙니다. 암탉이 혼자서 낳은 계란은 무정란이고, 수탉의 씨를 받아서 낳은 계란은 유정란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 봐서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빛에 비추어 난황이 있으면 유정란이고, 없으면 무정란이라고 합니다. 또 소금물에 넣어서 가라앉으면 유정란이고 뜨면 무정란이라고 합니다. 더욱 확실한 것은 암탉의 날개 밑에 들어가 20일이 지난 후에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유정란에서는 생명이 나오고 무정란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대로 썩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원하는 대학에 들어왔지만 인생의 무의미와 공허함을 느끼는 대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아기자기하게 살고 있지만 삶의 목표가 없고 활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당연히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임에 잘 나온다고 회심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은 모태 신앙인데 구원의 감격을 맛보지 못해서 영적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우리는 니고데모와 대화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니고데모는 당시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공부에도 두각을 나타내서 스펙이 좋았고 젊은 나이에 산헤드린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몰약과 향품 백 근을 가져다가 장사지냈습니다. 이는 그의 재력이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분리 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깨끗하지 않다고 하는 것들로부터 분리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암송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조용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공무로 인해서 바쁘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의식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예수님과 지성인 니고데모는 야자수 밑에서 깊은 영혼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그가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을 행해서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예수님이 “진실로”를 반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쓰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보자마자 그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다,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조상대대로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니 매우 도발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뜻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17). 거듭난 사람은 삶의 변화가 분명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하나님 중심, 타인 중심으로 변화됩니다. 사람에 대해서 사랑이 생깁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집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새롭게 관계성이 맺힙니다. 자연이 죽어 있던 데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거듭났을 때의 체험을 견딜 수 없는 기쁨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생명으로 충만해 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목적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성경을 읽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생각이 됩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듭나는 것은 느낌만이 아닙니다. 지식과 의지적인 결단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는 생뚱맞은 대답을 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그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의 최고봉에 있었지만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물은 사람 편에서 해야 할 회개와 믿음을 뜻하고 성령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요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죄에 대한 후회나 한탄도 포함됩니다. 회개는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포괄합니다. 믿음은 지식과 동의, 신뢰를 포함하는데 의지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실 사람 편에서 해야 할 회개와 믿음도 성령께서 역사 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책감을 주십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치 햇빛이 비치면 방 안에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죄가 다 인식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구주라는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거듭남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탄생하는 것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내가 현재의 부모님이나 이 나라나 이러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사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제 아무리 거룩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그 종교성 때문에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날 때만이 영생을 보장 받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성공한 인물, 지식이 많은 인물, 사람들에게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인물, 철저한 경건의 모습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죄인들에게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을 말씀했다면 쉽게 수긍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원래 죄악 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씻음을 받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듭남의 절대적 필요성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든 혹은 존경을 받든, 인생의 최고 수준에 있든 혹은 밑바닥 수준에 있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탄생이 있어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그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거듭나기 위해서 믿음의 개인적인 측면과 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활동 측면도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역사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데 전하는 사람이 없이는 들을 수 없습니다. 전하는 사람은 보내는 공동체가 없이는 안 됩니다. 또한 새로운 신자들이 물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제 속에 들어오는데 그들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활동, 제자들 간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되고 그 가치와 세계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이러한 것들의 결합 속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은 우리 속에 겸손, 온유, 평화, 절제, 진실 등의 창시자이고,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구별하는 총명이 가득하신 분이며, 옳은 일과 옳지 않는 일을 분간하여 사람들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로 우리의 부정과 불결을 씻어버리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시키심으로 회개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평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어떤 때에는 느린 걸음으로, 선택 받은 사람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며, 그들의 죄책을 깨끗이 없애며, 그들을 성전으로 주께 바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 마음을 새롭게 하여 진정한 순결에 이르게 하시며, 그들이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며, 이 싸움은 죽음이 와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람은 거듭났다, 저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한 인간의 거듭남은 금방 구별이 되기도 하지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거듭남은 단회적인 것이지만 변화는 일생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으로 태어난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이 불면 때로 나무도 뽑히고 전신주도 쓰러집니다. 간판이 날아가고 플랭카드가 찢어집니다. 산들 바람이 불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 줍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은 태풍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나고 디모데와 같은 사람은 산들 바람과 같이 조용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거듭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구원을 받을 때입니다. 바로 지금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좀 더 하나님과 거듭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알고 싶어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은 후 자신이 묵고 있는 곳에서 하루를 함께 지내자고 청하셨습니다. 안드레는 자기의 죄를 인식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기 위해서 조용한 대화가 필요했습니다. 안드레는 충동적이고 성격이 급한 형 시몬을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아주 다르게 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나 장차 게바라 하리라.” 예수님은 이 변덕스러운 젊은이에게 자신을 믿으면 그의 성격이 반석같이 단단하게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거듭나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과격하고 성마른 성격을 바꿔줄 힘과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믿어야 했습니다. 다음 날 예수님은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는 또 다른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단순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아주 직설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빌립은 이어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율법에 충실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특별한 요구를 들어주면서 말씀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1:51).”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은 모두 다르게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고 어떤 사람은 금방 깨닫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니고데모의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는 영적인 교만입니다. 그는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니고데모와 유대인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1-12).”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로서 또 하늘에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늘 일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영접할 수 있고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을 들어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14-1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백성들이 다시 모세에게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민수기 사건을 모형론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들려서 매달리셨습니다. 니고데모도 모세에 의해 장대에 달려 들려 올려진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들려지는 예수님을 바랄 볼 때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리 뱀이 하나님께서 출애굽 세대에게 마련해 주신 구원의 방도였듯이, 십자가에 들려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구원의 방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신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편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습니다.
거듭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둘째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또한 “회개하고 믿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 말씀은 당신이 스스로 구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넷째,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 고백은 당신이 예수님께 돌아왔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당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가능한 빨리 다른 사람에게 증언할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제 거듭난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면 우유를 먹는 것처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일대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또한 가정 교회에 참여하여 영적인 가족으로서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사랑과 교제를 나누도록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영상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들과 같이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그 위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친구는 애벌레에서 고치를 만들고 나비가 되어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이 애벌레는 먼지 속을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면서 꿀을 먹고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삽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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