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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4강(5:1-21) 믿는 자의 새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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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736회 작성일 10-09-2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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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 4 강                                                       
말씀 로마서 5:1-21                                               
요절 로마서 5:1
믿는 자의 새 생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추석 연휴를 잘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추석을 지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믿는 자의 새 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신앙생활을 힘차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자의 삶은 어떠할까요?

 I.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 (1-11)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은 파도의 표면과 같이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쉽게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는 평안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지 않습니다. 그 평안은 깊은 호수와 같이 환경에 따라서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우리 안에 죄로 인한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죄로 인한 불안과 수치심을 몰아내고 떳떳한 마음,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이 은혜에 들어갔다는 것은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의 임재를 누리면서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구원은 믿음으로 확보되지만 생활로 유지된다고 믿게 함으로써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가 내일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는 불안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신실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성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하심을 받고 성결과 의로 일생동안 그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성도들의 특징은 즐거움입니다. 어떤 즐거움이 있습니까? 2b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를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그와 같아지는 영광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우리에게 분여될 영광으로서 우리의 전부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이는 가장 확실한 소망입니다. 이 즐거움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살아 있는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마음에 즐거움이 있으면 웃음이 피어나고 말이 많아집니다. 그 결과 교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신자의 고난에 대한 자세는 어떠합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환난 자체를 즐거워 할 사람은 정신병자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환난이란 원어로 ‘들리보’인데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목자로서 양을 치다보면 제자로 세우는 일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3-4년 일대일을 하면서 섬기는 수고를 했는데 떨어져 나가면 그 절망감이 큽니다. 자녀들이 자라나면서 돈이 들어가는 액수가 커지고 질병이라도 생기면 집안 경제가 휘청거립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덩달아 약해지기 쉽습니다. 이런 가운데 친구라도 많아서 문제를 잘 풀어 놓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친구도 없고 도리어 사람들과 인간 갈등이 깊어지면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게 되면 분노가 목에 까지 차오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깊어지면 마음이 우울해 집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슬퍼집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니요? 어디 다른 나라 사람들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가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후 1:5-6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위로가 고난 가운데 넘치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은 환난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환난을 통해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집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b,4).”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는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환난을 태양에 비유했습니다. 환난은 태양과 같아서 우리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자라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난을 먹으면서 믿음이 자랍니다. 환난이 없으면 힘이 없고 연약한 믿음의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환난은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또한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은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여 검증된 인격”을 뜻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4).”고 했습니다. 연단을 받은 사람의 인격은 고상하고 고난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가 깊습니다. 외부 환경에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연단을 받은 인격을 가진 신자들은 뿌리 깊은 나무가 가뭄 가운데서도 푸르르고 그늘을 만들어 쉼을 주는 것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환난 가운데서 연단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조용하지만 깊은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 당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압니다. 소망은 부활의 소망을 말합니다. 환난을 받으면 이 세상의 거짓된 소망, 헛된 소망, 더러운 소망들이 사라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며 사는가에 따라서 인격이 달라집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집니다(5). 메마른 땅 위에 비가 내려서 시들어져 가는 초목에게 결실의 소망을 주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소망에의 보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단 다니엘은 매일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그가 총리로서 승승장구할 때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법령을 만들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는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욥도 자신이 가진 재물과 열 명의 자녀들과 건강을 사단의 시기로 한꺼번에 잃어버렸지만 하나님께 찬송하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매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옥에서 밤에 기도하면서 찬송하였습니다. 그러자 옥 터가 흔들리고 매였던 사슬과 수갑이 풀어졌습니다. 그리고 간수와 그 가정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받지만 이로 인해서 기가 꺾이지 않고 인내하고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격을 닮아가야겠습니다. 그리고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는 형태는 어떤 감정이나 감동, 감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잘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약함이란 죄성을 일부러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대항하기에 무력하고 선을 행하기에 무력하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세상 유혹과 죄가 공격해 들어올 때 그것을 알면서도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섬길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번번이 죄에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였는데 이런 연약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불경건한 자였습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원수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선인을 위해서는 용감히 죽는 자가 간혹 있습니다. 선인은 남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흔연히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훌륭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위해서는 간혹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 경건하지 않은 자, 원수를 위해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그리스도의 사랑은 특수하고 전무후무한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은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하여, 불경하다고 하여, 죄의 요소가 남아 있다고 하여 혹은 하나님을 싫어하며 하나님과는 반대편으로 간다고 해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약한 그대로,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의 어떤 요소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화해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지막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합니다. 이 즐거움은 하나님을 떠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던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구원을 확보했을 때 오는 최고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II. 아담과 그리스도 (12-21)

  12-21절에는 구원 역사에서 대표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이라는 말이 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자유주의자들을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부르는데 그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맡는다는 것입니다. 내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에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이 없거나 희박합니다. 그리고 천박한 도덕적 성품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일본 사람들이 과거에 조상들이 지은 죄를 가지고 왜 자신들에게 배상을 하라고 하느냐고 발뺌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국가를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여기에 속해 있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국가대항 축구 경기를 할 때 잠을 설쳐가면서 응원을 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했는데 왜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지 설명을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말씀은 대표자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완전했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의 결과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원죄설의 근거가 됩니다.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도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된 은혜와 의를 말합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사망이 왕 노릇 한 것같이 이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우리가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자를 통한 타락의 원리와 구원의 원리가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즉 아담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사람을 사망아래 두게 되었듯이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가 모든 사람을 살게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의 중요성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의 믿음이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놓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습니다. 남미에 있는 볼리비아나 베네주엘라의 역사를 볼 때 한 가정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한 구원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겨자씨 같은 한 사람의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힘있게 확장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 양성을 할 때 믿음의 조상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을 잘 세우면 그를 기초로 수많은 자손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또 나 한 사람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내가 바로 서야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오는 것이지 내가 사라지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생명의 존재를 천하보다 무겁게 여기신 예수님의 가치관을 잘 배우고 따라야겠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로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복된 시기뿐만 아니라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인내를 통해서 연단을,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사 우리 각자가 당한 환난을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된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즐거워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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