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3강(3:21-4:25) 믿음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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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 3 강
말씀 로마서 3:21-4:25
요절 로마서 3:24
믿음의 본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 믿음이 없는 세상이 그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배웠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다 죄 아래 있어서 심판을 받고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도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시간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거와 본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쓰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에 대해서 나누는 가운데 은혜받기를 기도합니다.
I.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3:21-31)
“이제는 율법 외에 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 이제는 이라는 말은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심판에서 구원으로, 율법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에 대해서 이미 예언해 오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죽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불의한 자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화목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값없이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 편에서 노력하거나 투쟁을 하거나 자선 행위를 하거나 고행을 하거나 어떤 모양이든지 인간의 업적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을 다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자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천성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으켜 주셔서 우리가 반응하게 되는 태도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 상태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믿음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권유할 때 “잘 믿어지지 않지만 일단 믿어시라니까요”라고 권유하는 것은 확률을 믿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든 일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밀마암는다고 했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흑암 가운데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 빛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천지 창조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이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혼돈과 어두움 속에서 있던 인간의 마음에 홀연히 빛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에 역사합니다. 복음 전파와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죄인 된 원래 상태에서 믿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는 수동적으로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기초해서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소원을 일으키시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영적인 소원을 불러일으키시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충분히 전한 다음에 결단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제시하고 조용히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인간 편에서 주도권을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생기게 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신비롭습니다. 성령을 통한 깨달음, 정서적인 감동, 죄인으로서의 통회, 슬퍼함, 애통함, 정죄감등을 동반하면서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 후에 의지로 연결됩니다. 방향 전환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결심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지정의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홀연히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결코 구원이 취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면서 열매를 맺어갑니다. 사람마다 진행 속도나 상황이 다 다릅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믿음의 양태는 다양합니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 은사로 주어지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태산을 옮기는 믿음,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면 죄를 범한 사람이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영광이란 무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팬텀급 정도가 되는데 인간은 모기만도 못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무가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수준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성경 중에서 가장 명쾌하게 기독교 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란 죄인 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 값, 즉 죄책과 형벌의 값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이 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값없이 거저 얻는 의입니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가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그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이 됩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합니다(레17:1). 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구약에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습니까(히 9:14)?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끓어오르셨는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누그러지셨고 가라앉히셨습니다. 사람도 불의하다고 느끼면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한 분노로 인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짓는 죄도 그리스도의 동일한 보혈 공로로 씻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무조건 의롭다고 하셨으면 그러한 판단 자체가 불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담당한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의로운 판단이시요 의로운 행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칭의의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믿는 자가 받는 의(義)의 정당함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轉嫁)시키셨으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은 이 칭의는 본성적으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법적으로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법정적(法廷的)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성도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심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또한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법적으로 완전한 의인이지, 실제적으로는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겸손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의인으로서 죄와 싸우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구원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삶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조화가 되었습니다. 사랑과 공의는 모순되지만 십자가 위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무가치한 죄인들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법으로 자랑하겠습니까? 우리의 의입니까? 우리의 행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믿음의 법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진실로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구원 진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효력 있는 진리입니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요 예언과 성취입니다.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죽음이었고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받아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Ⅱ. 믿음으로 의에 이른 아브라함 (4:1-25)
이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에 이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창세기 15: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믿음은 행위와 다릅니다. 믿는다는 말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구출하기 위한 전쟁을 치루고 승리를 했지만 노략품도 다 돌려주고, 롯도 돌아가고 자기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여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네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없는 절망 가운데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한 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오실 예수님을 믿고 신약의 사람들은 오신 예수님을 보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적용된 원리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진정한 복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7,8).” 다윗은 왕이요 장군이요 시인이요 엄청난 부를 소유했지만 이런 것이 그를 복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는 것을 진정한 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사함을 받았을 때 지고한 행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되었을 때, 그의 양심이 깨끗함을 받게 되었을 때 가장 복 있는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이십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도외시한 채 열광적으로 믿으라는 광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현실의 문제를 못 본체 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을 하나님의 약속에 비추어서 곰곰이 생각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로마서 3:21-4:25
요절 로마서 3:24
믿음의 본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 믿음이 없는 세상이 그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배웠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다 죄 아래 있어서 심판을 받고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도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시간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거와 본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쓰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에 대해서 나누는 가운데 은혜받기를 기도합니다.
I.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3:21-31)
“이제는 율법 외에 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 이제는 이라는 말은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심판에서 구원으로, 율법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에 대해서 이미 예언해 오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죽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불의한 자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화목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값없이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 편에서 노력하거나 투쟁을 하거나 자선 행위를 하거나 고행을 하거나 어떤 모양이든지 인간의 업적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을 다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자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천성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으켜 주셔서 우리가 반응하게 되는 태도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 상태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믿음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권유할 때 “잘 믿어지지 않지만 일단 믿어시라니까요”라고 권유하는 것은 확률을 믿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든 일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밀마암는다고 했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흑암 가운데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 빛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천지 창조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이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혼돈과 어두움 속에서 있던 인간의 마음에 홀연히 빛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에 역사합니다. 복음 전파와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죄인 된 원래 상태에서 믿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는 수동적으로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기초해서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소원을 일으키시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영적인 소원을 불러일으키시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충분히 전한 다음에 결단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제시하고 조용히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인간 편에서 주도권을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생기게 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신비롭습니다. 성령을 통한 깨달음, 정서적인 감동, 죄인으로서의 통회, 슬퍼함, 애통함, 정죄감등을 동반하면서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 후에 의지로 연결됩니다. 방향 전환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결심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지정의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홀연히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결코 구원이 취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면서 열매를 맺어갑니다. 사람마다 진행 속도나 상황이 다 다릅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믿음의 양태는 다양합니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 은사로 주어지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태산을 옮기는 믿음,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면 죄를 범한 사람이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영광이란 무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팬텀급 정도가 되는데 인간은 모기만도 못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무가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수준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성경 중에서 가장 명쾌하게 기독교 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란 죄인 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 값, 즉 죄책과 형벌의 값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이 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값없이 거저 얻는 의입니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가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그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이 됩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합니다(레17:1). 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구약에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습니까(히 9:14)?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끓어오르셨는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누그러지셨고 가라앉히셨습니다. 사람도 불의하다고 느끼면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한 분노로 인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짓는 죄도 그리스도의 동일한 보혈 공로로 씻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무조건 의롭다고 하셨으면 그러한 판단 자체가 불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담당한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의로운 판단이시요 의로운 행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칭의의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믿는 자가 받는 의(義)의 정당함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轉嫁)시키셨으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은 이 칭의는 본성적으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법적으로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법정적(法廷的)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성도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심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또한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법적으로 완전한 의인이지, 실제적으로는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겸손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의인으로서 죄와 싸우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구원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삶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조화가 되었습니다. 사랑과 공의는 모순되지만 십자가 위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무가치한 죄인들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법으로 자랑하겠습니까? 우리의 의입니까? 우리의 행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믿음의 법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진실로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구원 진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효력 있는 진리입니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요 예언과 성취입니다.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죽음이었고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받아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Ⅱ. 믿음으로 의에 이른 아브라함 (4:1-25)
이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에 이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창세기 15: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믿음은 행위와 다릅니다. 믿는다는 말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구출하기 위한 전쟁을 치루고 승리를 했지만 노략품도 다 돌려주고, 롯도 돌아가고 자기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여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네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없는 절망 가운데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한 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오실 예수님을 믿고 신약의 사람들은 오신 예수님을 보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적용된 원리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진정한 복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7,8).” 다윗은 왕이요 장군이요 시인이요 엄청난 부를 소유했지만 이런 것이 그를 복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는 것을 진정한 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사함을 받았을 때 지고한 행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되었을 때, 그의 양심이 깨끗함을 받게 되었을 때 가장 복 있는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이십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도외시한 채 열광적으로 믿으라는 광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현실의 문제를 못 본체 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을 하나님의 약속에 비추어서 곰곰이 생각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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