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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2강(1:18-3:30) 믿음이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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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827회 작성일 10-09-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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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 2 강                                                             
말씀 로마서 1:18-3:20
요절 로마서 1:18
믿음이 없는 세상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오늘 본문은 죄의 보편적인 지배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21-4:25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 된 참 모습은 신경 쓰지 않고, 덮어 두고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복음 전도자로서 예수님을 믿으면 평안하고 사업도 잘 되고 성공한다는 말은 잘못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동기를 이렇게 인간적인 동기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얻게 되면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고, 얻지 못하면 실망해서 안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지 자각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즉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의 자기 발견을 건너뛰어서는 안 됩니다. 듣기 싫어해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희석하거나 변질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편구원론 등으로 희석시켜서는 안 됩니다. 인간 세상은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고 있습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구원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이 시간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고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깊이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Ⅰ.이방인의 죄 (1:18-32)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상을 숭배합니다. 무신론을 주장했던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종교를 없이하지 못했습니다. 무신론적인 가치관이 팽배한 이유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죄를 짓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서 영광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죄는 불의 즉 도덕적 윤리적인 죄로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법정에서도 거짓말로 도배를 하고 사기치고 속입니다. 도적질하고 간음을 행합니다. 나중에는 강도짓을 하고 죽이고 죽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죄악 되게 행하는 뿌리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명백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대충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어떤 문명이건 최고의 건축물과 문화의 흔적들은 신에게 제사지낸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종교성은 모든 인간이 짐승과 달리 지니고 있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 남미 잉카제국의 사람들, 북미의 인디언들, 유럽의 고대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물을 드렸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비를 내려주시도록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신으로 섬깁니다. 그가 의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본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을 신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잉카제국에서는  독수리, 뱀, 퓨마를 숭배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은 모든 대륙에서 뱀을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주체사상을 숭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영화배우들을 스타로서 숭배합니다. 일본의 한 신사는 금덩어리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그 신사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우상 공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우상 숭배는 사람의 허무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과 음란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은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운 짓을 서슴없이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으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함으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니 더욱 쾌락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곧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여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에이즈라는 질병이 이 사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동성연애를 죄라고 말하면 사회복지에 관련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동성연애가 죄라고 하면 벌금을 내고 때로는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동성연애자들을 사회적인 약자라고 생각하여 이들을 법으로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동성애가 법의 보호 아래 퍼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죄에 대해서 어떤 처벌을 내리십니까? 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다고했고 28절에서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내어 버려두는 것은 그 지속성으로 인해서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성격은 당장에 무서운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합당하치 못한 일들을 행하도록 내어 버려두는 것입니다. 무가치한 생각에 내어 버려두심으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무가치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짐승만도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사람들 마음에는 선함, 평화, 온유, 진실함, 희생적인 사랑과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였습니다. 선을 악하다고 하고 악을 선하다고 하는 가치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이방 세계의 도덕적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우상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진화론에 기초한 생각들을 과학적인 진리처럼 배워온 학생들에게 진화론의 허구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진화론은 열역학 제 2 법칙을 어기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도는 증가한다는 것이 열역학 제 2 법칙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도가 감소하고 자연에 더 정교한 질서가 세워져 간다는 것인데 이는 거짓된 것입니다. 자연발생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컴퓨터는 0과 1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적인 지성을 가진 존재가 프로그램을 짜지도 않았는데 자연적으로 컴퓨터가 작동됩니까? 인간의 유전인자는 이보다 복잡한 네 개의 유전인자 배열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정교한 조직이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 질 수 있습니까?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이십니다. 아멘.

Ⅱ. 유대인의 죄 (2:1-3:8)

  그러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어떠합니까? 그들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남을 판단할 도구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정죄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그들이 이방인들과 같은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 선생으로서 이방인들이 행하는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21-24절을 보면 구체적으로 그들은 도둑질 말라 선포하면서 도둑질 하고, 간음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간음하고,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 중에서 욕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셨습니까?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참으심은 그들을 인도하여 회개하도록 돕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으로 하십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자기만이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어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기쁨인 것입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분노가 함께 하기에 평강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마음이 불안하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지난 번에는 신문에서 보니 한 사람이 젊을 때 공중전화를 하다가 돈이 없어도 잘 걸리자 동전을 넣지 않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서 전화회사에 지은 죄로 양심의 가책을 받다가 회개하는 편지와 함께 돈을 보내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 가운데 살고 있지만 죄짓고는 마음 편히 못삽니다. 무릇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십니다.

  12절은 중요한 결론입니다. “무릇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으로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의지하고 자랑하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도 가르치는 것과 실제 생활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 의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신학교 교수님들과 목사님들과 성경 선생님들은 다 믿음이 좋고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잘 가르친다고 해서 훌륭한 실천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자기 훈련이 없으면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남을 책망하기보다 자신을 책망합니다. 남에게 분노하기보다 참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기를 힘쓰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남이 책망하면 그것도 옳으니 말없이 책망을 받습니다. 남을 판단할 일이 있지만 자신을 돌아보면 그와 다를 바가 없으니 또 참습니다. 이래저래 나이가 많아지면 말이 적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진정한 할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몸에 새기는 것을 할례라고 생각했고 할례를 받은 자는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그 할레가 무할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기지 않겠습니까?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데 불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면 신자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그를 판단치 아니하겠습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름뿐인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중요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물세례보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면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은 누구이고 인생은 무엇인지 진리의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음으로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미쁘심을 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온 인류에 대해서 선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는 나으뇨라고 묻습니다.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물 컵 속에 잉크를 떨어뜨릴 때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전체가 다 시커멓게 오염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서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 없이도 잘 살아 갑니다. 그러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인간은 그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실상에 대한 신랄한 고발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이 죄를 깨닫는 것이 복음 전도의 중요한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선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보면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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