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1(1:1-17) 믿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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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 1 강
말씀 로마서 1:1-17
요절 로마서 1:17
믿음으로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가 기독교 역사에 끼쳐온 영향은 신약에 있는 어떤 책보다도 막대합니다. 중세시대에 기독교가 가장 큰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어거스틴이 변증을 하여 이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32세에 회심하게 되는데 그의 회심을 일으킨 것이 롬13:13,14절입니다. 로마서 1:17절은 독일 마틴 루터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죤웨슬리는 1737년 모라비안 선교회의 모임에서 누군가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론을 읽는 것을 듣다가 변화가 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하여,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적을 부정하고 성경을 인간 이성으로 난도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가 1,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상황을 보고나서 로마서 주석을 써서 자유주의적인 낙관론에 대해서 맹렬한 공격을 했습니다. 그의 로마서 주석은 자유주의에 철퇴를 가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계몽을 하고 교육을 해도 인간은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죄책에 대해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롬1:18절 이하에 나오는 인간의 불경건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로마서 주석 이후에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지 못하고 쇠퇴해 갔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시대마다 변화시키고 부흥시키는 촉매제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로마서는 왜 필요할까요? 영국의 세계적인 우주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태양계와 같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이 많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우주는 자연발생적으로 유에서 지적 생명체가 진화를 계속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론은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고 변화되고 있고 변화될 것입니다. 지금은 상대주의적인 생각들이 힘을 얻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생각들이 편만해지고 있습니다. 범죄는 더욱 많아지고 점점 더 흉악해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이 시대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애쓰면서 로마서를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변화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AD 57년 경 고린도에서 로마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로마 교회의 대다수는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세우지도 않았고 방문해보지도 않은 교회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편지를 썼을까요? 로마서 15:19절에 보면 자신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일루리곤은 아드리아 해 동쪽에 있는 큰 산맥으로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나와 전도하러 갔던 첫 라틴어 사용 지방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행20:1). 그의 목표는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는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 로마에 들려야 했고 로마 성도들의 후원을 받고 땅 끝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가 자기를 후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럴러면 로마 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성도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습니다. 바울이 늘 평판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에서 그를 불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로마서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골자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그 이름을 위하여(1-7) : 먼저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2).”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을 갖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지독해서 크리스천들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벌벌 떨 정도였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의 위임을 받고 다메섹에 까지 가서 크리스천들을 핍박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습니다(3,4). 그는 왕이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합니다(5).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고 순종하게 도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서 그 권위로 일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해 보입니다. 몇 마디 말로 믿음을 가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성령께서 쓰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깨달음이 있고 마음에 감동이 생기고 소원이 생겨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때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확신에 넘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한 사람이 말씀을 듣고 믿음에 이르게 되는지 그리고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 되는지 로마서를 계속 공부하는 가운데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싶은 소원으로 충만했지만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과 자기 의가 영적인 소경과 같이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자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새롭게 연구하는 가운데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눈을 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서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무수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인생 목적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자할 때 사람을 구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관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불같은 열심으로 인해서 다시 세계는 시끄러웠습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위해서 살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구원을 받고 제자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평강은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히 성취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죄와 질병으로 인해서, 사망과 애통함으로 인해서 진정한 평강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평강은 모든 안녕과 축복을 누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도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빚진 자 사도 바울(8-15)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로마 성도들로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울 만큼 항상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제사장 나라로서 고린도에 있지만 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한 영국의 할머니가 한국에 와보지도 않았지만 한국 백성들을 위해서 일생동안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한 선교사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계 각처에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친히 일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파송한 선교사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 나아가기를 구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보기 원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곧 그들과 자신의 믿음으로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자신도 그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서로 위로를 받고자 함은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열매를 맺고자 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은 누구에게 천원이라도 빚을 지고 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여 자신과 동역자들이 쓸 것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그가 전에는 복음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그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못된 짓을 하고 있었지만 오래 참으시고 때가 되자 그에게 나타나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값없이 받은 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이 세계 만민을 살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심장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탔습니다. 그는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처음에는 빚진 자의 심정이 뜨겁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의가 생기고 양들에게 채권자의 심정이 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수고에 대해서 반드시 열매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수고한 만큼 열매가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 받은 열매도 많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수고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수고할 수 있는 힘과 지혜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흉악한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이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셋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6-17) :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고소하고 빌라도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했지만 아직도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서도 제자들과 바울과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만큼 큰 기적도 없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그들에게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미련해보였습니다. 헬라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특별한 지식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특별한 지식을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넓은 의미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하고 되는대로 살던 사람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사명인으로 사는 것도 구원입니다. 자신을 한 없이 열등하게 생각하고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매일 밤 악령에 시달리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던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도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만 보다가 소심하게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서 소신대로 살기도 합니다. 중풍병자가 무기력과 절망에서 구원을 받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도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했길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데 지금도 계속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세 가지로 밝혀집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소유하신 도덕적 성품으로서의 의, 공의로서의 의를 말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만 가지고 있으면 마틴 루터와 같이 절망하고 맙니다. 마틴 루터는 성실한 자세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 앞에 절망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도 이기적인 처사가 아닌가 생각하며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만 생각한다면 그 앞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절망감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발견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는 루터가 새롭게 깨닫게 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그는 이 의를 발견하고 영적인 방황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그 의는 구체적으로 로마서 3장 21,2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3강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로서의 의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과 동의어처럼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시궁창 같은 인간의 처지로 내려와 불의한 죄인을 의로운 신분으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구원 활동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사야 46:13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까?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네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신실함으로부터 인간의 신실함으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믿음이 인간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2) 한 사람의 믿음에서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입니다. 한 사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그 후손들에게 믿음이 전수되었듯이 한 사람의 믿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3) 초신자의 믿음의 단계에서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는 어리고 미숙하지만 지식이 쌓이고 체험이 쌓이면서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4)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믿음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가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삽니다.
사도 바울은 법대로 살고자 몸부림을 쳤는데 탐내지 말라는 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구원의 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면 의롭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굳게 붙잡고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어디에 이르렀던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로마서 1:1-17
요절 로마서 1:17
믿음으로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가 기독교 역사에 끼쳐온 영향은 신약에 있는 어떤 책보다도 막대합니다. 중세시대에 기독교가 가장 큰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어거스틴이 변증을 하여 이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32세에 회심하게 되는데 그의 회심을 일으킨 것이 롬13:13,14절입니다. 로마서 1:17절은 독일 마틴 루터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죤웨슬리는 1737년 모라비안 선교회의 모임에서 누군가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론을 읽는 것을 듣다가 변화가 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하여,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적을 부정하고 성경을 인간 이성으로 난도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가 1,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상황을 보고나서 로마서 주석을 써서 자유주의적인 낙관론에 대해서 맹렬한 공격을 했습니다. 그의 로마서 주석은 자유주의에 철퇴를 가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계몽을 하고 교육을 해도 인간은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죄책에 대해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롬1:18절 이하에 나오는 인간의 불경건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로마서 주석 이후에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지 못하고 쇠퇴해 갔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시대마다 변화시키고 부흥시키는 촉매제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로마서는 왜 필요할까요? 영국의 세계적인 우주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태양계와 같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이 많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우주는 자연발생적으로 유에서 지적 생명체가 진화를 계속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론은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고 변화되고 있고 변화될 것입니다. 지금은 상대주의적인 생각들이 힘을 얻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생각들이 편만해지고 있습니다. 범죄는 더욱 많아지고 점점 더 흉악해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이 시대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애쓰면서 로마서를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변화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AD 57년 경 고린도에서 로마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로마 교회의 대다수는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세우지도 않았고 방문해보지도 않은 교회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편지를 썼을까요? 로마서 15:19절에 보면 자신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일루리곤은 아드리아 해 동쪽에 있는 큰 산맥으로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나와 전도하러 갔던 첫 라틴어 사용 지방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행20:1). 그의 목표는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는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 로마에 들려야 했고 로마 성도들의 후원을 받고 땅 끝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가 자기를 후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럴러면 로마 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성도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습니다. 바울이 늘 평판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에서 그를 불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로마서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골자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그 이름을 위하여(1-7) : 먼저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2).”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을 갖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지독해서 크리스천들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벌벌 떨 정도였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의 위임을 받고 다메섹에 까지 가서 크리스천들을 핍박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습니다(3,4). 그는 왕이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합니다(5).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고 순종하게 도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서 그 권위로 일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해 보입니다. 몇 마디 말로 믿음을 가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성령께서 쓰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깨달음이 있고 마음에 감동이 생기고 소원이 생겨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때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확신에 넘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한 사람이 말씀을 듣고 믿음에 이르게 되는지 그리고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 되는지 로마서를 계속 공부하는 가운데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싶은 소원으로 충만했지만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과 자기 의가 영적인 소경과 같이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자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새롭게 연구하는 가운데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눈을 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서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무수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인생 목적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자할 때 사람을 구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관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불같은 열심으로 인해서 다시 세계는 시끄러웠습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위해서 살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구원을 받고 제자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평강은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히 성취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죄와 질병으로 인해서, 사망과 애통함으로 인해서 진정한 평강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평강은 모든 안녕과 축복을 누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도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빚진 자 사도 바울(8-15)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로마 성도들로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울 만큼 항상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제사장 나라로서 고린도에 있지만 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한 영국의 할머니가 한국에 와보지도 않았지만 한국 백성들을 위해서 일생동안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한 선교사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계 각처에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친히 일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파송한 선교사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 나아가기를 구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보기 원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곧 그들과 자신의 믿음으로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자신도 그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서로 위로를 받고자 함은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열매를 맺고자 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은 누구에게 천원이라도 빚을 지고 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여 자신과 동역자들이 쓸 것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그가 전에는 복음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그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못된 짓을 하고 있었지만 오래 참으시고 때가 되자 그에게 나타나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값없이 받은 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이 세계 만민을 살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심장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탔습니다. 그는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처음에는 빚진 자의 심정이 뜨겁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의가 생기고 양들에게 채권자의 심정이 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수고에 대해서 반드시 열매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수고한 만큼 열매가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 받은 열매도 많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수고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수고할 수 있는 힘과 지혜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흉악한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이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셋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6-17) :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고소하고 빌라도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했지만 아직도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서도 제자들과 바울과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만큼 큰 기적도 없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그들에게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미련해보였습니다. 헬라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특별한 지식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특별한 지식을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넓은 의미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하고 되는대로 살던 사람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사명인으로 사는 것도 구원입니다. 자신을 한 없이 열등하게 생각하고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매일 밤 악령에 시달리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던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도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만 보다가 소심하게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서 소신대로 살기도 합니다. 중풍병자가 무기력과 절망에서 구원을 받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도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했길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데 지금도 계속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세 가지로 밝혀집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소유하신 도덕적 성품으로서의 의, 공의로서의 의를 말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만 가지고 있으면 마틴 루터와 같이 절망하고 맙니다. 마틴 루터는 성실한 자세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 앞에 절망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도 이기적인 처사가 아닌가 생각하며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만 생각한다면 그 앞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절망감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발견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는 루터가 새롭게 깨닫게 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그는 이 의를 발견하고 영적인 방황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그 의는 구체적으로 로마서 3장 21,2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3강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로서의 의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과 동의어처럼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시궁창 같은 인간의 처지로 내려와 불의한 죄인을 의로운 신분으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구원 활동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사야 46:13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까?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네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신실함으로부터 인간의 신실함으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믿음이 인간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2) 한 사람의 믿음에서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입니다. 한 사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그 후손들에게 믿음이 전수되었듯이 한 사람의 믿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3) 초신자의 믿음의 단계에서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는 어리고 미숙하지만 지식이 쌓이고 체험이 쌓이면서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4)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믿음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가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삽니다.
사도 바울은 법대로 살고자 몸부림을 쳤는데 탐내지 말라는 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구원의 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면 의롭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굳게 붙잡고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어디에 이르렀던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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