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일용할 양식 교육 제 3강(벧전 1:13-2:3) 일용할 양식과 믿음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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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교육 제3
말씀 베드로전서 1:13-2:3
요절 베드로전서 2:2
일용할 양식과 믿음의 성장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지난 주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할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 같이 형통하게 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일용할 양식과 믿음의 성장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려면 젖을 잘 먹고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들이 영적인 성장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젖입니다. 키가 크는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잘 먹지만 키가 자라지 않는 아이들은 편식을 많이 하거나 잘 먹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장을 잘 하려면 일용할 양식을 맛있게 잘 먹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AD64년경 네로의 대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에 로마에서 핍박으로 인해 소아시아 지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박해를 견디며 더 나아가 나그네의 인생철학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부터 12절 사이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 신자들의 산 소망이 무엇인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동정하고 위로하기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3a). 먼저 죄인들을 지극히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을 찬송합니다(3b). 그리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소망, 즉 하나님께서 하늘에 우리를 위해 간직하신 기업을 잇게 될 것을 말합니다(4). 또 이 믿음의 시련이 정금보다도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는 소망을 심고 있습니다(7).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사랑하며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였습니다(8). 이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9). 이 구원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예언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할 만큼 귀한 것입니다(10-12).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시련을 통해 믿음이 연단되고 이로 인해 영혼의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자들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1.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13-21).
13절 말씀은 신자들이 영적 긴장을 풀지 말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 영적 긴장을 풀 때 안일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세상 풍조에 말려들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수양회 이후에 날씨도 너무 덥고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없으면 긴장이 풀려서 낮 시간을 잠으로 소일하거나 날씨 탓을 하며 허비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나태해지고 육신의 본성대로 행하기 쉽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우리에게 무엇이라 권면합니까? 14,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는 과거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불순종의 자식으로서 몸의 사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때는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즐기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회개하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합니까? 왼손에 성경책을 들고 경건한 모습으로 걸어가거나 두 손을 모아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입니까? 거룩한 삶은 경건의 모양만 갖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구별된다’는 것으로서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죄와 구별된 성결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음란하고, 거짓되게 산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불신자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과 행동과 실생활에서 믿음직하고 어딘지 모르게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또한 죄의 소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성결한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때 내적인 힘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거룩함을 사모하는 욕망이 있고, 한편으로는 육신의 본성대로 살고자 하는 동물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를 짓고 타락하고 싶은 죄의 소욕이 있고, 반대로 경건하게 살고 싶은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동물적인 육신의 본성이나 죄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황에 따라서 또는 육신의 본성대로 살 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같이 사정없이 타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첫째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이 말씀은 레위기 11:45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속하신 것은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의 삶의 표준은 높습니다. 신자는 상대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두드러진 속성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1서 4:8)하는 것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계4:8)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분으로서 죄를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습이 잘 나옵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짐승의 피 뿌림으로 죄를 속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사서 죽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거룩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거룩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말씀을 좇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한량없이 부어주심으로 거룩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사모하여 거룩하심을 본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만 우리 속에 죄를 즐기고 싶은 죄의 소욕이 활화산 같이 내 마음 속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여 죄의 소욕을 부채질 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애는 대중가요의 영원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사랑보다는 이별에 대한 가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두 번 이별을 경험하고 결혼에 이르던 과거 세대와 달리 쉼 없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젊은 세대의 연애 풍속이 사랑보다는 이별 가사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즈음의 청소년들은 외동이로 태어나서 황태자와 황공주와 같이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이거나 타인에게 냉소적인 생활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2010년대 가사는 주로 “내 멋대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거지 같은, 미친, 꺼져, 웃겨, 너 때문에 미쳐 라고 해야 필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예뻐/ 네가 뭔데 감히 누굴 평가해/ … 넌 완전히 빠질 걸 이젠 나만 바라봐’ 등등. 이처럼 사회가 병들고 셀프 홀릭 문화, 음란 퇴폐 문화가 거대하게 형성되자 죄의식이 약화되고 점차 교회 안에도 알게 모르게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약 0.4%의 소금이 있는데 이것이 거대한 바닷물의 부패를 방지해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을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실된 신자가 0.4%만 있어도 사회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전국민의 25%의 엄청난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을 받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믿으면 축복 받고 승리하고 잘 된다”는 구복신앙만 강조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등한시 하였습니다. 신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윤리, 도덕 문제는 도외시 하였습니다. 사명인이지만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명만 강조하다보니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그런 삶을 자랑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때로는 쓸데없이 핍박을 받고 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믿고 실제 삶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이기적인 구복신앙에 빠진다면, 또는 사명인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고자 힘쓰지 않는다면, 사회에 전혀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신앙 공동체마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로부터 시작하여 거룩한 삶,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경건주의 태동 동기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야곱 스페너나,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요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은 도덕적 부패와 타락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경건한 삶을 살므로 그 사회에 경건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20년 전에는 캠퍼스에 만연한 사회주의 사상과 복음으로 싸워 승리했습니다. 오늘날은 더 거센 물결로 도전해 오는 세상의 음란 문화, 이기주의, 인본주의와 복음으로 맞서 싸움으로 캠퍼스를 구원하고 이 시대를 구원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죄에는 열매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유나 지위로 타인을 평가합니다. 외모가 뛰어난 것도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직장에 들어가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과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a),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 둘째 사망입니다(계21:8). 거룩하신 하나님은 음란이 극에 달한 소돔 고모라성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셨습니다(창19:29). 또한 어디를 가든지 그 도시가 음란과 우상 숭배로 충만할 때 지진으로 흔들고 화산으로 덮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보배피로 구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값비싼 댓가를 치루심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는 죄악된 본성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도 안 되고, 금이나 은으로도 안 되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만이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산 신자는 이 구원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22).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과거에는 형제를 진실 되게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사랑했다가 힘들고 필요 없으면 차버리는 것이 세상 친구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거짓 없이 진실 되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합니까? 22b절을 보십시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믿는 사람끼리 뜨겁게 사랑하려면 먼저 상대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이해해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려면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려면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려면 인사도 뜨겁게 하고 눈짓이라도 뜨겁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는 사람끼리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때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죄악 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됩니다. 3. 말씀을 사모해야 됩니다(1:23-2:3).
23절을 보십시오. 신자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거듭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아이는 헐떡거리며 젖을 사모합니다. 아이는 생명을 걸고 맛있고 신나게 절실하게 간절히 필사적으로 젖을 사모합니다. 이는 생명과 성장에 관계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젖을 먹을 때 통통하게 자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씀을 사모해야 됩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을 먹어야 할까요? 이는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있을 때 죄의 소욕을 이기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말씀은 성령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기록하신 것으로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영적 성장의 비결은 주야로 성경을 다독하며 말씀의 샘을 파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시는 양식 말씀을 사모하여 먹는 것입니다.
그 때 죄의 소욕도 물러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될 때 말씀이 나의 영혼의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매일 일용할 양식 말씀을 먹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말씀 베드로전서 1:13-2:3
요절 베드로전서 2:2
일용할 양식과 믿음의 성장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지난 주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할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 같이 형통하게 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일용할 양식과 믿음의 성장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려면 젖을 잘 먹고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들이 영적인 성장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젖입니다. 키가 크는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잘 먹지만 키가 자라지 않는 아이들은 편식을 많이 하거나 잘 먹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장을 잘 하려면 일용할 양식을 맛있게 잘 먹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AD64년경 네로의 대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에 로마에서 핍박으로 인해 소아시아 지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박해를 견디며 더 나아가 나그네의 인생철학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부터 12절 사이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 신자들의 산 소망이 무엇인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동정하고 위로하기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3a). 먼저 죄인들을 지극히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을 찬송합니다(3b). 그리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소망, 즉 하나님께서 하늘에 우리를 위해 간직하신 기업을 잇게 될 것을 말합니다(4). 또 이 믿음의 시련이 정금보다도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는 소망을 심고 있습니다(7).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사랑하며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였습니다(8). 이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9). 이 구원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예언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할 만큼 귀한 것입니다(10-12).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시련을 통해 믿음이 연단되고 이로 인해 영혼의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자들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1.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13-21).
13절 말씀은 신자들이 영적 긴장을 풀지 말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 영적 긴장을 풀 때 안일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세상 풍조에 말려들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수양회 이후에 날씨도 너무 덥고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없으면 긴장이 풀려서 낮 시간을 잠으로 소일하거나 날씨 탓을 하며 허비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나태해지고 육신의 본성대로 행하기 쉽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우리에게 무엇이라 권면합니까? 14,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는 과거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불순종의 자식으로서 몸의 사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때는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즐기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회개하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합니까? 왼손에 성경책을 들고 경건한 모습으로 걸어가거나 두 손을 모아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입니까? 거룩한 삶은 경건의 모양만 갖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구별된다’는 것으로서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죄와 구별된 성결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음란하고, 거짓되게 산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불신자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과 행동과 실생활에서 믿음직하고 어딘지 모르게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또한 죄의 소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성결한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때 내적인 힘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거룩함을 사모하는 욕망이 있고, 한편으로는 육신의 본성대로 살고자 하는 동물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를 짓고 타락하고 싶은 죄의 소욕이 있고, 반대로 경건하게 살고 싶은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동물적인 육신의 본성이나 죄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황에 따라서 또는 육신의 본성대로 살 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같이 사정없이 타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첫째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이 말씀은 레위기 11:45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속하신 것은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의 삶의 표준은 높습니다. 신자는 상대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두드러진 속성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1서 4:8)하는 것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계4:8)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분으로서 죄를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습이 잘 나옵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짐승의 피 뿌림으로 죄를 속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사서 죽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거룩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거룩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말씀을 좇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한량없이 부어주심으로 거룩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사모하여 거룩하심을 본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만 우리 속에 죄를 즐기고 싶은 죄의 소욕이 활화산 같이 내 마음 속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여 죄의 소욕을 부채질 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애는 대중가요의 영원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사랑보다는 이별에 대한 가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두 번 이별을 경험하고 결혼에 이르던 과거 세대와 달리 쉼 없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젊은 세대의 연애 풍속이 사랑보다는 이별 가사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즈음의 청소년들은 외동이로 태어나서 황태자와 황공주와 같이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이거나 타인에게 냉소적인 생활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2010년대 가사는 주로 “내 멋대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거지 같은, 미친, 꺼져, 웃겨, 너 때문에 미쳐 라고 해야 필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예뻐/ 네가 뭔데 감히 누굴 평가해/ … 넌 완전히 빠질 걸 이젠 나만 바라봐’ 등등. 이처럼 사회가 병들고 셀프 홀릭 문화, 음란 퇴폐 문화가 거대하게 형성되자 죄의식이 약화되고 점차 교회 안에도 알게 모르게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약 0.4%의 소금이 있는데 이것이 거대한 바닷물의 부패를 방지해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을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실된 신자가 0.4%만 있어도 사회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전국민의 25%의 엄청난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을 받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믿으면 축복 받고 승리하고 잘 된다”는 구복신앙만 강조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등한시 하였습니다. 신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윤리, 도덕 문제는 도외시 하였습니다. 사명인이지만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명만 강조하다보니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그런 삶을 자랑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때로는 쓸데없이 핍박을 받고 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믿고 실제 삶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이기적인 구복신앙에 빠진다면, 또는 사명인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고자 힘쓰지 않는다면, 사회에 전혀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신앙 공동체마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로부터 시작하여 거룩한 삶,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경건주의 태동 동기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야곱 스페너나,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요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은 도덕적 부패와 타락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경건한 삶을 살므로 그 사회에 경건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20년 전에는 캠퍼스에 만연한 사회주의 사상과 복음으로 싸워 승리했습니다. 오늘날은 더 거센 물결로 도전해 오는 세상의 음란 문화, 이기주의, 인본주의와 복음으로 맞서 싸움으로 캠퍼스를 구원하고 이 시대를 구원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죄에는 열매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유나 지위로 타인을 평가합니다. 외모가 뛰어난 것도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직장에 들어가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과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a),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 둘째 사망입니다(계21:8). 거룩하신 하나님은 음란이 극에 달한 소돔 고모라성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셨습니다(창19:29). 또한 어디를 가든지 그 도시가 음란과 우상 숭배로 충만할 때 지진으로 흔들고 화산으로 덮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보배피로 구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값비싼 댓가를 치루심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는 죄악된 본성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도 안 되고, 금이나 은으로도 안 되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만이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산 신자는 이 구원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22).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과거에는 형제를 진실 되게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사랑했다가 힘들고 필요 없으면 차버리는 것이 세상 친구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거짓 없이 진실 되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합니까? 22b절을 보십시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믿는 사람끼리 뜨겁게 사랑하려면 먼저 상대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이해해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려면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려면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려면 인사도 뜨겁게 하고 눈짓이라도 뜨겁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는 사람끼리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때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죄악 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됩니다. 3. 말씀을 사모해야 됩니다(1:23-2:3).
23절을 보십시오. 신자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거듭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아이는 헐떡거리며 젖을 사모합니다. 아이는 생명을 걸고 맛있고 신나게 절실하게 간절히 필사적으로 젖을 사모합니다. 이는 생명과 성장에 관계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젖을 먹을 때 통통하게 자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씀을 사모해야 됩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을 먹어야 할까요? 이는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있을 때 죄의 소욕을 이기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말씀은 성령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기록하신 것으로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영적 성장의 비결은 주야로 성경을 다독하며 말씀의 샘을 파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시는 양식 말씀을 사모하여 먹는 것입니다.
그 때 죄의 소욕도 물러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될 때 말씀이 나의 영혼의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매일 일용할 양식 말씀을 먹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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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회 다운로드 | DATE : 2010-08-22 11: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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