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일용할 양식 교육 2강 (시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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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교육 제 2 강
말씀 시편 1:1-6
요절 시편 1:2
복 있는 사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는 영적 생활에서 기본인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지지난 주에 이어 계속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기본 생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만큼 기본 생활을 튼튼히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훈련은 아는 것에 있지 않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훈련은 아는 사실을 반복함으로써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습관처럼 몸에 익을 때 우리는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1-3절까지로 의인의 성격과 조건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4-6절까지로 악인의 조건이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궁극적인 파멸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배우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항상 푸르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I. 시냇가에 심은 나무 (1-3)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지극히 복된 사람입니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사람의 행동이 연속사진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따르고, 서고, 앉는다는 동작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 죄악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사는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가나안 땅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자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나중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다가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죄의 열매뿐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세상 사람을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나누었습니다. “악인”이란 곧 경건치 않는 자(ungodly)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를 모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꾀가 많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악인의 꾀를 열심히 배웁니다. 중세에는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이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는 성경처럼 읽혔다고 합니다. 군주론을 읽어보면 자기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를 쓰고 상대방을 철저히 파멸시켜야 한다는 “악인의 꾀”를 기막히게 가르쳐 줍니다. 악인들에게는 도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인간의 고귀한 인격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양의 가죽을 쓴 이리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합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악인의 꾀가 더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이 빠를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 가운데서도 몸은 교회에 나가지만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악인의 꾀를 좇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꾀는 일시적으로 자기를 흥하게 하나 필경은 망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악인의 꾀”를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죄인”이란 악인보다 더 질이 나쁜 사람을 가리킵니다. 악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격이 견실치 못한 사람이라면, 죄인(sinner)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빗나간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대담하게 죄를 짓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의 행동에 발을 맞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들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니이체는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후에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초인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인간적인 말만 하다가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죽었습니다. 또 20세기의 지성을 자랑하던 싸르뜨르는 니이체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니이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지만 싸르뜨르는 “신은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빼앗아 가는 원수이기 때문에 철저히 거부하고, 대적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약 결혼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이 창설하신 가정을 파괴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하나님을 대적하는 만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들의 장래가 염려스럽습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the scornful) 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를 넘어서 조소하는 단계에 온 사람들 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비웃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업신여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스스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결국은 우준하게 되어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 될 뿐입니다(롬1:22,23).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며 다만 그를 섬깁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상에서 복 있는 사람이 소극적으로 피하여야 할 것을 말했다면 이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죄악을 멀리할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오직” 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복 있는 사람이 절대적인 자세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는 것은 인생의 낙을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 가운데서만 찾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율법이 심히 부담이 됩니다. 말씀을 주면 인상을 쓰며, 완악한 마음으로 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어떻게 즐거워합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습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것을 내면화하며 실천하기 위해 나를 인도하시며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과정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사물을 나를 중심으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를 만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모든 사물을 두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며 우리의 내면은 성령의 밭가는 작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세는 우선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지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되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되 꾸준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우리의 마음 깊이 그리고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님의 교제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할 때 삶 전체에서 인생의 방향을 바꾸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숨겨진 사실, 즉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지식을 보여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머리에만 작용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해서 마음으로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서만 머물기 쉬운 말씀의 이해를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또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희망찬 하루를 계획합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루를 반성하며, 세상 죄악에 물든 마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를 어디에 비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고 열매 맺는데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토질이 좋지 않습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물이 넉넉한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행복한 나무는 없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냇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풍족한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잎이 푸르고 싱싱합니다. 또 철 따라 탐스러운 과실을 맺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생명수가 철철 넘치는 시냇물에 그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혜와 용기와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다 같이 시편 19:7-11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이처럼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또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또 시편119:9을 보면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 그러므로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범사에 다 형통하게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이 항상 생명력이 넘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우리 UBF는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학생 복음 운동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엔 무슨 특별한 비법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하다 보니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이는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일용할 양식과 매주 한 편의 진실한 소감을 감당하여 생명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1700명이 넘는 젊은 선교사들을 92개국에 파송하게 된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2010년 현재). 우리가 세계 선교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국내 역사는 어떠합니까?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 것처럼 우리가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일용할 양식과 소감을 통해서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 국내 역사도 성장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말씀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말씀을 많이 먹었다는 포만감에 빠지거나, 일용할 양식을 게을리 할 때 속이 썩은 고목나무가 되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지금 많은 선교단체들이 UBF의 방법대로 선교 역사를 감당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UBF가 어떻게 나갈 것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어떤 첨단 방식을 내놓기보다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이 먼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세계적인 말씀의 종들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과 주 한 편의 진실한 소감 투쟁을 잘 감당하여 좋은 믿음의 예를 남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II. 바람에 나는 겨(4-6)
4절을 보십시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기자는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자기 꾀를 좇아 삽니다. 진리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서 온갖 범죄를 일삼습니다. 또 그 마음이 교만하여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건한 자들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인 것처럼 우쭐거립니다. 또 이들은 일시적으로 부요하게 되어 떵떵거리며 권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악인들을 조금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겨는 작은 바람이 불어도 날립니다. 겨는 뿌리가 없습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열매도 없는 속이 텅 빈 쭉정이에 불과합니다. 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땔감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악인들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변덕스럽습니다. 열매 없는 생활이 무의미하고 공허합니다.
이들의 결국이 어떠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를 가려내십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꾸밀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보십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합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 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그러므로 죄인들은 결단코 의인의 모임에 들지 못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들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결코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늘 푸르며, 철을 따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과 주 한 편의 소감을 진실하게 감당하므로 생명의 말씀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시편 1:1-6
요절 시편 1:2
복 있는 사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는 영적 생활에서 기본인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지지난 주에 이어 계속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기본 생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만큼 기본 생활을 튼튼히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훈련은 아는 것에 있지 않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훈련은 아는 사실을 반복함으로써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습관처럼 몸에 익을 때 우리는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1-3절까지로 의인의 성격과 조건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4-6절까지로 악인의 조건이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궁극적인 파멸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배우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항상 푸르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I. 시냇가에 심은 나무 (1-3)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지극히 복된 사람입니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사람의 행동이 연속사진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따르고, 서고, 앉는다는 동작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 죄악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사는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가나안 땅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자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나중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다가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죄의 열매뿐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세상 사람을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나누었습니다. “악인”이란 곧 경건치 않는 자(ungodly)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를 모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꾀가 많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악인의 꾀를 열심히 배웁니다. 중세에는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이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는 성경처럼 읽혔다고 합니다. 군주론을 읽어보면 자기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를 쓰고 상대방을 철저히 파멸시켜야 한다는 “악인의 꾀”를 기막히게 가르쳐 줍니다. 악인들에게는 도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인간의 고귀한 인격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양의 가죽을 쓴 이리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합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악인의 꾀가 더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이 빠를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 가운데서도 몸은 교회에 나가지만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악인의 꾀를 좇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꾀는 일시적으로 자기를 흥하게 하나 필경은 망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악인의 꾀”를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죄인”이란 악인보다 더 질이 나쁜 사람을 가리킵니다. 악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격이 견실치 못한 사람이라면, 죄인(sinner)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빗나간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대담하게 죄를 짓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의 행동에 발을 맞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들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니이체는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후에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초인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인간적인 말만 하다가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죽었습니다. 또 20세기의 지성을 자랑하던 싸르뜨르는 니이체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니이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지만 싸르뜨르는 “신은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빼앗아 가는 원수이기 때문에 철저히 거부하고, 대적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약 결혼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이 창설하신 가정을 파괴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하나님을 대적하는 만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들의 장래가 염려스럽습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the scornful) 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를 넘어서 조소하는 단계에 온 사람들 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비웃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업신여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스스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결국은 우준하게 되어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 될 뿐입니다(롬1:22,23).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며 다만 그를 섬깁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상에서 복 있는 사람이 소극적으로 피하여야 할 것을 말했다면 이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죄악을 멀리할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오직” 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복 있는 사람이 절대적인 자세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는 것은 인생의 낙을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 가운데서만 찾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율법이 심히 부담이 됩니다. 말씀을 주면 인상을 쓰며, 완악한 마음으로 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어떻게 즐거워합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습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것을 내면화하며 실천하기 위해 나를 인도하시며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과정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사물을 나를 중심으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를 만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모든 사물을 두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며 우리의 내면은 성령의 밭가는 작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세는 우선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지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되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되 꾸준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우리의 마음 깊이 그리고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님의 교제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할 때 삶 전체에서 인생의 방향을 바꾸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숨겨진 사실, 즉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지식을 보여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머리에만 작용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해서 마음으로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서만 머물기 쉬운 말씀의 이해를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또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희망찬 하루를 계획합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루를 반성하며, 세상 죄악에 물든 마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를 어디에 비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고 열매 맺는데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토질이 좋지 않습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물이 넉넉한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행복한 나무는 없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냇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풍족한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잎이 푸르고 싱싱합니다. 또 철 따라 탐스러운 과실을 맺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생명수가 철철 넘치는 시냇물에 그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혜와 용기와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다 같이 시편 19:7-11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이처럼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또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또 시편119:9을 보면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 그러므로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범사에 다 형통하게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이 항상 생명력이 넘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우리 UBF는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학생 복음 운동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엔 무슨 특별한 비법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하다 보니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이는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일용할 양식과 매주 한 편의 진실한 소감을 감당하여 생명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1700명이 넘는 젊은 선교사들을 92개국에 파송하게 된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2010년 현재). 우리가 세계 선교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국내 역사는 어떠합니까?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 것처럼 우리가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일용할 양식과 소감을 통해서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 국내 역사도 성장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말씀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말씀을 많이 먹었다는 포만감에 빠지거나, 일용할 양식을 게을리 할 때 속이 썩은 고목나무가 되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지금 많은 선교단체들이 UBF의 방법대로 선교 역사를 감당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UBF가 어떻게 나갈 것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어떤 첨단 방식을 내놓기보다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이 먼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세계적인 말씀의 종들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과 주 한 편의 진실한 소감 투쟁을 잘 감당하여 좋은 믿음의 예를 남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II. 바람에 나는 겨(4-6)
4절을 보십시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기자는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자기 꾀를 좇아 삽니다. 진리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서 온갖 범죄를 일삼습니다. 또 그 마음이 교만하여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건한 자들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인 것처럼 우쭐거립니다. 또 이들은 일시적으로 부요하게 되어 떵떵거리며 권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악인들을 조금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겨는 작은 바람이 불어도 날립니다. 겨는 뿌리가 없습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열매도 없는 속이 텅 빈 쭉정이에 불과합니다. 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땔감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악인들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변덕스럽습니다. 열매 없는 생활이 무의미하고 공허합니다.
이들의 결국이 어떠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를 가려내십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꾸밀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보십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합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 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그러므로 죄인들은 결단코 의인의 모임에 들지 못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들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결코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늘 푸르며, 철을 따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과 주 한 편의 소감을 진실하게 감당하므로 생명의 말씀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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