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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요한복음 1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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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마태
댓글 0건 조회 1,802회 작성일 10-08-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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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요한복음 제 18 강
내가 왕이니라
말씀/요한복음 18:1-40
요절/요한복음 18: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우리는 지난 주 다윗동산 여름수양회를 통해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며 사랑고백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이전으로 돌아와 예수님의 체포당하시고 심문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말씀하시는 진리의 왕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이 진리의 왕이심을 깊이 영접하고,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내가 그니라(1-1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가르침을 마치신 후에 기도하셨습니다. 17장에서 이미 배운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세상에서 제자들이 보전되도록,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사람이 하나가 되길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가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모이시는 곳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유다가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곳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런데 4절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앞으로 당할 일을 아셨습니다. 사랑했던 제자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셨고, 또 당신이 체포당하시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리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앞으로 당할 일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안다면 이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닥칠 것을 아시고도 전혀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당당하게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 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하실 때 그들은 뒤로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지만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능력을 행하실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그들 앞에 나와 “내가 그니라.”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의 위엄 앞에 나자빠졌습니다. 그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무기를 들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지만 예수님에게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향해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내게 주신 사람들 중에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자기중심적이 되기 마련인데, 예수님은 위기의 때에도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칼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상대로 단독으로 칼을 빼들고 대항한 베드로는 참으로 용기가 있어 보입니다. 또한 스승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충성스러운 제자처럼 보입니다. 어두운 밤에 횃불 조명 아래서 상대방의 귀만 자른 베드로의 칼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과연 적의 귀를 자르기 위해 칼을 휘둘렀을까요? 아닙니다. 두려움과 혈기 때문에 아무든지 칼에 맞으면 맞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마구 휘두른 칼에 아니면 말고의 바로 그 말고의 귀가 잘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검을 쓰는 방법과 잔을 마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검을 쓰는 방법은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강해보이고 그 효과가 빨리, 시원스럽게 나타납니다. 또 멋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드로처럼 위기의 순간에 검을 휘두르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검을 사용하는 자는 검으로 망합니다(마26:52). 반면 잔을 마시는 것은 소극적이고 약하고 손해 보는 것 같아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검을 사용하고자 하셨다면 당장이라도 열두 영이 더 되는 천군천사를 불러 원수들을 싹 쓸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고 희생의 잔, 순종의 잔, 인내의 잔,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고자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잔은 쓰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확실하게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도 순간순간 검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부인하고 반발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해 칼을 휘두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칼을 잘못 휘둘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게 됩니다. 진정한 문제 해결은 칼에 있지 않고 잔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칼을 휘두르고 싶은 자기를 부인하고 칼을 집에 꽂아야 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내의 잔, 기도의 잔, 섬김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II. 진리의 왕 예수님(12-40)
마침내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고 결박되신 채로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으로 실제적인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 물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 꼬투리를 잡고자 했습니다. 또 제자들의 동향을 파악하여 모두 잡아들임으로 예수님의 조직을 완전히 뿌리 뽑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멀리서 듣고 있던 베드로는 아마 머리가 쭈삣 서고 오금이 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제자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시고, 교훈에 대해서만 은밀히 숨긴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치셨기 때문에 은밀히 말씀하신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물어본다면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서 알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던 대제사장의 아랫사람이 예수님을 치면서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다그쳤습니다. 이렇게 때리며 윽박지를 때 위축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더욱 분명하게 자신이 잘못하였다면 그 잘못한 것을 말하라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치느냐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안나스는 더 이상 심문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가야바에게 결박한 그대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고 있을 때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곁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25) 베드로는 얼떨결에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은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용감하게 칼을 빼들었던 그는 결국 일개 계집 종 앞에서 벌벌 떨며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분명한 결단이 없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할 일’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학점을 얻기 위해서 당할 일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죄악 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당할 일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영접하고 감당하고자 하는 결단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연약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학점을 얻고 싶지만 공부를 감당해야 하는 고난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한 형제는 여름방학에 계절 학기를 들은 것을 너무나도 후회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더위에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만 주위 사람들의 미움과 핍박을 두려워하며 타협하기도 합니다.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신앙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회사 동료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은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기도하는 사람을 딱 2명 보았는데 심책임하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황수석님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다른 동료에게 ‘왜 점심시간에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줄을 서 있는 동안에 기도한다고 변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할 때 당할 일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더욱 분명한 자세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감당할 힘과 용기를 주실 줄 믿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가야바에게서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직접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악자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끌고 온 사건이 종교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하며 본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죽이고자 하는 것은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님을 향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면서 제시한 죄목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입니까? 왕은 한마디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힘은 칼에 의한 힘일 수 있고 돈에 의한 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카리스마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끌 수 있는 힘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혁명가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권력은 칼에서 나왔고 근대 사회에서는 총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돈에서 나옵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권력 곧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힘을 소유한 사람이 왕입니다. 그래서 고 정주영 회장을 왕회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볼 때 예수님은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힘을 가졌다면 이렇게 무력하게 체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을 가졌다면 이슬람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출하고자 자살특공대를 조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볼 때 예수님은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에게 이런 연약하고 힘없는 예수님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단지 다른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질문을 하지 말고 직접 예수님께 대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빌라도에게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리고 영생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귀찮다는 듯이 “내가 유대인이냐?”하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넘겼으니 도대체 무엇을 하였느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예수님의 종들이 예수님을 위해 싸웠을 것이고 유대인들의 손에 넘기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왕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의 왕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왕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진리로 다스리시는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왕은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 힘으로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거짓과 비리, 부정부패와 권모술수,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스리는 왕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의 삶은 정말 고통스럽고 살기가 싫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왕 예수님은 진리로 다스리시는 왕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불변하는 가치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따라야 할 바른 길입니다.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거짓과 비진리로 가득한 이 세상에 진리로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선포하셨고 진리를 위해 죽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당장은 거짓이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총구로부터 나오는 권력이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돈의 위력을 볼 때마다 돈이 진리보다 그리고 하나님보다도 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진리가 이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총구나 돈이 힘이 있어 보이지만 총이나 돈으로 세워진 나라나 개인은 쉽게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불변하기 때문에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고 승리합니다. 지난 역사가 이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토록 왕으로서의 권세와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 거짓과 세상 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속하여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진리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나라가 영원하며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을 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들고 온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 많고 거짓된 세상에 진리를 증거 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진리를 증거 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 가운데 빠진 이래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써 이를 믿는 자를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진리를 위해 체포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진리를 영접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우리는 거짓된 세상에서 참된 삶을 살며, 추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에 속하기보다 유익에 속하고 재미에 속하려 합니다. 또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세상 사람들의 소리에, 사단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모습은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빌라도는 힘이 곧 진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힘 앞에 무력한 초라한 이스라엘의 왕이 증거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 했지만 빌라도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빌라도와 같이 진리의 세계로 초청을 받지만 자기 욕심대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로 유익을 줄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리의 세계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또 진리를 알지만 진리대로 살다가는 세상에서 손해보고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진리대로 살지 않고 세상과 진리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갑니다. 이런 자는 현명한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진리의 실용성을 따지는 자는 진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돼지에게 진주가 무가치하듯 당장 유익을 따지는 자에게 진리는 거추장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혹시 우리가 진리를 세상 사람들과 같이 실용성을 따지므로 진리의 왕 예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진리에 속하고,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왕이십니다. 또 진리로 다스리시며 진리를 증거하시는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시고 진리를 위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셨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서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대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우리를 두렵게 하고 억누르는 세상에서 진리에 기초하여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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