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년 여름수양회 - 네가나를사랑하느냐 (이요한)
페이지 정보

본문
2010년 동교, 영남, 인천 여름수양회 제 7 강
말씀 요한복음 21:1-25
요절 요한복음 21:1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아름다운 디베랴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간 제자들에게 숯불같이 뜨겁게 타오르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불씨를 새롭게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저 푸른 디베랴 바닷가로 달려 나가 우리를 찾아오신 사랑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장. 와서 조반을 먹으라 (1-14)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그 후'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하여 뿔뿔이 흩어져버린 제자들을 두 번이나 찾아오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 다시 한번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자칭 예수님의 주류 제자라고 자부하던 갈릴리 출신 일곱 제자들이 이곳 디베랴 바닷가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없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근심 어린 얼굴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가끔가다 깊은 한숨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습니다. 긴 침묵을 깨고 베드로가 어떤 말을 했습니까? 3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배에 오르는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베드로는 3년 전 바로 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은 빈 그물을 붙들고 있던 그를 찾아와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고, 거룩한 사명인의 삶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은혜에 감동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에게 큰 절망과 충격과 슬픔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장담해 놓고 닭 울기 전에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은 아무리 잊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3년전 모습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그물을 던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피래미 새끼 한 마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목자 생활도 실패했는데, 거기다가 뱃사나이로서도 이런 신세가 되자 “아! 내 인생은 왜 이리 되는 일이 없을까!!” 지난 3년 동안의 결과가 이 빈 그물처럼 허망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날이 새어 갈 때에 누가 그들을 찾아 왔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섰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디베랴 호숫가의 새벽바람을 맞으시며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패와 아픔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정하신 음성으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 Friends!"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사랑하는 친구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묻자, 제자들은 힘없이 "없구먼유~" 대답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예수님은 이들이 새롭게 실패의 바다, 절망의 바다에 도전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큰 고기떼가 갑자기 삶의 회의를 느낀 듯 집단으로 그물로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노력한 결과는 빈 그물이었지만 예수님의 한 말씀에 순종한 결과는 그물이 가득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삼년 전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처럼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처럼 도와주시고, 처음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게 은빛물고기를 걷어올리고 있을 때, 요한이 소리쳤습니다. “주님이시다” 요한은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무의식적으로 "겉옷"을 입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빨리 만나고 싶어 육지까지 약 90m를 단숨에 헤엄쳐 갔습니다. 베드로가 물살을 헤치며 저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향해 나아갈 때에 지난 3년 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오 주님, 이런 죄인을 다시 찾아오셨군요" 그의 눈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작은 배를 타고 주님을 향해 육지로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맞아 주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보니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피우신 빠알간 숯불이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숯불 위에 맛있는 떡과 생선을 못 자국난 그 손으로 친히 굽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주, 만유의 주님께서 배은망덕하고 허물진 제자들을 위해 맛있는 아침밥을 친히 짓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빠알갛게 타오르는 숯불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와 평화가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제일 먼저 예수님께 왔지만, 제일 먼 자리에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은은히 타오르는 숯불, 그 불길 속에서 그는 며칠 전 대제사장의 집 뜰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기억을 완전히 포맷(format)하고 다시 리부팅(rebooting)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한 그 기억은 마치 불에 덴 화인처럼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아시는 듯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며 분위기를 바꾸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민망한 김에 얼른 가서 그물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민망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기를 일일이 153마리까지 세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도마 위에 큰 고기를 올려놓고 "이 고기를 가져갈까, 저 고기를 가져갈까!" 뜸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에게 나아오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아침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다 같이 12절 상반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와서 조반을 먹으라!"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시는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와 허물 가운데 있을 지라도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무하고 밥을 먹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하고 밥을 먹으면 불편합니다. 웬수랑 밥을 먹으면 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밥먹다가 체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불러 주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저는 시골에서 어머니가 “승종아~밥먹어라” 부르시면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하면서 놀다가도 “네~ 가요” 하며 달려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어떨때 놀다가 배가 고픈데 왜 밥먹으라고 부르지 않나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그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조반을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알지만, 예수님이 제일 고통스러웠을 때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도망갔다는 죄의식과 불의감 때문에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못 자국난 손으로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맨 마지막에는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도 떡과 고기를 주셨습니다.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목이 멨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배반한 죄의식에 눌리고, 실패와 절망감에 짓눌렸던 제자들의 심령에 이제 주님의 사랑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벌이는 용서와 사랑의 Beach Party. 이것은 흡사 천국잔치의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부르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또 사랑하셨기 때문에 지치고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을 찬양합니다.
2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25)
디베랴 바닷가에서의 비치 파티(Beach Party)를 통해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던 제자들의 심령에는 이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잔잔히 밀려왔습니다. 새로운 삶의 희망이 샘솟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15절 상반 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하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공식적인 이름이 아니 개인적이고 친밀한 이름을 택하셨습니다. 사실 힘들어서 집으로 간 베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이름이였습니다. 그의 현재의 상태는 반석과 같은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전 예전 시몬의 모습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이라 부르시며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또 시몬 베드로에게 공식적인 질문이 아닌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깨어진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처음 그를 만나 제자로 부르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때, 그리고 다시 만난 이 순간에도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어떠했습니까? 중요한 순간에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베드로가 변심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도 여전히 속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내면의 연약함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원치 않게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등을 돌리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이 변치 않았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에 바다로 뛰어 들어서 헤엄쳐서 나아온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깨어진 사랑, 실패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이 사람들’과 ‘예수님’을 비교해서 어느 것을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영어 성경에 ‘these(이것들)'로 베드로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나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도 역시 나를 사랑하지?” 물으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전 같았으면 “당근이죠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보세요...” 그러나 베드로는 보여줄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부끄러운 모습만 다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 대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며,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터프가이 베드로답지 않은 연약한 대답 같지만, 실은 가장 진실한 대답이었습니다.
전에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며 자기 확신에 차서 외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전에 베드로가 인간적인 열심으로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자 사랑고백을 했다면, 이제는 다만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참된 사랑을 하기 원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실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볼 때, 우리는 실패속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성숙한 제자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5절과 다른 것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가 빠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요한과 야고보라는 막강한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맡기실 만큼 사랑하고 신뢰하셨습니다. 그는 수제자로서 요한이 항상 눈의 가시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보다 더 예수님께 인정받길 바랬습니다. “네, 주님, 제가 요한보다 조금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다른 사람보다 비교해서 사랑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사랑하는가 질문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진심을 예수님의 마음에 호소하였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진실 되게 사랑 고백했을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모든 불의감과 죄책감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깨질 뻔했던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관계성이 온전히 회복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내 마음을 앗아간 것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상대적인 것들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신6: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에게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은 나의 모든 힘과 정열, 청춘을 다 바쳐 사랑하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고 값진 인생을 살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실의와 절망에 빠져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다가도 학업과 직장에서 실패하면 손해의식이 듭니다. 양들과 동역자들이 아무 말 없이 곁을 떠날 때, 목자의 삶에 회의가 느껴지고,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우리의 형편과 상황을 다 아시고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OO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OO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진실된 사랑고백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 있든지 간에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 진실된 사랑을 고백할 때, 주님은 죄로 아파하고, 상처난 우리의 심령을 회복시키시고, 사랑의 관계성을 온전케 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간곡한 부탁이요 거룩한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보혈의 피를 흘리시기까지 양들을 사랑으로 섬겨왔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식을 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처럼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양무리를 먹이는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워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사랑 고백할 때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어린양을 먹일 때 우리는 주님의 더욱더 깊은 사랑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워봐야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캠퍼스에서 어린양을 먹이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더 깊은 사랑을 알아 가는 과정입니다. 저희 모두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각기 처한 곳에서 한 양을 먹이는 사랑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명에 실패한 제자들을 변함 없는 사랑으로 찾아오자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도 사도 베드로처럼 주님께 사랑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저희가 변함 없이 저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사랑 고백하는 가운데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치유되고 주님의 양 무리를 먹이는 목자요 선교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예수님보다 세상에서 성공과 물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졸업 후 좋은 직장을 잡으면 센터를 멀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에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만성간염에 걸리게 되어 하이닉스 반도체 연구원으로 면접까지 통과하였지만, 신체검사에서 간염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간염으로 인해 하루 14시간을 이상을 자도 피곤하였습니다. 대학원 동기들은 좋은 곳에 취직하여 잘 나가고 있는데 저는 형제 장막에 3년을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연애도 해보고 싶었는데 돈도 없고 몸은 피곤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예수님보다 세상 성공과 물질을 사랑할 때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두손들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해진 저의 마음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저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좌절감을 극복할 힘을 말씀을 통해 공급해 주셨습니다.
저는 질병의 한계를 극복하고 결혼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결혼도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은 직장도 없었던 저에게 루디아 목자님을 보내어 주시고 결혼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의 가정이 허바울, 박기현, 문예지, 현승윤, 박상철 형제 자매님들을 섬기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에서 3년 반을 근무하게 되었고 4개월간 미국 연수도 다녀올 수 있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작년에 여성 의류 부자재 무역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이안 무역 대표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또 회사 경영이 좀 더 좋아지면 수입차인 렉서스 IS350도 뽑아서 굴리고 싶었습니다. 이랜드와 같은 크리스챤 기업을 만드는 것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많은 오더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자금난으로 압박을 받고 중국에서 만든 제품에 하자가 생기고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여러 건 터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요 거래처에 매일 불려가 질책을 받아야 했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15억 이상의 손해를 떠 안아야 했습니다. 저는 15층 회사 옥상에서 뛰어 내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교사의 삶을 살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납기 연장을 해 준 적이 없던 바이어가 납기 연장을 해주는 기적과 같은 일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오더들도 하나 하나에 문제가 있었지만 기도하는 대로 해결을 받게 되어 손실이 대폭 삭감이 되는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통해 제가 예수님보다도 세상에서의 출세와 물질을 더 사랑했던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 주셔서 사업의 큰 어려움에서 저를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합니다.” 때때로 저는 생활비 많이 드는 곳인 미국에 선교사로 가야만 되는가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제가 저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는 선교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21:1-25
요절 요한복음 21:1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아름다운 디베랴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간 제자들에게 숯불같이 뜨겁게 타오르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불씨를 새롭게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저 푸른 디베랴 바닷가로 달려 나가 우리를 찾아오신 사랑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장. 와서 조반을 먹으라 (1-14)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그 후'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하여 뿔뿔이 흩어져버린 제자들을 두 번이나 찾아오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 다시 한번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자칭 예수님의 주류 제자라고 자부하던 갈릴리 출신 일곱 제자들이 이곳 디베랴 바닷가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없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근심 어린 얼굴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가끔가다 깊은 한숨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습니다. 긴 침묵을 깨고 베드로가 어떤 말을 했습니까? 3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배에 오르는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베드로는 3년 전 바로 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은 빈 그물을 붙들고 있던 그를 찾아와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고, 거룩한 사명인의 삶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은혜에 감동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에게 큰 절망과 충격과 슬픔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장담해 놓고 닭 울기 전에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은 아무리 잊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3년전 모습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그물을 던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피래미 새끼 한 마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목자 생활도 실패했는데, 거기다가 뱃사나이로서도 이런 신세가 되자 “아! 내 인생은 왜 이리 되는 일이 없을까!!” 지난 3년 동안의 결과가 이 빈 그물처럼 허망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날이 새어 갈 때에 누가 그들을 찾아 왔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섰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디베랴 호숫가의 새벽바람을 맞으시며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패와 아픔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정하신 음성으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 Friends!"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사랑하는 친구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묻자, 제자들은 힘없이 "없구먼유~" 대답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예수님은 이들이 새롭게 실패의 바다, 절망의 바다에 도전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큰 고기떼가 갑자기 삶의 회의를 느낀 듯 집단으로 그물로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노력한 결과는 빈 그물이었지만 예수님의 한 말씀에 순종한 결과는 그물이 가득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삼년 전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처럼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처럼 도와주시고, 처음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게 은빛물고기를 걷어올리고 있을 때, 요한이 소리쳤습니다. “주님이시다” 요한은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무의식적으로 "겉옷"을 입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빨리 만나고 싶어 육지까지 약 90m를 단숨에 헤엄쳐 갔습니다. 베드로가 물살을 헤치며 저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향해 나아갈 때에 지난 3년 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오 주님, 이런 죄인을 다시 찾아오셨군요" 그의 눈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작은 배를 타고 주님을 향해 육지로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맞아 주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보니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피우신 빠알간 숯불이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숯불 위에 맛있는 떡과 생선을 못 자국난 그 손으로 친히 굽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주, 만유의 주님께서 배은망덕하고 허물진 제자들을 위해 맛있는 아침밥을 친히 짓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빠알갛게 타오르는 숯불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와 평화가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제일 먼저 예수님께 왔지만, 제일 먼 자리에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은은히 타오르는 숯불, 그 불길 속에서 그는 며칠 전 대제사장의 집 뜰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기억을 완전히 포맷(format)하고 다시 리부팅(rebooting)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한 그 기억은 마치 불에 덴 화인처럼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아시는 듯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며 분위기를 바꾸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민망한 김에 얼른 가서 그물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민망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기를 일일이 153마리까지 세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도마 위에 큰 고기를 올려놓고 "이 고기를 가져갈까, 저 고기를 가져갈까!" 뜸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에게 나아오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아침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다 같이 12절 상반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와서 조반을 먹으라!"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시는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와 허물 가운데 있을 지라도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무하고 밥을 먹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하고 밥을 먹으면 불편합니다. 웬수랑 밥을 먹으면 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밥먹다가 체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불러 주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저는 시골에서 어머니가 “승종아~밥먹어라” 부르시면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하면서 놀다가도 “네~ 가요” 하며 달려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어떨때 놀다가 배가 고픈데 왜 밥먹으라고 부르지 않나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그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조반을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알지만, 예수님이 제일 고통스러웠을 때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도망갔다는 죄의식과 불의감 때문에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못 자국난 손으로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맨 마지막에는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도 떡과 고기를 주셨습니다.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목이 멨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배반한 죄의식에 눌리고, 실패와 절망감에 짓눌렸던 제자들의 심령에 이제 주님의 사랑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벌이는 용서와 사랑의 Beach Party. 이것은 흡사 천국잔치의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부르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또 사랑하셨기 때문에 지치고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을 찬양합니다.
2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25)
디베랴 바닷가에서의 비치 파티(Beach Party)를 통해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던 제자들의 심령에는 이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잔잔히 밀려왔습니다. 새로운 삶의 희망이 샘솟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15절 상반 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하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공식적인 이름이 아니 개인적이고 친밀한 이름을 택하셨습니다. 사실 힘들어서 집으로 간 베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이름이였습니다. 그의 현재의 상태는 반석과 같은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전 예전 시몬의 모습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이라 부르시며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또 시몬 베드로에게 공식적인 질문이 아닌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깨어진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처음 그를 만나 제자로 부르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때, 그리고 다시 만난 이 순간에도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어떠했습니까? 중요한 순간에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베드로가 변심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도 여전히 속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내면의 연약함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원치 않게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등을 돌리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이 변치 않았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에 바다로 뛰어 들어서 헤엄쳐서 나아온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깨어진 사랑, 실패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이 사람들’과 ‘예수님’을 비교해서 어느 것을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영어 성경에 ‘these(이것들)'로 베드로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나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도 역시 나를 사랑하지?” 물으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전 같았으면 “당근이죠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보세요...” 그러나 베드로는 보여줄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부끄러운 모습만 다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 대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며,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터프가이 베드로답지 않은 연약한 대답 같지만, 실은 가장 진실한 대답이었습니다.
전에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며 자기 확신에 차서 외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전에 베드로가 인간적인 열심으로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자 사랑고백을 했다면, 이제는 다만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참된 사랑을 하기 원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실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볼 때, 우리는 실패속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성숙한 제자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5절과 다른 것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가 빠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요한과 야고보라는 막강한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맡기실 만큼 사랑하고 신뢰하셨습니다. 그는 수제자로서 요한이 항상 눈의 가시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보다 더 예수님께 인정받길 바랬습니다. “네, 주님, 제가 요한보다 조금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다른 사람보다 비교해서 사랑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사랑하는가 질문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진심을 예수님의 마음에 호소하였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진실 되게 사랑 고백했을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모든 불의감과 죄책감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깨질 뻔했던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관계성이 온전히 회복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내 마음을 앗아간 것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상대적인 것들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신6: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에게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은 나의 모든 힘과 정열, 청춘을 다 바쳐 사랑하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고 값진 인생을 살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실의와 절망에 빠져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다가도 학업과 직장에서 실패하면 손해의식이 듭니다. 양들과 동역자들이 아무 말 없이 곁을 떠날 때, 목자의 삶에 회의가 느껴지고,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우리의 형편과 상황을 다 아시고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OO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OO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진실된 사랑고백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 있든지 간에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 진실된 사랑을 고백할 때, 주님은 죄로 아파하고, 상처난 우리의 심령을 회복시키시고, 사랑의 관계성을 온전케 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간곡한 부탁이요 거룩한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보혈의 피를 흘리시기까지 양들을 사랑으로 섬겨왔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식을 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처럼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양무리를 먹이는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워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사랑 고백할 때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어린양을 먹일 때 우리는 주님의 더욱더 깊은 사랑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워봐야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캠퍼스에서 어린양을 먹이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더 깊은 사랑을 알아 가는 과정입니다. 저희 모두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각기 처한 곳에서 한 양을 먹이는 사랑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명에 실패한 제자들을 변함 없는 사랑으로 찾아오자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도 사도 베드로처럼 주님께 사랑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저희가 변함 없이 저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사랑 고백하는 가운데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치유되고 주님의 양 무리를 먹이는 목자요 선교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예수님보다 세상에서 성공과 물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졸업 후 좋은 직장을 잡으면 센터를 멀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에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만성간염에 걸리게 되어 하이닉스 반도체 연구원으로 면접까지 통과하였지만, 신체검사에서 간염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간염으로 인해 하루 14시간을 이상을 자도 피곤하였습니다. 대학원 동기들은 좋은 곳에 취직하여 잘 나가고 있는데 저는 형제 장막에 3년을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연애도 해보고 싶었는데 돈도 없고 몸은 피곤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예수님보다 세상 성공과 물질을 사랑할 때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두손들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해진 저의 마음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저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좌절감을 극복할 힘을 말씀을 통해 공급해 주셨습니다.
저는 질병의 한계를 극복하고 결혼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결혼도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은 직장도 없었던 저에게 루디아 목자님을 보내어 주시고 결혼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의 가정이 허바울, 박기현, 문예지, 현승윤, 박상철 형제 자매님들을 섬기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에서 3년 반을 근무하게 되었고 4개월간 미국 연수도 다녀올 수 있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작년에 여성 의류 부자재 무역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이안 무역 대표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또 회사 경영이 좀 더 좋아지면 수입차인 렉서스 IS350도 뽑아서 굴리고 싶었습니다. 이랜드와 같은 크리스챤 기업을 만드는 것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많은 오더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자금난으로 압박을 받고 중국에서 만든 제품에 하자가 생기고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여러 건 터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요 거래처에 매일 불려가 질책을 받아야 했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15억 이상의 손해를 떠 안아야 했습니다. 저는 15층 회사 옥상에서 뛰어 내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교사의 삶을 살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납기 연장을 해 준 적이 없던 바이어가 납기 연장을 해주는 기적과 같은 일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오더들도 하나 하나에 문제가 있었지만 기도하는 대로 해결을 받게 되어 손실이 대폭 삭감이 되는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통해 제가 예수님보다도 세상에서의 출세와 물질을 더 사랑했던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 주셔서 사업의 큰 어려움에서 저를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합니다.” 때때로 저는 생활비 많이 드는 곳인 미국에 선교사로 가야만 되는가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제가 저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는 선교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네가_나를_사랑하느냐_이요한_메시지_5.hwp (0byte)
58회 다운로드 | DATE : 2010-07-29 15:32:1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