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0 여름수양회 주제2강 "아버지,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눅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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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 수양회 말씀 제 2 강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 누가복음 23:13-56
요절 누가복음 23:34a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에는 그것을 대표하는 상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그 상징으로 연꽃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연꽃이 탄생과 죽음의 순환, 혹은 혼돈과 진흙 속에서 탄생하는 아름다움과 조화를 묘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두 개의 정삼각형을 조합해서 만든 다윗의 별이라는 상징을 채택했습니다. 이 상징은 다윗의 보좌가 영원할 것이며 메시야가 그의 후손 중에 태어나리라는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냅니다. 이슬람교의 상징은 초승달입니다. 원래 달의 한 단계를 표시하던 이 상징은 이슬람교도들이 비잔티움을 점령하기 이전부터 비잔티움에 대한 그들의 주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고대에 흉악한 죄인을 못 박아 죽이던 형틀이었습니다. 저주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혐오스러운 십자가, 험악한 십자가가 어떻게 기독교의 상징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향한 당신의 핏빛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험한 십자가를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이 십자가의 사랑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미 만난 분들도 새롭게 만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무지한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이번 십자가 말씀을 통해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관계성을 회복하는 진정한 화해와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13-31)
13~25절 말씀은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의 법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고소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의 판결이 무엇입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 놓겠노라.”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요구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에 연류되어 옥에 갇힌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주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또 다시 소리를 지르며 빌라도를 압박하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22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 놓으리라 하니” 그러나 무리들이 더 큰 소리로 재촉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결국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저자 누가는 이를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그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뒤집은 것은 어떠한 증거나 증인이 아닌 그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첫째 그들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존중하지 않는 예수님의 도발적인 선언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짓과 위선의 죄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거침없는 책망과 도전에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가룟 유다를 돈으로 매수하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거짓과 위선, 탐욕과 시기심 때문에 십자가에 넘겨진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가지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돌변하게 만든 것일까요? 이에 대해 마가복음15: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그들의 배후에는 사악한 음모가 있었습니다. 돈에 매수된 사람들이 군중들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무리들 속에서 군중심리에 휩쓸려 함께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들의 무책임한 외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준 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꿈 이야기를 하며 “이 의로운 사람에게 상관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는 더욱더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의대로 사실대로 판결해야 하는 법정의 책임자로서 예수님을 놓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진리보다도 실리를, 정의보다도 자신의 자리를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무리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넷째 그들은 우리 자신입니다. 찬송가(147)에 “거기 너 있었는가?” 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찬송가 가사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탐욕을 인하여,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시기를 인하여, 빌라도처럼 우리의 야망을 위하여 예수님을 넘겨주어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유죄의 가담자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를 위해 행해진 것으로 보기에 앞서 우리에 의하여 행해진 십자가를 보아야만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찬송가 작사자의 왕이라고 불렸던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습니다.
거룩한 피 내가 흘리게 했네. / 내가 그분을 나무에 못 박았네. /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 그 모욕하는 일에 나도 참여 했다네
그 소리치던 군중 속에 / 나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네./ 그 무례한 외침의 소음 속에서 / 내 목소리가 들리네.
십자가 주위의 군중을 내가 보니 / 그 고통 받으시는 분의 신음을 비웃도다. / 하지만 거기서도 내 목소리가 들리네. / 마치 나 혼자서 비웃는 듯이.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단지 우리의 죄 때문이라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희생당하신 “순교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순교자”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1, 17-18)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넘겨지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그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은 자기목숨을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십자가의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 곧 해골의 곳이라고 하는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죄수들은 각자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깨에 70kg이나 되는 육중한 십자가가 지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며 언덕을 오르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또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몇 번이나 쓰러지고 또 쓰러지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이를 본 군병들은 시골에서 구경하러 온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그는 그날 억세게 재수 없는 날이라고 불평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이를 통해 후에는 그와 그의 가족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 교회에 유명한 기독교 인사가 되었습니다.(막15:21, 롬16:13)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를 영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여인들은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눈물 없이는 좇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슬피 우는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 값을 철저히 치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산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들에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외치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예언은 AD 70년 경에 일어난 유대전쟁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마른 나무는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당할 심판을 생각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었습니다.(눅13:34) 그러나 그 눈물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를 배척한 예루살렘, 그를 십자가에 넘겨준 예루살렘이 당할 고통을 먼저 생각하셨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흘리는 눈물,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양들과 세상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을 더 기뻐하십니다. 이는 오직 참회의 눈물을 통해서만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2장.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32-56)
32,33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님과 함께 끌려갔습니다. 마침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예수님의 좌우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 낸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고 합니다. 교수형이나 참수형은 그 고통이 순간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으면 금방 죽지 못합니다. 보통은 2~3일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다 물과 피를 다 쏟고 진을 다 빼고 나서야 죽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손톱 밑에 아주 작은 가시만 박혀 있어도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런데 손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박아 놓고 그것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천 번을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고통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22:14,15)
이처럼 십자가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혐오스런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비난하는 한 연설에서 “십자가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의 한 사람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눈과 귀로부터도 멀리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신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부당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당한 일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끌려가셨습니다.(사53:7)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죄인이 아닌 죄인으로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이 극심한 만큼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고 악독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베드로는 처음에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가 후에 이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a)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죄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 대가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대가로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죄는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도 많은 고통을 줍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신음합니다. 죄는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증오하고 분노하고 피를 흘리게 만듭니다. 우리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합니다. 죄를 커피 한잔 마시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죄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다룰게 뭐 있느냐며 반발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지옥에 들어가 죄를 달게 받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살이 찢기고 뼈가 어그러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는 바로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내 대신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하고 합리화를 한다 해도 죄는 반드시 정죄받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대신 야단을 맞아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대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인해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고통보다도 인간들의 죄로 인해 더욱 고통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죄가 죄인지도 알지 못하고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성품 때문에 죄인들을 마땅히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롬3:25) 예수님은 이러한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인간 사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면 그것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어디 두고 보자하며 남 몰래 칼을 갑니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수할 기회를 노립니다. 사무엘하13장을 보면 다윗 왕가의 비극이 압살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암몬이 압살롬의 누이동생 다말을 연애하다가 강간을 한 후에 쫓아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압살롬은 마음에 무서운 복수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다가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당대에 갚지 못하면 자식에게 원수를 갚아달라는 한 맺힌 유언을 함으로써 복수의 유산을 남기기도 합니다.
희대의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기억하시나요? 그에게 노모와 아내와 4대 독자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살인범을 찾으면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영철이 검거되던 날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먼저 가신 분들을 따라가고자 한강 다리 위에 섰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유영철을 용서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용서해주고자 마음을 먹은 그 순간 놀랍게도 그는 다시 삶에 대한 욕구를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유영철에게 직접 서신을 교환하며 그의 사형을 반대하는 탄원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를 바라보는 그의 가족들과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유영철을 용서해 준 이후로 그의 딸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며 원망하였고 관계성이 소원해져야 했습니다. 특히 피해자 가족들에게 “재정신이냐? 당신 맘대로 용서하느냐?”하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리에타는 일곱 살 된 딸 수지가 몬태나에서 캠프 여행 도중 유괴당했다는 소식을 맨 처음 듣고는 유괴범을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녀는 자신의 분노가 딸을 찾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딸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 유괴범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딸이 유괴된 지 1년이 지나 유괴범이 잡혔고 그의 소지품에서 딸의 등뼈가 발견되었습니다. 유괴범은 사형감이었지만 마리에타는 그가 사형 대신 정신과 치료를 겸한 무기징역을 언도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모습에 고뇌하던 젊은 살인자는 그녀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두 극단적인 실화를 통해 인간이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영철을 용서하신 분은 용서는 했다고 하지만 마음에 시원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의 터널의 지나 용서의 길로 들어섰지만 그의 가족들과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라에타는 큰 용기를 내어 용서했지만 그의 용서는 거절당했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하는 것도 힘들고 받아들이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용서의 멀고 험난한 길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부림을 치며 아파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비극인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 분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해야 합니다. 사랑받은 자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를 받은 자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아무런 공로 없이 은혜로 값없이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용서할 차례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비방하는 행악자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죽음의 마지막 문턱에서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염치없는 기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십자가상에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깊이 영접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축복된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회개한 오늘 이 순간, 용서하기로 결심한 오늘 이 순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나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 나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기도를 영접하십시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의지하여 내가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 나를 용서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렇게 결단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시에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서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벽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죄의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와 화목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피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10:19,20) 47~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회개하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던 공회의원 중 하나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구하여 자기를 위해 예비된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1970년 5월 서울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어릴 적 어머니가 제발 나가 놀아라 노래를 부르실 정도로 집에 꼭 박혀서 혼자 놀면서 공상을 즐기던 아이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여름성경학교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한 자매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데의 별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과 같이 순수한 사랑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자매의 냉담함이 마음의 상처가 되어 많이 아파했습니다. 그러면서 음란한 생각과 정욕행위로 순수하지 못한 자신을 정죄했습니다. 이렇게 꽃봉오리 같은 저의 청춘은 시들했습니다.
마음의 방황으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대가는 냉혹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대학입시에서 낙방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설상가상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졌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품에 쓰러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홍대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병들고 연약한 자를 일대일 말씀공부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일학년 여름수양회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을 통해 그동안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정욕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렇게 저의 축복된 목자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한 동역자가 떠올랐습니다.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은 특별했고 허물없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마음의 상처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을 얻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만큼만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중심적으로 다가가려 한 것이 그에게는 무서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제가 얼마나 무지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저는 무지하여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무지한 죄인을 위해 대신 정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 안에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성을 회복하려면 용서의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이를 위해 예수님처럼 용서의 기도를 날마다 감당하므로 용서의 위력을 더 분명히 체험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과 용서를 통한 그 분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과 험한 십자가를 통해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라면 내가 미워하는 그 형제, 너무나 영접이 않되는 그 자매님도 분명히 하나님께는 소중한 존재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풀고 나에게 죄를 짓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관계성이 회복되며 하나되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 누가복음 23:13-56
요절 누가복음 23:34a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에는 그것을 대표하는 상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그 상징으로 연꽃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연꽃이 탄생과 죽음의 순환, 혹은 혼돈과 진흙 속에서 탄생하는 아름다움과 조화를 묘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두 개의 정삼각형을 조합해서 만든 다윗의 별이라는 상징을 채택했습니다. 이 상징은 다윗의 보좌가 영원할 것이며 메시야가 그의 후손 중에 태어나리라는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냅니다. 이슬람교의 상징은 초승달입니다. 원래 달의 한 단계를 표시하던 이 상징은 이슬람교도들이 비잔티움을 점령하기 이전부터 비잔티움에 대한 그들의 주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고대에 흉악한 죄인을 못 박아 죽이던 형틀이었습니다. 저주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혐오스러운 십자가, 험악한 십자가가 어떻게 기독교의 상징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향한 당신의 핏빛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험한 십자가를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이 십자가의 사랑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미 만난 분들도 새롭게 만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무지한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이번 십자가 말씀을 통해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관계성을 회복하는 진정한 화해와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13-31)
13~25절 말씀은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의 법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고소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의 판결이 무엇입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 놓겠노라.”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요구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에 연류되어 옥에 갇힌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주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또 다시 소리를 지르며 빌라도를 압박하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22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 놓으리라 하니” 그러나 무리들이 더 큰 소리로 재촉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결국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저자 누가는 이를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그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뒤집은 것은 어떠한 증거나 증인이 아닌 그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첫째 그들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존중하지 않는 예수님의 도발적인 선언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짓과 위선의 죄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거침없는 책망과 도전에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가룟 유다를 돈으로 매수하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거짓과 위선, 탐욕과 시기심 때문에 십자가에 넘겨진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가지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돌변하게 만든 것일까요? 이에 대해 마가복음15: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그들의 배후에는 사악한 음모가 있었습니다. 돈에 매수된 사람들이 군중들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무리들 속에서 군중심리에 휩쓸려 함께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들의 무책임한 외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준 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꿈 이야기를 하며 “이 의로운 사람에게 상관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는 더욱더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의대로 사실대로 판결해야 하는 법정의 책임자로서 예수님을 놓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진리보다도 실리를, 정의보다도 자신의 자리를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무리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넷째 그들은 우리 자신입니다. 찬송가(147)에 “거기 너 있었는가?” 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찬송가 가사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탐욕을 인하여,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시기를 인하여, 빌라도처럼 우리의 야망을 위하여 예수님을 넘겨주어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유죄의 가담자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를 위해 행해진 것으로 보기에 앞서 우리에 의하여 행해진 십자가를 보아야만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찬송가 작사자의 왕이라고 불렸던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습니다.
거룩한 피 내가 흘리게 했네. / 내가 그분을 나무에 못 박았네. /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 그 모욕하는 일에 나도 참여 했다네
그 소리치던 군중 속에 / 나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네./ 그 무례한 외침의 소음 속에서 / 내 목소리가 들리네.
십자가 주위의 군중을 내가 보니 / 그 고통 받으시는 분의 신음을 비웃도다. / 하지만 거기서도 내 목소리가 들리네. / 마치 나 혼자서 비웃는 듯이.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단지 우리의 죄 때문이라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희생당하신 “순교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순교자”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1, 17-18)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넘겨지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그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은 자기목숨을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십자가의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 곧 해골의 곳이라고 하는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죄수들은 각자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깨에 70kg이나 되는 육중한 십자가가 지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며 언덕을 오르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또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몇 번이나 쓰러지고 또 쓰러지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이를 본 군병들은 시골에서 구경하러 온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그는 그날 억세게 재수 없는 날이라고 불평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이를 통해 후에는 그와 그의 가족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 교회에 유명한 기독교 인사가 되었습니다.(막15:21, 롬16:13)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를 영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여인들은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눈물 없이는 좇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슬피 우는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 값을 철저히 치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산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들에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외치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예언은 AD 70년 경에 일어난 유대전쟁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마른 나무는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당할 심판을 생각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었습니다.(눅13:34) 그러나 그 눈물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를 배척한 예루살렘, 그를 십자가에 넘겨준 예루살렘이 당할 고통을 먼저 생각하셨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흘리는 눈물,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양들과 세상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을 더 기뻐하십니다. 이는 오직 참회의 눈물을 통해서만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2장.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32-56)
32,33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님과 함께 끌려갔습니다. 마침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예수님의 좌우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 낸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고 합니다. 교수형이나 참수형은 그 고통이 순간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으면 금방 죽지 못합니다. 보통은 2~3일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다 물과 피를 다 쏟고 진을 다 빼고 나서야 죽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손톱 밑에 아주 작은 가시만 박혀 있어도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런데 손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박아 놓고 그것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천 번을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고통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22:14,15)
이처럼 십자가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혐오스런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비난하는 한 연설에서 “십자가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의 한 사람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눈과 귀로부터도 멀리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신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부당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당한 일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끌려가셨습니다.(사53:7)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죄인이 아닌 죄인으로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이 극심한 만큼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고 악독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베드로는 처음에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가 후에 이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a)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죄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 대가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대가로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죄는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도 많은 고통을 줍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신음합니다. 죄는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증오하고 분노하고 피를 흘리게 만듭니다. 우리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합니다. 죄를 커피 한잔 마시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죄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다룰게 뭐 있느냐며 반발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지옥에 들어가 죄를 달게 받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살이 찢기고 뼈가 어그러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는 바로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내 대신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하고 합리화를 한다 해도 죄는 반드시 정죄받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대신 야단을 맞아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대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인해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고통보다도 인간들의 죄로 인해 더욱 고통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죄가 죄인지도 알지 못하고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성품 때문에 죄인들을 마땅히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롬3:25) 예수님은 이러한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인간 사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면 그것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어디 두고 보자하며 남 몰래 칼을 갑니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수할 기회를 노립니다. 사무엘하13장을 보면 다윗 왕가의 비극이 압살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암몬이 압살롬의 누이동생 다말을 연애하다가 강간을 한 후에 쫓아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압살롬은 마음에 무서운 복수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다가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당대에 갚지 못하면 자식에게 원수를 갚아달라는 한 맺힌 유언을 함으로써 복수의 유산을 남기기도 합니다.
희대의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기억하시나요? 그에게 노모와 아내와 4대 독자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살인범을 찾으면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영철이 검거되던 날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먼저 가신 분들을 따라가고자 한강 다리 위에 섰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유영철을 용서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용서해주고자 마음을 먹은 그 순간 놀랍게도 그는 다시 삶에 대한 욕구를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유영철에게 직접 서신을 교환하며 그의 사형을 반대하는 탄원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를 바라보는 그의 가족들과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유영철을 용서해 준 이후로 그의 딸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며 원망하였고 관계성이 소원해져야 했습니다. 특히 피해자 가족들에게 “재정신이냐? 당신 맘대로 용서하느냐?”하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리에타는 일곱 살 된 딸 수지가 몬태나에서 캠프 여행 도중 유괴당했다는 소식을 맨 처음 듣고는 유괴범을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녀는 자신의 분노가 딸을 찾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딸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 유괴범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딸이 유괴된 지 1년이 지나 유괴범이 잡혔고 그의 소지품에서 딸의 등뼈가 발견되었습니다. 유괴범은 사형감이었지만 마리에타는 그가 사형 대신 정신과 치료를 겸한 무기징역을 언도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모습에 고뇌하던 젊은 살인자는 그녀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두 극단적인 실화를 통해 인간이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영철을 용서하신 분은 용서는 했다고 하지만 마음에 시원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의 터널의 지나 용서의 길로 들어섰지만 그의 가족들과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라에타는 큰 용기를 내어 용서했지만 그의 용서는 거절당했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하는 것도 힘들고 받아들이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용서의 멀고 험난한 길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부림을 치며 아파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비극인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 분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해야 합니다. 사랑받은 자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를 받은 자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아무런 공로 없이 은혜로 값없이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용서할 차례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비방하는 행악자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죽음의 마지막 문턱에서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염치없는 기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십자가상에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깊이 영접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축복된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회개한 오늘 이 순간, 용서하기로 결심한 오늘 이 순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나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 나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기도를 영접하십시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의지하여 내가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 나를 용서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렇게 결단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시에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서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벽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죄의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와 화목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피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10:19,20) 47~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회개하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던 공회의원 중 하나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구하여 자기를 위해 예비된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1970년 5월 서울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어릴 적 어머니가 제발 나가 놀아라 노래를 부르실 정도로 집에 꼭 박혀서 혼자 놀면서 공상을 즐기던 아이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여름성경학교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한 자매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데의 별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과 같이 순수한 사랑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자매의 냉담함이 마음의 상처가 되어 많이 아파했습니다. 그러면서 음란한 생각과 정욕행위로 순수하지 못한 자신을 정죄했습니다. 이렇게 꽃봉오리 같은 저의 청춘은 시들했습니다.
마음의 방황으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대가는 냉혹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대학입시에서 낙방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설상가상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졌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품에 쓰러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홍대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병들고 연약한 자를 일대일 말씀공부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일학년 여름수양회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을 통해 그동안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정욕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렇게 저의 축복된 목자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한 동역자가 떠올랐습니다.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은 특별했고 허물없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마음의 상처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을 얻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만큼만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중심적으로 다가가려 한 것이 그에게는 무서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제가 얼마나 무지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저는 무지하여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무지한 죄인을 위해 대신 정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 안에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성을 회복하려면 용서의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이를 위해 예수님처럼 용서의 기도를 날마다 감당하므로 용서의 위력을 더 분명히 체험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과 용서를 통한 그 분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과 험한 십자가를 통해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라면 내가 미워하는 그 형제, 너무나 영접이 않되는 그 자매님도 분명히 하나님께는 소중한 존재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풀고 나에게 죄를 짓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관계성이 회복되며 하나되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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