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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0년 요한복음 제 16 강(16:1-33) 진리의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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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697회 작성일 10-07-11 14:30

본문

2010년 봄 학기 요한복음 제 16 강
말씀 요한복음 16:1-33
요절 요한복음 16:13

진리의 성령님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우리는 오늘 진리의 성령님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보혜사라면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란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시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원어에서는 파라클레토스로서 변호자, 위로자, 권면자, 돕는 자, 상담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가장 적합한 번역은 변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로서 그가 하는 일은 법률적인 변호자 기능보다는 진리의 영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시하고 말씀을 해석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제자 양성을 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메시지를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삶의 정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말씀을 해석해 주셔야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진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와 성령으로 드리는 공동체 예배의 능력이 되십니다(4:24). 보혜사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들은 찬양을 터뜨리고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구원 사건이 성령의 감동으로 선포될 때 예배는 갱신되고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활발할 때 예수님이 잘 드러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예수님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함께 하사 감동 감화를 주시고 살아 있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시고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 자신을 배신할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마저도 그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어날 더 심각한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제자들을 출교할 뿐만 아니라 죽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영적 무지로 인해서 제자들은 선한 일을 하고도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애매하게 핍박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이단으로 생각하고 죽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란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서 죽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핍박들이 우리에게는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북한만 해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반동으로 몰리고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서 온갖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북한은 인권이 가장 열악한 국가입니다. 우리 옆 동네,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 순교 성지는 일만 명의 순교자들이 당한 핍박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중에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주일 성수, 제사 문제, 음주문제로 핍박을 받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딤후 3:12). 핍박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 짓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것을 미리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핍박을 당하는 때를 만나게 되면 이 말 한 것을 기억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핍박을 받을 때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 감당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그가 제자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가신다는 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면 예수님께서 떠나가시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훨씬 더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우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예수님이 그를 우리에게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은 채로 갈릴리 해변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2만 명 정도밖에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면 그는 편재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도우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 전보다 더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제자들은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임재를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이기심과 정욕과 탐욕과 속이는 것과 교만과 열등감 등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내적인 힘을 주십니다. 담대함을 주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을 환란 가운데서 위로하십니다.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또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각종 다양한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삶을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자라나게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막힌 심령이 뚫리고 답답한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서로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깊이 나누게 하십니다.

  그러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첫째, 세상에 대해서, 둘째, 제자들에 대해서, 셋째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첫째, 세상에 대한 성령의 사역(8-11) : 8-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책망하십니다. 책망이란 단순히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 때까지 사람의 마음을 계속해서 두드리고 움직이며 흔든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진리를 알도록 깊이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예수 안 믿는 것이 왜 죄냐? 그냥 착하게 살면 되지... 왜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내 할 일 잘 하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러나 성령님께서 오셔서 불신이 죄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들이 범한 모든 죄가 정죄의 심판을 받는 것은 죄 용서를 가져오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 중에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보다도 이 불신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범한 모든 다른 죄들이 용서받지 못합니다. 결국 불신으로 인해 심판 때에 정죄를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기 암 환자에게 넥시아라는 약을 투여하여 완치되는데, 약과 의사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약을 쓰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오셔서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죄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사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인들은 죄에 대해서 둔감하다면 성자들은 죄에 대해서 매우 민감합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탐심도 죄입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을 때 우리는 자신이 죄 가운데서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합니다. 대신에 죄사함을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죄사함을 받은 것이 많고,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적다는 뜻은 결국 성령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강하냐 약하냐에 달린 것입니다. 성자들이 죄가 많아서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죄에 대해서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에 죄와 처절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성령의 책망하심이 강하게 있어서 은혜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신자들은 새로운 윤리적 삶의 능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음욕을 버리고 성결한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의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니 우리가 다시 그를 보지 못함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의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사건과 그 결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과 관련하여 정의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의인데,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칭의를 받는다는 말인가요?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선물과 동일한 것인가요? 여기서의 의는 바울의 칭의와는 다른 것으로 봐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믿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의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시는 그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의는 예수님께서 비록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가 하나님께로 가심으로 무죄하신 분으로 최종 확증되고 높아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의란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세상은 의롭지 않다. 즉 불의한 세상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서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사셨으며 의 자체이셨습니다. 유일한 의가 하나님께로 가시니 이 세상에는 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다”는 말은 “이 세상의 의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즉 불의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그들의 불의가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의에 대해서 성경은 더러운 걸레와 같다고 하십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의 자기 의는 얼마나 얄팍한가를 깨닫게 되고 선행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이 세상에 의가 없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으매 예수님께로 나와야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이 세상 임금이 심판받았음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는 사건은 세상의 주관자 사단이 재판을 받아 세상 주관자의 자리에서 추방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단의 지배 아래 있던 자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귀로 말미암아 세상의 주관자는 패배하고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긴 자이십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이 세상을 이깁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가 세상을 이깁니다. 자기 실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가 세상을 이깁니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상대주의의 절대화, 허무주의, 염세주의, 쾌락주의,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윤리의 절대성은 무시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죄로 여길 것인지, 무엇이 의의 기준이 될 것인지, 그리고 심판이 어디에서 적절하게 표현되고 표현되지 않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자기인 시대입니다. 자기가 좋으면 그것이 선이고 자기가 싫으면 그것이 악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실 때 진리가 바로 서게 됩니다. 사람이 온전해 집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복음 진리를 외쳐야 합니다. 복음 진리를 외치는 것은 순교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리석게 여길지라도 기꺼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는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그 진리를 변호하시고 확증해 주십니다.

  둘째, 제자들과 관련된 사역(12-13) : 12,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교육을 해 오셨습니다. 이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진리”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교훈들(14:26)과 그가 말하고 싶었으나 하실 수 없었던 말씀까지 모두 포함합니다(16:12). 성령께서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서신서에서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을 확증하셔서 권세가 있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각 상황에 맞게 해석하시고 적용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 안에 진리가 충만하고 인격에 변화가 오게 됩니다. 성령님은 감정이나 환상 혹은 현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진리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시며 장래 일을 제자들에게 알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한 것 같이 성령님도 예수님에게서 듣는 대로 말씀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계승자이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제자들이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가 장래 일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미래에 닥칠 일을 계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부활 승천 승귀의 사건이 가지는 구속사적인 진리를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의 구속사건의 의의를 바르게 해석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 체험은 보혈 체험인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와 관련한 사역(14) :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님은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역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곳에 예수님의 임재가 충만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여기서 우리는 ‘장래 일’, ‘예수님의 것’,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는 사역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하는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이 드러나게 되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무슨 수수께끼를 하는 것인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기점으로 하여 아버지에게로 가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오시기에 조금 후에는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인격적인 임재를 통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중개하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제자들은 기쁨이 가득하게 되고 그 기쁨을 아무도 뺏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제자들 속에 거하십니다.

  그 날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십니다(24). 성령님의 내주를 통해 그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고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는 구절은 마술적이거나 신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은 믿음을 통해 우리를 예수님과 연결시켜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행한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만 담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고 우리도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속하게 만들며 예수님 안에 있게 하고 그 안에서 이기게 합니다(요일 4:4).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며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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