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성탄수양회 3강(빌3:1-21) 그리스도를 얻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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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성탄 수양회 특강
말씀 빌립보서 3:1-21
요절 빌립보서 3:8
그리스도를 얻고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지금은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이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일생을 보내면서 죽기 직전에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 결산하게 될 때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생동안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 시간 사도 바울이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를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형제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 밖에서’ 기쁨을 찾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즉 이 세상에 속한 것에서 기쁨을 찾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하고, 그를 나의 자랑거리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볼 때 빌립보 성도들 가운데 주 밖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 율법주의자이요, 할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체를 자랑하고 할례 받은 것을 신뢰하였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개들을 삼가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개가 많아지면서 주인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개들이 들개가 되었습니다. 개들은 그 특징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또 할례를 언급하는 것은 토해 낸 음식을 다시 삼키는 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순수한 양들에게 접근해서 물어뜯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개 같은 놈들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 진리 외에 믿음 더하기 선행을 해야 한다든가, 예수님 외에 다른 누구를 믿으라고 요구한다면 동일한 욕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할례는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바울은 할례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음으로 설명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육체를 신뢰하고 육체를 자랑거리로 삼기로 하면 자기보다 더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고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당시는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 이것들이 무어 그리 자랑거리인가 생각이 됩니다. 오늘날은 내가 서울대를 나와서 하바드 대학에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최연소로 교수가 되고 돈은 1000억원을 벌었다고 말해야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아니면 나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믿음이 좋은 자매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라면 나는 열 두 명의 양을 치고 있다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과거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던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여긴다고 말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바울은 이전에 자신에게 그토록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는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별 것 아닌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처럼 자랑스럽고 유익하던 것들을 해로 여긴다는 것입니까? 8, 9절을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학벌이나 혈통이나 자신의 성실한 태도나 성취가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를 배우게 된 이후로 이런 것들이 너무나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 말 구유에 태어나셨고, 일생 동안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을 생각할 때 자기의 율법적인 의는 너무나 추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너무나 어설프고 불완전한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그에게 주목하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아니라, 아니라고 자기를 부정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사람들이 그를 높이자 제발 나를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 상을 받으면서 자신은 신사참배를 한 사람이라면서 공개적으로 회개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유대인들이 그동안 자랑하던 율법이나 혈통이나 할례나 육체의 의로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오하고, 의롭고, 완전하고, 차원 높고,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율법과 할례와 규례들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모조품에 불과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진품입니다. 그런데 그 진품 예수님을 놔두고 빌립보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이 모조품에 불과한 율법과 할례를 자랑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샘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 이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십니다(요1:14). 골로새서 2:9절에 보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여도 속이는 것이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즉 신성으로 충만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이 세상 것들과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예수님은 알면 알수록 더 신비스럽고 더 매력적이고 더 고상하고 더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세상에 그 어떤 학문에서도, 그 어떤 인물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최고, 최상의 지식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죄와 죽음으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죄 사함과 영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고상하고 뛰어난 지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가장 고상한 지식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떤 결단을 하였습니까?
8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서 ‘얻는다’는 것은 헬라원어에 ‘케르다이노’(κερδαινω)로서 그 의미가 ‘사다’, ‘재물로 삼다’, ‘보배로 여긴다’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조금 아는데서 그치길 원치 않았습니다. 학문적으로 조금 연구하고 거기서 기쁨을 얻는 정도로 끝나길 원치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천국 보화 비유에 보면, 어떤 사람이 지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보화를 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팔고,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얻으려고 보니까,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는 자기 의, 과거에 나도 한 자리 했다는 생각,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못난 자기를 너무나 주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아내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쨌든 그 자기가 너무 커서 예수님이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자기 사랑이 너무 많아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귀한 물건을 집에 들여놓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립니다. 미련 없이, 돈을 주고서라도 쓰레기로 내다 버립니다. 내가 뱃속에 맛있는 음식을 채우려면 어떻게 합니까? 이미 뱃속에 있는 것들을 배설물로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 버려진 배설물로 인해서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화장실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아, 아깝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 시원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버리지 않고 있으면 변비에 걸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먹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최고의 보배되신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과거에 자기가 자랑하던 자아를 과감하게 배설물로 버렸다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단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고 예수님의 일부분만을 얻길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얻되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십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방을 받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사람인데 후진 지도를 위해서「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썼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핵심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는 부활의 권능과 영광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큰 신비는 부활이요, 예수님의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도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산을 타는 등산가들이면 다 이 세상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에 올라가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의 최고봉인 부활의 산에 오르고자 하였습니다. 부활의 영광, 그 능력을 체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고, 닮기 원하면서도 일정한 한계선을 그어놓고 투쟁합니다.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축복은 받기 원하되 예수님이 당한 고난에는 참예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손해 안보고, 어찌하든지 고생 안하고, 어찌하든지 힘든 십자가를 안 지고, 편하고 쉽게 신앙생활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할 수 있는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희생과 헌신과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사 자신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양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관제로 부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참수형으로 순교를 했습니다. 바울이 순교하기까지 그의 매일의 삶은 순교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까지 체험하고자 애를 썼기 때문에 그는 불사조와 같은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은 것 같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배가 파산해서 망망대해 바다를 표류하다가도 살아 나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두려워하기보다 도리어 찬송을 부르므로 감옥에서 유유히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가 이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기꺼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았기 때문에 그는 수없이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살면서 사도 바울처럼 참 보배되신 예수님을 얻기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함으로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나를 비판하면 방어하고자 하고 그런 것이 심하면 싸움을 하고자 합니다. 동역자는 저를 위해서 식사를 정성스레 차려서 섬깁니다. 저에게 부족한 것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입니다. 특히 동역자의 인정을 받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때로 저도 동역자의 예리한 비판을 받을 때 화가 납니다. 동역자의 충고는 사실 저를 성장시키기 위한 사랑의 말이지만 곱게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제가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날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죽기까지 충성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잘 배우기를 원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 마라톤 경주자와 같이 전심전력하여 달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그가 이제까지 이룬 것만 해도 엄청났습니다.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리더들을 세워서 소아시아에 복음을 편만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와서도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 이룬 업적과 성취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인생목표와 신앙의 푯대가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겸손과 열정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하면서 나를 본받으라고 하지 않아도 자녀들이나 양들은 나를 본받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과 몸짓과 글씨체 까지 닮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하는 가운데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키우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독교를 폄훼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까? 이단들입니까?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는 배를 신으로 삼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으로서 세속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 올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정 원하는 부름의 상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수능 점수를 얻어서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토익 점수를 높이 받고 스팩을 잘 쌓아서 좋은 직장에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진급도 제 때에 잘 하고 싶습니다. 자녀들을 잘 키워서 자식 자랑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크게 이루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랑하고 싶은 것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과 같이 이루어온 업적과 성취들을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2011년 한 해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사모하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빌립보서 3:1-21
요절 빌립보서 3:8
그리스도를 얻고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지금은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이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일생을 보내면서 죽기 직전에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 결산하게 될 때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생동안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 시간 사도 바울이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를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형제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 밖에서’ 기쁨을 찾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즉 이 세상에 속한 것에서 기쁨을 찾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하고, 그를 나의 자랑거리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볼 때 빌립보 성도들 가운데 주 밖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 율법주의자이요, 할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체를 자랑하고 할례 받은 것을 신뢰하였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개들을 삼가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개가 많아지면서 주인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개들이 들개가 되었습니다. 개들은 그 특징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또 할례를 언급하는 것은 토해 낸 음식을 다시 삼키는 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순수한 양들에게 접근해서 물어뜯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개 같은 놈들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 진리 외에 믿음 더하기 선행을 해야 한다든가, 예수님 외에 다른 누구를 믿으라고 요구한다면 동일한 욕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할례는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바울은 할례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음으로 설명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육체를 신뢰하고 육체를 자랑거리로 삼기로 하면 자기보다 더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고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당시는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 이것들이 무어 그리 자랑거리인가 생각이 됩니다. 오늘날은 내가 서울대를 나와서 하바드 대학에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최연소로 교수가 되고 돈은 1000억원을 벌었다고 말해야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아니면 나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믿음이 좋은 자매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라면 나는 열 두 명의 양을 치고 있다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과거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던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여긴다고 말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바울은 이전에 자신에게 그토록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는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별 것 아닌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처럼 자랑스럽고 유익하던 것들을 해로 여긴다는 것입니까? 8, 9절을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학벌이나 혈통이나 자신의 성실한 태도나 성취가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를 배우게 된 이후로 이런 것들이 너무나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 말 구유에 태어나셨고, 일생 동안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을 생각할 때 자기의 율법적인 의는 너무나 추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너무나 어설프고 불완전한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그에게 주목하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아니라, 아니라고 자기를 부정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사람들이 그를 높이자 제발 나를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 상을 받으면서 자신은 신사참배를 한 사람이라면서 공개적으로 회개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유대인들이 그동안 자랑하던 율법이나 혈통이나 할례나 육체의 의로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오하고, 의롭고, 완전하고, 차원 높고,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율법과 할례와 규례들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모조품에 불과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진품입니다. 그런데 그 진품 예수님을 놔두고 빌립보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이 모조품에 불과한 율법과 할례를 자랑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샘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 이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십니다(요1:14). 골로새서 2:9절에 보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여도 속이는 것이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즉 신성으로 충만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이 세상 것들과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예수님은 알면 알수록 더 신비스럽고 더 매력적이고 더 고상하고 더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세상에 그 어떤 학문에서도, 그 어떤 인물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최고, 최상의 지식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죄와 죽음으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죄 사함과 영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고상하고 뛰어난 지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가장 고상한 지식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떤 결단을 하였습니까?
8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서 ‘얻는다’는 것은 헬라원어에 ‘케르다이노’(κερδαινω)로서 그 의미가 ‘사다’, ‘재물로 삼다’, ‘보배로 여긴다’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조금 아는데서 그치길 원치 않았습니다. 학문적으로 조금 연구하고 거기서 기쁨을 얻는 정도로 끝나길 원치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천국 보화 비유에 보면, 어떤 사람이 지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보화를 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팔고,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얻으려고 보니까,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는 자기 의, 과거에 나도 한 자리 했다는 생각,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못난 자기를 너무나 주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아내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쨌든 그 자기가 너무 커서 예수님이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자기 사랑이 너무 많아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귀한 물건을 집에 들여놓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립니다. 미련 없이, 돈을 주고서라도 쓰레기로 내다 버립니다. 내가 뱃속에 맛있는 음식을 채우려면 어떻게 합니까? 이미 뱃속에 있는 것들을 배설물로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 버려진 배설물로 인해서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화장실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아, 아깝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 시원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버리지 않고 있으면 변비에 걸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먹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최고의 보배되신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과거에 자기가 자랑하던 자아를 과감하게 배설물로 버렸다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단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고 예수님의 일부분만을 얻길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얻되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십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방을 받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사람인데 후진 지도를 위해서「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썼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핵심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는 부활의 권능과 영광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큰 신비는 부활이요, 예수님의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도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산을 타는 등산가들이면 다 이 세상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에 올라가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의 최고봉인 부활의 산에 오르고자 하였습니다. 부활의 영광, 그 능력을 체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고, 닮기 원하면서도 일정한 한계선을 그어놓고 투쟁합니다.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축복은 받기 원하되 예수님이 당한 고난에는 참예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손해 안보고, 어찌하든지 고생 안하고, 어찌하든지 힘든 십자가를 안 지고, 편하고 쉽게 신앙생활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할 수 있는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희생과 헌신과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사 자신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양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관제로 부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참수형으로 순교를 했습니다. 바울이 순교하기까지 그의 매일의 삶은 순교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까지 체험하고자 애를 썼기 때문에 그는 불사조와 같은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은 것 같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배가 파산해서 망망대해 바다를 표류하다가도 살아 나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두려워하기보다 도리어 찬송을 부르므로 감옥에서 유유히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가 이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기꺼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았기 때문에 그는 수없이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살면서 사도 바울처럼 참 보배되신 예수님을 얻기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함으로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나를 비판하면 방어하고자 하고 그런 것이 심하면 싸움을 하고자 합니다. 동역자는 저를 위해서 식사를 정성스레 차려서 섬깁니다. 저에게 부족한 것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입니다. 특히 동역자의 인정을 받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때로 저도 동역자의 예리한 비판을 받을 때 화가 납니다. 동역자의 충고는 사실 저를 성장시키기 위한 사랑의 말이지만 곱게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제가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날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죽기까지 충성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잘 배우기를 원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 마라톤 경주자와 같이 전심전력하여 달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그가 이제까지 이룬 것만 해도 엄청났습니다.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리더들을 세워서 소아시아에 복음을 편만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와서도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 이룬 업적과 성취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인생목표와 신앙의 푯대가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겸손과 열정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하면서 나를 본받으라고 하지 않아도 자녀들이나 양들은 나를 본받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과 몸짓과 글씨체 까지 닮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하는 가운데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키우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독교를 폄훼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까? 이단들입니까?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는 배를 신으로 삼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으로서 세속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 올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정 원하는 부름의 상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수능 점수를 얻어서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토익 점수를 높이 받고 스팩을 잘 쌓아서 좋은 직장에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진급도 제 때에 잘 하고 싶습니다. 자녀들을 잘 키워서 자식 자랑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크게 이루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랑하고 싶은 것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과 같이 이루어온 업적과 성취들을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2011년 한 해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사모하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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