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성탄 수양회4강(사11:1-10) 한 싹(이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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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성탄메시지
한 싹
말씀/이사야 11:1-10
요절/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Merry Christmas!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축하합니다. 인천, 중앙, 동교 연합 성탄수양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본래는 오늘 한양 성탄연합예배에서 다른 말씀을 전할 예정이었으나 여러분들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성탄의 정신이라 생각되어 만사 제켜놓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주신 성탄 메시지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때에 소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예를 들면, 사 1-5장에서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죄로 인해 받을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시고는 7장에서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8장에서 앗수르의 침공으로 유다가 완전히 멸망할 것을 예언하시고는 9장에서 한 아기의 약속, 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한 싹으로서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십니다. 성탄 메시지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오늘 본문을 통해 한 싹으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과 구원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1)
이사야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무엇에 비유합니까? 1절을 봅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의 줄기에서 날 한 싹’, ‘이새의 뿌리에서 날 한 가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새가 누구지요? 다윗 왕의 부친입니다. 다윗은 누구지요? 그의 후손 가운데 인류의 구주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분입니다. 세상의 구주가 어느 날 뜬금없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동안 준비하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약속과 예언의 성취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이 세상에 구주를 보내시겠다는 최초의 약속을 어디에서 주셨습니까? 에덴동산입니다. 창 3:15절에서 “사탄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다시 주셨고, 그의 후손인 다윗 왕에게는 더욱 구체적인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구주시기 때문에 믿을 수 있고, 그 구주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 말씀이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인류의 구주가 ‘평범한 자’ ‘낮은 자’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의 줄기”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라고 했습니다. 이새는 가난하고 평범한 이름 없는 농부였습니다. 그의 막내아들 다윗 또한 양치기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화려한 왕궁에서 황금요람에 누인 황태자로 오셔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창조주께서 여관집 마구간에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습니다. 멸시 받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왜 그렇게 오셨습니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한 싹’, ‘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싹과 가지는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자라 꽃을 피우고 결실합니다. 본문에서 ‘결실한다’는 것은 구속역사를 완성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서, 명령하고 주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약한 모습으로서 오셔서, 섬김과 희생과 자기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살리는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누구나 그 분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흉악한 죄인도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죄에 넘어지고 뒤뚱거리면서도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습니다. 격려를 받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요한이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고백이 저의 고백입니다. 여러분들의 고백도 같은 줄 믿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본문이 주는 세 번째 메시지는 인간적으로 절망의 때가 하나님의 소망의 때라는 것입니다. ‘줄기’는 the stump, 곧 ‘그루터기’를 말합니다. 나무가 잘려버려 낙엽 밑에 숨겨진 보이지도 않는 밑동을 말합니다. ‘뿌리’는 어떠합니까? 이는 흙속에 묻혀있어 형체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다윗의 집과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이어 바벨론, 헬라, 로마가 차례로 짓밟아 잘려진 밑동이요 뿌리처럼 되었습니다. 그 그루터기마저도 땅속에 묻혀버린 상태였습니다. 이제 끝장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완전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그루터기에서 한 싹을 나게 하시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를 내심으로 소망의 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는 올리브나무는 뿌리에서 가지를 낸다고 합니다. 뿌리에서 나온 가지는 불사조와 같이 살아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망할 수 없으며, 언제나 새롭게 그루터기에서 싹이,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언제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대개는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고 절망적일 때 예수님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대학 1학년, 육체에서 죄의 소욕은 솟구치고 젊음과 혈기는 왕성한데,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절망감 때문에 밤이면 술에 취하고 방황하던 때, 마더 배리의 영어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되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비롯해서 성경의 인물들도 모두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때 박해와 고난을 견딘 순교자들의 피로 인해 복음의 불이 붙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 있습니까? 소망이 안 보이는 분 있습니까? 지금이 새 역사가 시작될 때입니다. 겸손히 마음을 열고, 한 싹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십시오.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난 한 싹이요, 그의 뿌리에서 난 한 가지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한 싹(2-3a)
이사야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는 한 싹 위에 누가 임한다고 예언합니까? 2절을 봅시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여호와의 영, 곧 성령이 강림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예언대로 아기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로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 치심과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령이 충만하셨고, 성령님께 이끌리셨고, 인도를 받으셨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감동으로 복음을 전하셨고, 성령으로 병든 자를 고치셨고, 성령으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셨습니다(사 61:1). 심지어 히 9:14절에 보면, 십자가의 죽음도 성령의 역사였고, 롬 8:11절에 보면, 부활도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과 분리해서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어떤 영입니까? 첫째로 지혜의 영입니다. 모든 지혜가 성령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는 스마트 폰으로 통하는 복잡한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나 영특하고 조숙해서 자식 키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직장이든 학교든 사람과 관계 맺는 것도 쉽지 않고, 우리는 비정규직과 88만원 세대로 회자(膾炙)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캠퍼스 학생들을 양치고 목양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정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의 영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 나아가면 지혜를 얻습니다. 또한 성령은 총명, 곧 진리를 분명하게 밝히는 진리의 영입니다. 누구나 진리를 찾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해 방황합니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질문도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왜 태어나며, 왜 죽으며,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세상에서 정점에 도달했던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도 진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진리를 발견합니다. 성령님은 또한 모략, 곧 상담의 영입니다. 요즈음 급변하는 삶의 환경, 과중한 스트레스, 복잡한 인간관계, 온갖 죄와 상처로 인해 꼬이고 병들고 뒤틀린 내면으로 고통하는 사람, 정신적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증상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점에서는 모두가 앓고 있습니다. 전인격적인 치료와 생명을 살리는 카운슬링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회복케 하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상담해주십니다. 또한 성령은 재능, 곧 권능의 영입니다. 우리들에게 악한 영들과 원수 사탄의 교묘한 도전이 있습니다. 이들을 이길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창조의 권능이요, 전능의 능력의 영입니다. 죽은 자도 일으키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능력을 갖게 됩니다. 또한 성령은 지식, 곧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곧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고, 경배하게 하는 영입니다. 양들로 믿음을 갖게 하려면 성경을 가르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 분 안에는 모든 충만이 충만하게 거하십니다(골 1:19).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 자가 되십니다.
3a절을 봅시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여러분은 무엇으로 즐거움을 삼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자기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 아름다운 외모, 많은 지식, 많은 소유, 사람들의 인정, 감정과 정욕을 채우고 즐기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나는 창조주 외에는 책임질 수 없는 자유분방한 외모를 갖고 태어났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바라는 것들이 채워지지 않아 “나는 세상에서 패배자다” “나는 불행한 자다”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것들로 즐거움을 삼는 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갈증 가운데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해와 무시와 핍박과 침 뱉음 당함과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분노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자신을 온전히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인정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섬긴다는 그 자체를 즐거움을 삼기 쉽습니다. 그럴 때 오해받거나 허물과 약점을 지적받고 판단 받으면 참기 힘들고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나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라도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완벽하게는 안 될지라도 그 방향으로 기도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상과 꿈과 야망을 접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남모르는 비밀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혼의 존재인 우리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됩니다.
셋째, 공의와 화목의 왕이신 한 싹(3b-10)
예수님은 한 싹, 한 가지로 오셨으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자들과는 본질이 다르십니다. 3b-5절을 봅시다.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우리 학사 목자님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힘든 것은 과중한 업무가 아닐 것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윗사람이나 아래 사람이나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겉만 보고 혹은 단면만 보고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임의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겉만 보고, 또 소문만 듣고 “팔자가 센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녀와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해 타는 목마름으로 몸부림치는 그녀의 내면을 보셨고, 그 영혼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 고통을 함께 느끼며 속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4:13,14) 더 나아가 그녀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눈에 보이는 대로, 혹은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나 권세를 부리지 않으시고 종이 되어 죄인들을 섬기십니다. 나를 깊이 이해하시고, 나의 처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위로와 쉼을 얻습니다.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습니다. 겸손한 자들이 올바른 대접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악인들을 막대기로 심판하십니다.
이사야는 한 싹으로 오시는 공의의 왕 예수님이 다스릴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합니까? 6-9절을 봅시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리(늑대), 표범, 사자, 곰, 독사 등은 사나운 맹수들이고, 어린양, 염소, 송아지, 암소 등은 비교적 순한 짐승들입니다. 비교적 순한 이들도 자기들끼리 있으면 서로 싸우고 물고 뜯습니다. 이 두 부류의 짐승들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젖 먹는 아이,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으면 물려서 죽습니다. 약육강식, 싸움, 피 흘림, 물고, 뜯고, 먹고, 죽이고, 죽는 것이 정글의 법칙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나 곰이나 독사들도 맹수가 아니었으나, 인간의 죄로 인해 이들이 맹수가 되었고 아름다운 자연 세계가 정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왕으로 통치하시는 곳에 이런 맹수들이 본래의 순하고 귀여운 짐승으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계도 죄로 인해 실낙원이 되었고, 서로 물고 뜯는 정글로 변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 사람들은 치열한 생존경쟁, 약육강식 (예를 들면, 대형마트가 골목 가게를 삼키고 대형교회들이 개척교회 사람들을 수평이동 시켜 흡수하는 등), 미움, 절망, 슬픔, 피해의식, 좌절, 열등감, 두려움 등으로 상처받고 병듭니다. 인류 역사 이래 싸움과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죽었고 또 죽습니까?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해서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흔들어놓았습니다. 남한군도 자위권 차원에서 포를 쏘고 무력시위를 했습니다. 한반도는 무서운 핵전쟁의 화약고가 되지 않을까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헌법기관이요 정치지도자들인 국회의원들이 도끼와 톱을 들고 국회의 문을 찍고 자릅니다. 우리 국회의원들의 몸싸움 장면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12월의 올해의 사진으로 뽑혔습니다. 우리의 본성 속에 맹수의 기질이 다 있습니다. 사나운 이빨이 있고, 무서운 독이 있습니다. 겉으로 미소를 머금고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무서운 독을 내뱉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어떤 법이나 제도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외교력과 교육을 통한 노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늑대가 어린 양과 “형님! 아우님!” 하면서 함께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표범이 염소와 함께 슬리핑 펠로우십을 나눌 것이며, 암소와 곰이 겸상하여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완전한 화목이요 평화입니다. 언제입니까? “그 때에”입니다. 곧 한 싹으로 오신 메시아가 다스릴 때입니다. 9절에 의하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때입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실낙원의 세상이 되었지만, 한 싹으로 오신 인류의 구주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낙원을 회복하셨습니다. 엡 2:13,14절은 말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미 그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은 놀라운 과학문명의 발달로 갈수록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갤럭시탭을 하나 구했더니 전화는 기본이고, 이 하나로 성경, 인터넷, 네비, 카메라, 캠코더, 신문, TV 등 온갖 기능을 다해줍니다. 어디까지 갈지 놀랍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내면은 갈수록 날을 세우고, 전쟁을 하듯이 살아갑니다. 본문에는 유순함과 부드러움과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어린 양, 어린 염소, 송아지, 어린 아이, 젖 먹는 아이, 젖 뗀 아이들이 나옵니다. 사나운 사람도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생기면 사나움이 빠지고 유순하고 부드럽고 여유가 있는 자유인이 됩니다. 한 개인의 내면에 예수님이 오셔서 다스리시면 우리의 독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죄의 독, 이기심의 독, 미움의 독이 빠집니다. 한 번에 완전히 다 빠지지 않더라도, 독이 솟아나려 할 때마다 회개하며 예수님을 중심에 모셔 들여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점점 더 깊은 곳에서부터 독이 빠집니다. 내면이 치료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갖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벽이 무너지고 더 많은 사람을 친구로 영접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주며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벽을 무너뜨리고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함께’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반복됩니다. 함께 할 수 없었던 상극의 관계들이 무너지고, 함께 먹고, 눕고, 장난치며, 즐겁게 사는 모습이 낙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 모두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먹고, 놀고, 눕고, 장난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함께 아름다운 화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는 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성경공부를 많이 합니다. 많은 지식이 쌓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내년이면 나이 50이 됩니다. 그만큼 성숙합니까? 저는 그렇게 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왜입니까? 저부터 지식은 많아졌는지 몰라도 여호와를 아는 앎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커졌을지 몰라도 영성은 커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50주년을 맞으면서 저부터 회개하고 우리 모두가 몸부림쳐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영성이 커져서 서로 용서하며, 누구나 함께 할 수 있고, 함께 먹고 놀 수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고, 베풂과 사랑을 행하는 공동체로 성장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되고, 내가 가는 곳이 이렇게 변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개인의 내면에서 먼저 이런 회복이 이루어지면, 가정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내가 몸담은 직장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된 자들이 많아지면 국가가 변화될 것입니다. 종국에는 전쟁이 그치고 총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진정으로 남과 북이 하나 되고,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세계 평화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 할수록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거룩한 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나온 목적입니다.
한 싹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 이 나라는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유가 회복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입니다. 온 인류와 만물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9절 말씀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0절을 봅시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싸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만민의 기치”는 만민이 공감하고 따르는 깃발을 말합니다. 한 싹 예수님은 만민이 따를 깃발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열방이 그에게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주께 헌신된 선교사들을 통해서 온 세상 만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분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역사는 계속되고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 분이 거하는 곳은 영화롭습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곧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도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약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계시기 때문에 영화롭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합니다. 세상을 품고 기도하고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합니다. 2010년 전 성탄절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났습니다.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셨습니다. 그 영은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그분은 공의와 정직과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가 오심으로 정글 같은 실낙원의 세상에 용서와 화목이 임했습니다. 상처가 치유되고,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 분은 만민의 기치가 되십니다.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롭습니다. 그곳에는 해됨도 상함도 사라집니다. 오,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비우고 낮추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새롭게 모셔 들입시다. 그분을 통해 위로와 격려와 죄 사함을 받읍시다. 그분이 부어주시는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충만을 받아 모든 사나움과 독을 제거하고,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들로 변화를 받읍시다. 그분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그분을 전해줍시다. 만민이 그분께로 돌아오도록 가슴에 품고 기도합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할렐루야!
(2010.12.26. 인천, 중앙, 동교 연합예배)
한 싹
말씀/이사야 11:1-10
요절/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Merry Christmas!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축하합니다. 인천, 중앙, 동교 연합 성탄수양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본래는 오늘 한양 성탄연합예배에서 다른 말씀을 전할 예정이었으나 여러분들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성탄의 정신이라 생각되어 만사 제켜놓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주신 성탄 메시지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때에 소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예를 들면, 사 1-5장에서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죄로 인해 받을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시고는 7장에서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8장에서 앗수르의 침공으로 유다가 완전히 멸망할 것을 예언하시고는 9장에서 한 아기의 약속, 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한 싹으로서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십니다. 성탄 메시지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오늘 본문을 통해 한 싹으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과 구원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1)
이사야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무엇에 비유합니까? 1절을 봅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의 줄기에서 날 한 싹’, ‘이새의 뿌리에서 날 한 가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새가 누구지요? 다윗 왕의 부친입니다. 다윗은 누구지요? 그의 후손 가운데 인류의 구주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분입니다. 세상의 구주가 어느 날 뜬금없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동안 준비하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약속과 예언의 성취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이 세상에 구주를 보내시겠다는 최초의 약속을 어디에서 주셨습니까? 에덴동산입니다. 창 3:15절에서 “사탄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다시 주셨고, 그의 후손인 다윗 왕에게는 더욱 구체적인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구주시기 때문에 믿을 수 있고, 그 구주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 말씀이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인류의 구주가 ‘평범한 자’ ‘낮은 자’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의 줄기”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라고 했습니다. 이새는 가난하고 평범한 이름 없는 농부였습니다. 그의 막내아들 다윗 또한 양치기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화려한 왕궁에서 황금요람에 누인 황태자로 오셔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창조주께서 여관집 마구간에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습니다. 멸시 받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왜 그렇게 오셨습니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한 싹’, ‘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싹과 가지는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자라 꽃을 피우고 결실합니다. 본문에서 ‘결실한다’는 것은 구속역사를 완성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서, 명령하고 주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약한 모습으로서 오셔서, 섬김과 희생과 자기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살리는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누구나 그 분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흉악한 죄인도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죄에 넘어지고 뒤뚱거리면서도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습니다. 격려를 받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요한이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고백이 저의 고백입니다. 여러분들의 고백도 같은 줄 믿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본문이 주는 세 번째 메시지는 인간적으로 절망의 때가 하나님의 소망의 때라는 것입니다. ‘줄기’는 the stump, 곧 ‘그루터기’를 말합니다. 나무가 잘려버려 낙엽 밑에 숨겨진 보이지도 않는 밑동을 말합니다. ‘뿌리’는 어떠합니까? 이는 흙속에 묻혀있어 형체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다윗의 집과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이어 바벨론, 헬라, 로마가 차례로 짓밟아 잘려진 밑동이요 뿌리처럼 되었습니다. 그 그루터기마저도 땅속에 묻혀버린 상태였습니다. 이제 끝장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완전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그루터기에서 한 싹을 나게 하시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를 내심으로 소망의 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는 올리브나무는 뿌리에서 가지를 낸다고 합니다. 뿌리에서 나온 가지는 불사조와 같이 살아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망할 수 없으며, 언제나 새롭게 그루터기에서 싹이,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언제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대개는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고 절망적일 때 예수님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대학 1학년, 육체에서 죄의 소욕은 솟구치고 젊음과 혈기는 왕성한데,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절망감 때문에 밤이면 술에 취하고 방황하던 때, 마더 배리의 영어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되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비롯해서 성경의 인물들도 모두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때 박해와 고난을 견딘 순교자들의 피로 인해 복음의 불이 붙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 있습니까? 소망이 안 보이는 분 있습니까? 지금이 새 역사가 시작될 때입니다. 겸손히 마음을 열고, 한 싹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십시오.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난 한 싹이요, 그의 뿌리에서 난 한 가지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한 싹(2-3a)
이사야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는 한 싹 위에 누가 임한다고 예언합니까? 2절을 봅시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여호와의 영, 곧 성령이 강림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예언대로 아기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로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 치심과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령이 충만하셨고, 성령님께 이끌리셨고, 인도를 받으셨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감동으로 복음을 전하셨고, 성령으로 병든 자를 고치셨고, 성령으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셨습니다(사 61:1). 심지어 히 9:14절에 보면, 십자가의 죽음도 성령의 역사였고, 롬 8:11절에 보면, 부활도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과 분리해서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어떤 영입니까? 첫째로 지혜의 영입니다. 모든 지혜가 성령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는 스마트 폰으로 통하는 복잡한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나 영특하고 조숙해서 자식 키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직장이든 학교든 사람과 관계 맺는 것도 쉽지 않고, 우리는 비정규직과 88만원 세대로 회자(膾炙)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캠퍼스 학생들을 양치고 목양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정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의 영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 나아가면 지혜를 얻습니다. 또한 성령은 총명, 곧 진리를 분명하게 밝히는 진리의 영입니다. 누구나 진리를 찾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해 방황합니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질문도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왜 태어나며, 왜 죽으며,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세상에서 정점에 도달했던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도 진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진리를 발견합니다. 성령님은 또한 모략, 곧 상담의 영입니다. 요즈음 급변하는 삶의 환경, 과중한 스트레스, 복잡한 인간관계, 온갖 죄와 상처로 인해 꼬이고 병들고 뒤틀린 내면으로 고통하는 사람, 정신적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증상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점에서는 모두가 앓고 있습니다. 전인격적인 치료와 생명을 살리는 카운슬링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회복케 하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상담해주십니다. 또한 성령은 재능, 곧 권능의 영입니다. 우리들에게 악한 영들과 원수 사탄의 교묘한 도전이 있습니다. 이들을 이길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창조의 권능이요, 전능의 능력의 영입니다. 죽은 자도 일으키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능력을 갖게 됩니다. 또한 성령은 지식, 곧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곧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고, 경배하게 하는 영입니다. 양들로 믿음을 갖게 하려면 성경을 가르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 분 안에는 모든 충만이 충만하게 거하십니다(골 1:19).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 자가 되십니다.
3a절을 봅시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여러분은 무엇으로 즐거움을 삼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자기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 아름다운 외모, 많은 지식, 많은 소유, 사람들의 인정, 감정과 정욕을 채우고 즐기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나는 창조주 외에는 책임질 수 없는 자유분방한 외모를 갖고 태어났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바라는 것들이 채워지지 않아 “나는 세상에서 패배자다” “나는 불행한 자다”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것들로 즐거움을 삼는 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갈증 가운데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해와 무시와 핍박과 침 뱉음 당함과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분노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자신을 온전히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인정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섬긴다는 그 자체를 즐거움을 삼기 쉽습니다. 그럴 때 오해받거나 허물과 약점을 지적받고 판단 받으면 참기 힘들고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나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라도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완벽하게는 안 될지라도 그 방향으로 기도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상과 꿈과 야망을 접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남모르는 비밀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혼의 존재인 우리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됩니다.
셋째, 공의와 화목의 왕이신 한 싹(3b-10)
예수님은 한 싹, 한 가지로 오셨으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자들과는 본질이 다르십니다. 3b-5절을 봅시다.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우리 학사 목자님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힘든 것은 과중한 업무가 아닐 것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윗사람이나 아래 사람이나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겉만 보고 혹은 단면만 보고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임의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겉만 보고, 또 소문만 듣고 “팔자가 센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녀와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해 타는 목마름으로 몸부림치는 그녀의 내면을 보셨고, 그 영혼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 고통을 함께 느끼며 속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4:13,14) 더 나아가 그녀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눈에 보이는 대로, 혹은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나 권세를 부리지 않으시고 종이 되어 죄인들을 섬기십니다. 나를 깊이 이해하시고, 나의 처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위로와 쉼을 얻습니다.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습니다. 겸손한 자들이 올바른 대접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악인들을 막대기로 심판하십니다.
이사야는 한 싹으로 오시는 공의의 왕 예수님이 다스릴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합니까? 6-9절을 봅시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리(늑대), 표범, 사자, 곰, 독사 등은 사나운 맹수들이고, 어린양, 염소, 송아지, 암소 등은 비교적 순한 짐승들입니다. 비교적 순한 이들도 자기들끼리 있으면 서로 싸우고 물고 뜯습니다. 이 두 부류의 짐승들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젖 먹는 아이,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으면 물려서 죽습니다. 약육강식, 싸움, 피 흘림, 물고, 뜯고, 먹고, 죽이고, 죽는 것이 정글의 법칙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나 곰이나 독사들도 맹수가 아니었으나, 인간의 죄로 인해 이들이 맹수가 되었고 아름다운 자연 세계가 정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왕으로 통치하시는 곳에 이런 맹수들이 본래의 순하고 귀여운 짐승으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계도 죄로 인해 실낙원이 되었고, 서로 물고 뜯는 정글로 변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 사람들은 치열한 생존경쟁, 약육강식 (예를 들면, 대형마트가 골목 가게를 삼키고 대형교회들이 개척교회 사람들을 수평이동 시켜 흡수하는 등), 미움, 절망, 슬픔, 피해의식, 좌절, 열등감, 두려움 등으로 상처받고 병듭니다. 인류 역사 이래 싸움과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죽었고 또 죽습니까?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해서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흔들어놓았습니다. 남한군도 자위권 차원에서 포를 쏘고 무력시위를 했습니다. 한반도는 무서운 핵전쟁의 화약고가 되지 않을까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헌법기관이요 정치지도자들인 국회의원들이 도끼와 톱을 들고 국회의 문을 찍고 자릅니다. 우리 국회의원들의 몸싸움 장면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12월의 올해의 사진으로 뽑혔습니다. 우리의 본성 속에 맹수의 기질이 다 있습니다. 사나운 이빨이 있고, 무서운 독이 있습니다. 겉으로 미소를 머금고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무서운 독을 내뱉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어떤 법이나 제도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외교력과 교육을 통한 노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늑대가 어린 양과 “형님! 아우님!” 하면서 함께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표범이 염소와 함께 슬리핑 펠로우십을 나눌 것이며, 암소와 곰이 겸상하여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완전한 화목이요 평화입니다. 언제입니까? “그 때에”입니다. 곧 한 싹으로 오신 메시아가 다스릴 때입니다. 9절에 의하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때입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실낙원의 세상이 되었지만, 한 싹으로 오신 인류의 구주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낙원을 회복하셨습니다. 엡 2:13,14절은 말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미 그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은 놀라운 과학문명의 발달로 갈수록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갤럭시탭을 하나 구했더니 전화는 기본이고, 이 하나로 성경, 인터넷, 네비, 카메라, 캠코더, 신문, TV 등 온갖 기능을 다해줍니다. 어디까지 갈지 놀랍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내면은 갈수록 날을 세우고, 전쟁을 하듯이 살아갑니다. 본문에는 유순함과 부드러움과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어린 양, 어린 염소, 송아지, 어린 아이, 젖 먹는 아이, 젖 뗀 아이들이 나옵니다. 사나운 사람도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생기면 사나움이 빠지고 유순하고 부드럽고 여유가 있는 자유인이 됩니다. 한 개인의 내면에 예수님이 오셔서 다스리시면 우리의 독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죄의 독, 이기심의 독, 미움의 독이 빠집니다. 한 번에 완전히 다 빠지지 않더라도, 독이 솟아나려 할 때마다 회개하며 예수님을 중심에 모셔 들여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점점 더 깊은 곳에서부터 독이 빠집니다. 내면이 치료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갖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벽이 무너지고 더 많은 사람을 친구로 영접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주며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벽을 무너뜨리고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함께’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반복됩니다. 함께 할 수 없었던 상극의 관계들이 무너지고, 함께 먹고, 눕고, 장난치며, 즐겁게 사는 모습이 낙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 모두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먹고, 놀고, 눕고, 장난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함께 아름다운 화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는 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성경공부를 많이 합니다. 많은 지식이 쌓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내년이면 나이 50이 됩니다. 그만큼 성숙합니까? 저는 그렇게 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왜입니까? 저부터 지식은 많아졌는지 몰라도 여호와를 아는 앎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커졌을지 몰라도 영성은 커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50주년을 맞으면서 저부터 회개하고 우리 모두가 몸부림쳐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영성이 커져서 서로 용서하며, 누구나 함께 할 수 있고, 함께 먹고 놀 수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고, 베풂과 사랑을 행하는 공동체로 성장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되고, 내가 가는 곳이 이렇게 변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개인의 내면에서 먼저 이런 회복이 이루어지면, 가정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내가 몸담은 직장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된 자들이 많아지면 국가가 변화될 것입니다. 종국에는 전쟁이 그치고 총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진정으로 남과 북이 하나 되고,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세계 평화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 할수록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거룩한 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나온 목적입니다.
한 싹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 이 나라는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유가 회복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입니다. 온 인류와 만물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9절 말씀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0절을 봅시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싸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만민의 기치”는 만민이 공감하고 따르는 깃발을 말합니다. 한 싹 예수님은 만민이 따를 깃발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열방이 그에게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주께 헌신된 선교사들을 통해서 온 세상 만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분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역사는 계속되고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 분이 거하는 곳은 영화롭습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곧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도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약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계시기 때문에 영화롭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합니다. 세상을 품고 기도하고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합니다. 2010년 전 성탄절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났습니다.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셨습니다. 그 영은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그분은 공의와 정직과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가 오심으로 정글 같은 실낙원의 세상에 용서와 화목이 임했습니다. 상처가 치유되고,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 분은 만민의 기치가 되십니다.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롭습니다. 그곳에는 해됨도 상함도 사라집니다. 오,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비우고 낮추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새롭게 모셔 들입시다. 그분을 통해 위로와 격려와 죄 사함을 받읍시다. 그분이 부어주시는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충만을 받아 모든 사나움과 독을 제거하고,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들로 변화를 받읍시다. 그분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그분을 전해줍시다. 만민이 그분께로 돌아오도록 가슴에 품고 기도합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할렐루야!
(2010.12.26. 인천, 중앙, 동교 연합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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