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성탄 수양회 특강(시편 40편)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여호와(이스패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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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성탄수양회 제 2 강
말씀 시편 40:1-17
요절 시편 40:1, 2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여호와
시인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힘들고도 힘들었던 시기를 지났는데, 이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란 깊고 무섭고 절망스러운 웅덩이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기가 막힐 웅덩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저는 이런 기억이 떠오릅니다. 시골에서는 겨울에 논에 물을 대서 썰매를 타기도 하지만 강추위가 계속되면 큰 저수지까지 얼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넓은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고 신나게 놉니다. 그러다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 저수지가 녹기 시작하는데 위험해집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얼음이 녹으면서 단단한 얼음이 말랑말랑해지는데, 그 얼음 위를 썰매로 빠르게 지나가면 얼음이 쑥 들었다가 나오는데, 스릴도 있고 출렁이는 맛도 있기 때문에 위험스러운 썰매타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그곳을 지나다가 얼음이 그만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논도 아니고 저수지에 추운 겨울에 빠진 것입니다. 빠졌지만 다행히 아직 깨지지 않은 부분을 손으로 잡아서 얼음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위험한 상황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얼음을 짚고 나오려고 하면, 짚은 얼음이 또 깨지고 또 깨지고 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사색이 되고 나머지 아이들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다행히 어른이 지나가다가 끌어내 건져주어서 겨우 살아났습니다. 깊은 웅덩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힘들고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거기에서 나오기 위해서 기를 쓰지만 좌절하고 또 좌절하는 상황,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보기가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수렁도 마찬가지입니다. 늪과 같은 깊은 수렁에 빠지면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이 빠집니다.
텔레비전에서 된장 부부로 알려진 부부 이야기를 방송한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은 농약사를 운영하면서 돈도 잘 벌었고 가정은 화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일본이 한국의 전통 음식인 된장을 연구해서 상품화에 성공하고 한국의 된장시장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적어도 된장 시장을 일본에 내주지 않아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잘 나가던 농약사를 정리하고 순천에 된장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된장을 잘 아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된장을 만들면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소량의 된장이 아니라 대량의 된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합니다. 많은 양의 콩을 삶아서 된장을 만들었는데 써서 먹을 수가 없기도 하고 별의 별 문제가 다 생깁니다. 게다가 중국산 콩의 수입으로 한국산 콩만 고집하는 그의 된장, 청국장은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된장에 대해서 새로 공부를 하고 연구하고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있던 돈도 다 까먹고, 거액의 대출까지 받았지만 빚만 쌓여가는, 빚이 빚을 낳는 수렁에 빠졌습니다. 사업을 접을 수도 없고 계속하자니 앞날은 캄캄하기도 했습니다. 빚은 늘어가고 부부는 싸움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나중에 아내는 암에 걸렸는데 아마 이 시기에 받았던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이 그 때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외롭게 된장을 만들면서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희망을 삼는 모습을 보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쨍하고 해 뜰 날이 왔습니다. 우리 사회에 갑자기 웰빙 바람이 불면서 한국 산 콩으로 만든 건강식품에 사람들이 돈을 아끼지 않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만든 된장, 청국장은 맛있고 믿을만한 식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엄청난 빚도 거의 갚았고 사업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큰 어려움, 시련의 시기를 몇 번씩은 만납니다. 내 삶은 평탄하기만 했고, 그래서 나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기 못하겠다는 분이 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겪을 것입니다. 인생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본인이 잘 나가면 나중에 부부의 문제이든 자녀의 문제이든 어떤 문제로든지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캄캄합니다.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되는 학생들이 허다합니다. 중앙센타 CBF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직장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중에 편의점에서 알바하면서 살면 되죠, 뭐.” 직장을 잡지 못해서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지만 앞날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고통과 두려움을 아이들이 알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 외에도 힘든 가정의 문제, 남편과 아내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질병과 사업과 경제적인 문제로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어떤 분은 영적인 침체에 빠졌는데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상황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같습니다. 인생에서 깊은 웅덩이에 가운데 있을 때, 그 시기가 상당히 오래 지속될 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만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를 봐도 절망만 보이고, 이대로 이렇게 살다가 인생 끝나지 싶습니다. 너무 힘들고 두렵고 외롭고 죽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시인은 바로 이와 같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두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시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여호와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도우심을 바라며 부르짖고 부르짖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여호와를 바라보며, 그에게 나아가 부르짖으면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천지 지으신 여호와 나의 왕이여...” 4절을 보면, 시인은 나중에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절망의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립니까? 여호와께 나아가 부르짖으며 여호와를 의지합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의 말과 길을 따라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어떻게 말했을까요?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던 신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꼭 든다, 그의 마음은 내 마음과 똑 같다고 하셨던 신실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신실한 그가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며 조롱했을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부르던 하나님은 어디에 가셨냐?’ ‘하나님이 어디 있다고 그래?’ ‘나는 믿는 자에게 고통을 주는 하나님은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어’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어’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을 것이 있으면, 거의 죽을 상황이 아니면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과 머리와 성실로 수렁에서 나오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깡과 오기로 버티며 하나님보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합니다.
거짓에 치우치는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웅덩이를 통해서 나를 부르시고 만나주시고자 하시는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할 기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교만이 깨질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썩은 동아줄 같이 허무한 것을 발견할 때입니다. 그것이 웅덩이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바른 길이요 방법입니다. 그러나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은 거짓된 방법을 통해서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수렁에 벗어날 묘안을 짜내려 안간힘을 쓰며 편법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찾아다니며 해결하려 합니다.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을 만나서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술 마시며 고통을 덜 느끼고 잊어보려고 합니다.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인터넷을 뒤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잠으로 세월을 낭비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찾는 대신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고,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약간의 어려움이 있어도 나의 도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울며 부르짖어 기도하며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의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갈망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심령이 가난할 수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그들을 만나 주시고 도와주시고 위로하여 주십니다. 배부르게 하십니다. 인생의 큰 환난이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리고 기다릴 수도 있고, 오히려 교만해지고 거짓에 치우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작은 차이이지만 그 삶은 크게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천국을 얻고 누리고, 교만한 자는 지옥에서 살면서 지옥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인격과 신앙과 삶이 성숙해지는가 하면, 망가져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무엘서에 나오는 한나와 브닌나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질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시인처럼 환난의 때에 교만해지지 않고 거짓에 치우치지 않고, 여호와를 바라보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말 그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인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기가 막힌 방법으로 끌어올리시고 그 발을 반석 위에 두사 평안하고 안전하게 하셨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구원을 받은 시인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깊은 수렁에서 나온 것 자체가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수렁에서 나왔다는 것, 챙하고 해 뜰 날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다. 시인의 기쁨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기다리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부르짖고 부르짖는데, 당장 응답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힘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속히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는지 야속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그의 귀에 불신과 두려움을 주는 말로 속삭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사정을 몰라’ ‘네 기도는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아’ ‘기도한다고 달라질 것 같아?’ 그러나 시인은 확실히 깨달았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을 때도 나의 신음과 탄식을 듣고 계셨다는 것을. 내 사정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과연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고 살아계신 분이심을(10) 그 눈과 온 몸으로 전율하며 체험합니다. 이후 시인은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입에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두셨습니다. 예전에 그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신앙의 여러 훈련을 받으며 깨지고 끝이 보이지 않은 날을 보낼 때, 때때로 마음이 슬퍼서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창문 두드리고 비가 오네. 눈물의 빗줄기...” 시인은 이제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그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랑,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에 대한 강한 믿음과 확신에 찬 고백과 증거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의 노래가 달라졌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졌습니다.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무게가 생겼습니다. 깊은 웅덩이에서의 구원, 수렁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열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노래,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합니다(3). 하나님이 없다고 하던 사람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믿음이 약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던 사람들,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기가 막히는 구원의 이야기와 그의 노래를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심을 느끼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것, 믿었지만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인 것처럼 여겼던 죄를 깨닫고 두려워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또 현재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왜 나면 있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시라고, 고난의 뒤편에 축복이 있다고, 그 축복을 바라보라고,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다고, 주님이 손잡고 계신다고, 힘을 내라고 격려하고 도전하고, 공감하며 위로합니다. 또 그는 말합니다. 5절을 봅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셀 수도 없이 많음을 널리 알립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널리 알립니다. 사람들의 그의 이야기와 수렁에서 그가 만난 하나님, 그 속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간증을 들으며 감동합니다. 새삼 내 삶을 돌아봐도 주께서 내게 행하신 기적이 셀 수도 없이 많음을 봅니다. 또 내가 다 알 수 없는 나를 향한 주님의 생각과 계획은 많음을 영접하고 감사합니다.
“고난은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놓고 보면 시인이 경험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정말 고난의 모습으로 변장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수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새 노래를 부를 정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요 위로이요, 자극이요 채찍이 되었습니다. 확실히 깊은 웅덩이와 수렁의 경험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때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을 달라집니다. 확실히 말이 달라집니다. 불평과 원망과 쓴 뿌리의 말이 감사와 찬양의 말로, 불신과 부정의 말이 희망과 비전과 긍정의 말로 바뀝니다. 그 인격이 변하고 얼굴이 변하고, 인간관계가 변하고 삶이 변합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변합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십니다. 나의 부르짖음, 신음을 듣고 계십니다. 나의 모든 사정을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나를 능히 어떤 웅덩이와 수렁에서도 끌어올리시는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십니다.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나를 구원하시되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그 자체에서 나를 건져 주십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게도 하시고, 병을 낫게도 하시고, 바다에 길을 내시기도 하십니다. 다윗 자신이 이를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포위되어서 이제 죽었구나, 최후의 1인까지 결사항전하자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힐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사울이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힘든 사람은 힘들게 하는 사람이 바뀌거나 또는 그 사람을 쳐서 죽이기도 하십니다. 어떤 기도하는 아내가 있었는데, 신앙이 없는 남편이 술 마시면 행패를 부시고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은 남편의 신발을 들고 새벽 기도에 나가서 “신발이 먼저 왔사오니, 신발의 주인도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스스로도 웃겨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발 주인이 나오게 되었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되 그를 그 수렁에 두시고 구원하시기도 하십니다. 수렁에 있는 그를 변화시켜서 그 웅덩이와 수렁이 천국이 되게 하시고 그 자체가 희망과 위로와 격려가 되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어떤 여대생이 성형수술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자살했습니다. 그렇다면 전신 화상에, 얼굴이 화상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이지선 씨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실제로 이지신 씨의 홈페이지에 “저러고도 사는지 몰라”라는 댓글을 다는 사람도 있었다는데, 그는 씩씩하게 “네, 이러고도 삽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사실 시편 40:1,2 말씀은 이지선 씨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예전의 귀엽고 아름다운 외모를 돌려주시지 않고 그대로 두십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새 노래를 부릅니다. 깊은 웅덩이에서 만난 하나님, 깨달은 삶의 진리를 노래로, 간증으로 증거하며 ‘희망의 나무’가 되어 살아갑니다. ‘닉 부이치치’를 다 아실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먹을 수도 없습니다. 꼭 팔과 다리가 없는 마네킹 같습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비서가 마네킹처럼 안아서 옮기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정말 나무토막 같은 육신입니다. 그런데 그의 정신은 얼마나 건강하고 밝고 진취적이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의 밝고 진취적인 삶이 팔다리가 멀쩡하고 할 일이 많으면서도 불평하고 무력하게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는 “Never give up”(포기하지 마세요)라고 권면합니다. 그 앞에서는 어떻게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입을 다물 뿐이고,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제가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었네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수렁에서 나와 새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까? 창세기를 보면 바로가 꿈을 행복하고도 무시무시한 꿈을 꾸었습니다. 신하들에게 그 꿈을 얘기했지만 이집트에서는 그 꿈을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감옥에 있던 요셉이 불려나왔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그의 꿈을 해석할 자가 없다고 하자, 요셉은 바로에게 답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창 40:8)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하게 해 주십니다. 영어 문장이든 한국어 문장이든 해석을 잘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전혀 다른 뜻으로 오해를 하기도 하고, 아예 해석 자체를 못하고 그 뜻을 알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오직 그 해석을 바로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깊은 수렁에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이유는 해석을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아예 못하거나 잘못 해석하기 때문에 어둠에 어둠을 더하고, 고통에 고통을 더합니다. 좌절하다가 망가져 버립니다. 축복과 하나님의 선물을 저주로 오해하고, 저주와 재앙을 축복과 선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면, 삶에 대한 해석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셨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축복과 형통한 날에는 받을 수 없는 선물을 주고자 하십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바울의 삶을 보면 정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결코 낙심하지도 않고 거꾸러지지도 않는 불굴의 모습을 보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쇠처럼 강한 체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자신은 질그릇처럼 약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질그릇처럼 약하기만 한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계실 때, 그는 깊은 웅덩이를 감당할 힘을 얻고, 바르게 해석하며,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정금같이 단련되어 나옵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자의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죄의 웅덩이와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교육을 많이 받아서 아는 것이 많거나, 수양과 고행을 통해서 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으면 완전에 가까워질까요? 그렇게 도를 닦으며 마음을 닦고 욕심을 비우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아, 내가 많은 것을 비워냈구나. 이제 조그만 더 하면 희망이 보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까요? 제가 단언하건데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수양을 하며 도를 닦는 사람은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발견하며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빨아도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고, 비워도 비워도 새로 채워지고 비울 것이 또 있는, 나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고 천국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계명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하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보고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간음하였기에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버리고 오른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보’라는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운전하면서 욕이 튀어나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눈을 뽑고 오른 손을 찢고 발을 찢고 다 찢어내고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 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침 잠에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에 별 특이한 알람시계가 다 있더군요. 미국의 한 아마추어 발명가가 제작한 ‘베이컨 알람장치’는 일반적인 알람시계에 두꺼운 베이컨 한 조각을 담을 수 있는 팬과 작은 버너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알람이 울려도 사용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때부터 ‘특수 작업’이 시작됩니다. 베이컨이 담긴 팬이 달궈지면서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가 풍기고, 아울러 지글지글 요리 소리도 나면서 잠꾸러기를 일어나게 만듭니다. ‘블로우플라이(Blowfly)’라는 이름의 알람시계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시계에 달린 프로펠러가 작동하여 공중에 떠다니면서 모기와 파리 같은 귀에 거슬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날아다닙니다. 시계를 끄려면 날아다니는 알람시계를 잡아서 꺼야 합니다. ‘퍼즐알람시계’도 있는데 알람을 맞춰놓은 시간이 되면 퍼즐이 사방으로 튀기 때문에 시계를 침묵시키려면 공중분해 된 퍼즐을 주워 담아야만 하는 시계입니다. 퍼즐 조각을 찾다 찾다 못 찾아서 열 받아서 시계 배터리를 빼버릴 수 있겠죠? 그런 사람들을 대비하여 배터리를 빼려면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수학 문제 5개를 풀어야 알람이 꺼지는 시계도 있는데, 수학 문제가 매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잠 하나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욕망에 약한 것이 사람입니다. 저는 스님들을 보면서 인간은 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을 보면서도 인간은 별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스탭 목자님들을 보면서도 인간은 별 수 없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제 자신을 보면서 저는 별 수 없는 인간으로의 깊은 절망과 탄식과 고통을 느낍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저는 그것이 진리임을 제 자신을 보면서 절감하며 삽니다. 그렇게 우리는 죄의 수렁에서 나올 수 없는 소망 없는 자들입니다. 죄 가운데 허우적거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이 어떤 날입니까? 성탄절입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죄와 저주와 지옥의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우리를 끌어 올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어둠의 웅덩이에서 건져 빛과 생명의 반석 위에 든든하게 세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끌어 올리시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직접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구원을 줄테니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면, 올라오라고 하셨다면, 소망이 없을 죄인들이 정말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디로 올라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가 내려오셔서 우리를 끌어올리셨습니다. 영원이신 분이 시간 안으로, 영이신 분이 불편하고 약하고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센타에서 아무리 설명하고 표현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찬송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예수님으로 인해 중앙센타의 박절제 목자님은 술과 귀신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집안에서 자라면서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고, 어느 때부터인가 재미삼아 친구들에게 점을 쳐주었는데 점괘가 보였고 들어맞았습니다. 잘못했으면 무당 될 뻔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중앙센타의 김마리아 사모님은 중앙대 단과대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똑똑하고 자기가 강한 분이셨습니다. 성경공부를 오랫동안 했지만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사가 된 이후 불면증이 찾아왔습니다. 해마다 겨울만 되면 몇 개월씩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클까요? 미칠 것 같고 죽고 싶을 것 같습니다. 피곤하여 몸은 쇠하고 정신은 없고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 상태가 계속 될 대 얼마나 힘들까요? 약도 그 무엇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수렁에서 주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건져주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아는 종이 되었습니다. 겸손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제 다만 그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나는 여전히 못나고 죄에서 뒹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으며, 그 구원과 은혜가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황송한지, 오로지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인생의 여러 수렁에 빠진 사람들과 날 위해 오늘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40평의 뒷부분을 보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나온 시인은 또 절규하고 탄식합니다. 수렁에서 나왔으니 만사형통하며 날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은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며 그 구원을 바라봅니다. 새해도 어떤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처럼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심을 확신합니다. 그를 바라보며 의지하고 부르짖읍시다. 그를 기다리고 기다립시다. 그가 나를 건지실 것이며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 시편 40:1-17
요절 시편 40:1, 2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여호와
시인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힘들고도 힘들었던 시기를 지났는데, 이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란 깊고 무섭고 절망스러운 웅덩이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기가 막힐 웅덩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저는 이런 기억이 떠오릅니다. 시골에서는 겨울에 논에 물을 대서 썰매를 타기도 하지만 강추위가 계속되면 큰 저수지까지 얼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넓은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고 신나게 놉니다. 그러다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 저수지가 녹기 시작하는데 위험해집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얼음이 녹으면서 단단한 얼음이 말랑말랑해지는데, 그 얼음 위를 썰매로 빠르게 지나가면 얼음이 쑥 들었다가 나오는데, 스릴도 있고 출렁이는 맛도 있기 때문에 위험스러운 썰매타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그곳을 지나다가 얼음이 그만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논도 아니고 저수지에 추운 겨울에 빠진 것입니다. 빠졌지만 다행히 아직 깨지지 않은 부분을 손으로 잡아서 얼음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위험한 상황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얼음을 짚고 나오려고 하면, 짚은 얼음이 또 깨지고 또 깨지고 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사색이 되고 나머지 아이들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다행히 어른이 지나가다가 끌어내 건져주어서 겨우 살아났습니다. 깊은 웅덩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힘들고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거기에서 나오기 위해서 기를 쓰지만 좌절하고 또 좌절하는 상황,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보기가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수렁도 마찬가지입니다. 늪과 같은 깊은 수렁에 빠지면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이 빠집니다.
텔레비전에서 된장 부부로 알려진 부부 이야기를 방송한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은 농약사를 운영하면서 돈도 잘 벌었고 가정은 화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일본이 한국의 전통 음식인 된장을 연구해서 상품화에 성공하고 한국의 된장시장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적어도 된장 시장을 일본에 내주지 않아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잘 나가던 농약사를 정리하고 순천에 된장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된장을 잘 아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된장을 만들면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소량의 된장이 아니라 대량의 된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합니다. 많은 양의 콩을 삶아서 된장을 만들었는데 써서 먹을 수가 없기도 하고 별의 별 문제가 다 생깁니다. 게다가 중국산 콩의 수입으로 한국산 콩만 고집하는 그의 된장, 청국장은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된장에 대해서 새로 공부를 하고 연구하고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있던 돈도 다 까먹고, 거액의 대출까지 받았지만 빚만 쌓여가는, 빚이 빚을 낳는 수렁에 빠졌습니다. 사업을 접을 수도 없고 계속하자니 앞날은 캄캄하기도 했습니다. 빚은 늘어가고 부부는 싸움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나중에 아내는 암에 걸렸는데 아마 이 시기에 받았던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이 그 때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외롭게 된장을 만들면서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희망을 삼는 모습을 보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쨍하고 해 뜰 날이 왔습니다. 우리 사회에 갑자기 웰빙 바람이 불면서 한국 산 콩으로 만든 건강식품에 사람들이 돈을 아끼지 않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만든 된장, 청국장은 맛있고 믿을만한 식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엄청난 빚도 거의 갚았고 사업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큰 어려움, 시련의 시기를 몇 번씩은 만납니다. 내 삶은 평탄하기만 했고, 그래서 나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기 못하겠다는 분이 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겪을 것입니다. 인생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본인이 잘 나가면 나중에 부부의 문제이든 자녀의 문제이든 어떤 문제로든지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캄캄합니다.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되는 학생들이 허다합니다. 중앙센타 CBF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직장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중에 편의점에서 알바하면서 살면 되죠, 뭐.” 직장을 잡지 못해서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지만 앞날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고통과 두려움을 아이들이 알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 외에도 힘든 가정의 문제, 남편과 아내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질병과 사업과 경제적인 문제로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어떤 분은 영적인 침체에 빠졌는데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상황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같습니다. 인생에서 깊은 웅덩이에 가운데 있을 때, 그 시기가 상당히 오래 지속될 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만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를 봐도 절망만 보이고, 이대로 이렇게 살다가 인생 끝나지 싶습니다. 너무 힘들고 두렵고 외롭고 죽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시인은 바로 이와 같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두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시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여호와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도우심을 바라며 부르짖고 부르짖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여호와를 바라보며, 그에게 나아가 부르짖으면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천지 지으신 여호와 나의 왕이여...” 4절을 보면, 시인은 나중에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절망의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립니까? 여호와께 나아가 부르짖으며 여호와를 의지합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의 말과 길을 따라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어떻게 말했을까요?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던 신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꼭 든다, 그의 마음은 내 마음과 똑 같다고 하셨던 신실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신실한 그가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며 조롱했을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부르던 하나님은 어디에 가셨냐?’ ‘하나님이 어디 있다고 그래?’ ‘나는 믿는 자에게 고통을 주는 하나님은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어’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어’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을 것이 있으면, 거의 죽을 상황이 아니면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과 머리와 성실로 수렁에서 나오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깡과 오기로 버티며 하나님보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합니다.
거짓에 치우치는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웅덩이를 통해서 나를 부르시고 만나주시고자 하시는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할 기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교만이 깨질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썩은 동아줄 같이 허무한 것을 발견할 때입니다. 그것이 웅덩이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바른 길이요 방법입니다. 그러나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은 거짓된 방법을 통해서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수렁에 벗어날 묘안을 짜내려 안간힘을 쓰며 편법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찾아다니며 해결하려 합니다.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을 만나서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술 마시며 고통을 덜 느끼고 잊어보려고 합니다.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인터넷을 뒤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잠으로 세월을 낭비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찾는 대신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고,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약간의 어려움이 있어도 나의 도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울며 부르짖어 기도하며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의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갈망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심령이 가난할 수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그들을 만나 주시고 도와주시고 위로하여 주십니다. 배부르게 하십니다. 인생의 큰 환난이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리고 기다릴 수도 있고, 오히려 교만해지고 거짓에 치우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작은 차이이지만 그 삶은 크게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천국을 얻고 누리고, 교만한 자는 지옥에서 살면서 지옥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인격과 신앙과 삶이 성숙해지는가 하면, 망가져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무엘서에 나오는 한나와 브닌나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질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시인처럼 환난의 때에 교만해지지 않고 거짓에 치우치지 않고, 여호와를 바라보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말 그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인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기가 막힌 방법으로 끌어올리시고 그 발을 반석 위에 두사 평안하고 안전하게 하셨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구원을 받은 시인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깊은 수렁에서 나온 것 자체가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수렁에서 나왔다는 것, 챙하고 해 뜰 날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다. 시인의 기쁨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기다리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부르짖고 부르짖는데, 당장 응답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힘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속히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는지 야속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그의 귀에 불신과 두려움을 주는 말로 속삭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사정을 몰라’ ‘네 기도는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아’ ‘기도한다고 달라질 것 같아?’ 그러나 시인은 확실히 깨달았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을 때도 나의 신음과 탄식을 듣고 계셨다는 것을. 내 사정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과연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고 살아계신 분이심을(10) 그 눈과 온 몸으로 전율하며 체험합니다. 이후 시인은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입에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두셨습니다. 예전에 그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신앙의 여러 훈련을 받으며 깨지고 끝이 보이지 않은 날을 보낼 때, 때때로 마음이 슬퍼서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창문 두드리고 비가 오네. 눈물의 빗줄기...” 시인은 이제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그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랑,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에 대한 강한 믿음과 확신에 찬 고백과 증거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의 노래가 달라졌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졌습니다.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무게가 생겼습니다. 깊은 웅덩이에서의 구원, 수렁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열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노래,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합니다(3). 하나님이 없다고 하던 사람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믿음이 약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던 사람들,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기가 막히는 구원의 이야기와 그의 노래를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심을 느끼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것, 믿었지만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인 것처럼 여겼던 죄를 깨닫고 두려워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또 현재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왜 나면 있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시라고, 고난의 뒤편에 축복이 있다고, 그 축복을 바라보라고,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다고, 주님이 손잡고 계신다고, 힘을 내라고 격려하고 도전하고, 공감하며 위로합니다. 또 그는 말합니다. 5절을 봅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셀 수도 없이 많음을 널리 알립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널리 알립니다. 사람들의 그의 이야기와 수렁에서 그가 만난 하나님, 그 속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간증을 들으며 감동합니다. 새삼 내 삶을 돌아봐도 주께서 내게 행하신 기적이 셀 수도 없이 많음을 봅니다. 또 내가 다 알 수 없는 나를 향한 주님의 생각과 계획은 많음을 영접하고 감사합니다.
“고난은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놓고 보면 시인이 경험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정말 고난의 모습으로 변장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수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새 노래를 부를 정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요 위로이요, 자극이요 채찍이 되었습니다. 확실히 깊은 웅덩이와 수렁의 경험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때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을 달라집니다. 확실히 말이 달라집니다. 불평과 원망과 쓴 뿌리의 말이 감사와 찬양의 말로, 불신과 부정의 말이 희망과 비전과 긍정의 말로 바뀝니다. 그 인격이 변하고 얼굴이 변하고, 인간관계가 변하고 삶이 변합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변합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십니다. 나의 부르짖음, 신음을 듣고 계십니다. 나의 모든 사정을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나를 능히 어떤 웅덩이와 수렁에서도 끌어올리시는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십니다.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나를 구원하시되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그 자체에서 나를 건져 주십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게도 하시고, 병을 낫게도 하시고, 바다에 길을 내시기도 하십니다. 다윗 자신이 이를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포위되어서 이제 죽었구나, 최후의 1인까지 결사항전하자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힐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사울이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힘든 사람은 힘들게 하는 사람이 바뀌거나 또는 그 사람을 쳐서 죽이기도 하십니다. 어떤 기도하는 아내가 있었는데, 신앙이 없는 남편이 술 마시면 행패를 부시고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은 남편의 신발을 들고 새벽 기도에 나가서 “신발이 먼저 왔사오니, 신발의 주인도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스스로도 웃겨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발 주인이 나오게 되었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되 그를 그 수렁에 두시고 구원하시기도 하십니다. 수렁에 있는 그를 변화시켜서 그 웅덩이와 수렁이 천국이 되게 하시고 그 자체가 희망과 위로와 격려가 되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어떤 여대생이 성형수술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자살했습니다. 그렇다면 전신 화상에, 얼굴이 화상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이지선 씨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실제로 이지신 씨의 홈페이지에 “저러고도 사는지 몰라”라는 댓글을 다는 사람도 있었다는데, 그는 씩씩하게 “네, 이러고도 삽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사실 시편 40:1,2 말씀은 이지선 씨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예전의 귀엽고 아름다운 외모를 돌려주시지 않고 그대로 두십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새 노래를 부릅니다. 깊은 웅덩이에서 만난 하나님, 깨달은 삶의 진리를 노래로, 간증으로 증거하며 ‘희망의 나무’가 되어 살아갑니다. ‘닉 부이치치’를 다 아실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먹을 수도 없습니다. 꼭 팔과 다리가 없는 마네킹 같습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비서가 마네킹처럼 안아서 옮기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정말 나무토막 같은 육신입니다. 그런데 그의 정신은 얼마나 건강하고 밝고 진취적이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의 밝고 진취적인 삶이 팔다리가 멀쩡하고 할 일이 많으면서도 불평하고 무력하게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는 “Never give up”(포기하지 마세요)라고 권면합니다. 그 앞에서는 어떻게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입을 다물 뿐이고,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제가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었네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수렁에서 나와 새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까? 창세기를 보면 바로가 꿈을 행복하고도 무시무시한 꿈을 꾸었습니다. 신하들에게 그 꿈을 얘기했지만 이집트에서는 그 꿈을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감옥에 있던 요셉이 불려나왔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그의 꿈을 해석할 자가 없다고 하자, 요셉은 바로에게 답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창 40:8)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하게 해 주십니다. 영어 문장이든 한국어 문장이든 해석을 잘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전혀 다른 뜻으로 오해를 하기도 하고, 아예 해석 자체를 못하고 그 뜻을 알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오직 그 해석을 바로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깊은 수렁에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이유는 해석을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아예 못하거나 잘못 해석하기 때문에 어둠에 어둠을 더하고, 고통에 고통을 더합니다. 좌절하다가 망가져 버립니다. 축복과 하나님의 선물을 저주로 오해하고, 저주와 재앙을 축복과 선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면, 삶에 대한 해석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셨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축복과 형통한 날에는 받을 수 없는 선물을 주고자 하십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바울의 삶을 보면 정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결코 낙심하지도 않고 거꾸러지지도 않는 불굴의 모습을 보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쇠처럼 강한 체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자신은 질그릇처럼 약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질그릇처럼 약하기만 한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계실 때, 그는 깊은 웅덩이를 감당할 힘을 얻고, 바르게 해석하며,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정금같이 단련되어 나옵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자의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죄의 웅덩이와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교육을 많이 받아서 아는 것이 많거나, 수양과 고행을 통해서 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으면 완전에 가까워질까요? 그렇게 도를 닦으며 마음을 닦고 욕심을 비우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아, 내가 많은 것을 비워냈구나. 이제 조그만 더 하면 희망이 보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까요? 제가 단언하건데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수양을 하며 도를 닦는 사람은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발견하며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빨아도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고, 비워도 비워도 새로 채워지고 비울 것이 또 있는, 나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고 천국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계명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하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보고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간음하였기에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버리고 오른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보’라는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운전하면서 욕이 튀어나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눈을 뽑고 오른 손을 찢고 발을 찢고 다 찢어내고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 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침 잠에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에 별 특이한 알람시계가 다 있더군요. 미국의 한 아마추어 발명가가 제작한 ‘베이컨 알람장치’는 일반적인 알람시계에 두꺼운 베이컨 한 조각을 담을 수 있는 팬과 작은 버너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알람이 울려도 사용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때부터 ‘특수 작업’이 시작됩니다. 베이컨이 담긴 팬이 달궈지면서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가 풍기고, 아울러 지글지글 요리 소리도 나면서 잠꾸러기를 일어나게 만듭니다. ‘블로우플라이(Blowfly)’라는 이름의 알람시계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시계에 달린 프로펠러가 작동하여 공중에 떠다니면서 모기와 파리 같은 귀에 거슬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날아다닙니다. 시계를 끄려면 날아다니는 알람시계를 잡아서 꺼야 합니다. ‘퍼즐알람시계’도 있는데 알람을 맞춰놓은 시간이 되면 퍼즐이 사방으로 튀기 때문에 시계를 침묵시키려면 공중분해 된 퍼즐을 주워 담아야만 하는 시계입니다. 퍼즐 조각을 찾다 찾다 못 찾아서 열 받아서 시계 배터리를 빼버릴 수 있겠죠? 그런 사람들을 대비하여 배터리를 빼려면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수학 문제 5개를 풀어야 알람이 꺼지는 시계도 있는데, 수학 문제가 매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잠 하나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욕망에 약한 것이 사람입니다. 저는 스님들을 보면서 인간은 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을 보면서도 인간은 별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스탭 목자님들을 보면서도 인간은 별 수 없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제 자신을 보면서 저는 별 수 없는 인간으로의 깊은 절망과 탄식과 고통을 느낍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저는 그것이 진리임을 제 자신을 보면서 절감하며 삽니다. 그렇게 우리는 죄의 수렁에서 나올 수 없는 소망 없는 자들입니다. 죄 가운데 허우적거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이 어떤 날입니까? 성탄절입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죄와 저주와 지옥의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우리를 끌어 올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어둠의 웅덩이에서 건져 빛과 생명의 반석 위에 든든하게 세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끌어 올리시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직접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구원을 줄테니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면, 올라오라고 하셨다면, 소망이 없을 죄인들이 정말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디로 올라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가 내려오셔서 우리를 끌어올리셨습니다. 영원이신 분이 시간 안으로, 영이신 분이 불편하고 약하고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센타에서 아무리 설명하고 표현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찬송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예수님으로 인해 중앙센타의 박절제 목자님은 술과 귀신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집안에서 자라면서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고, 어느 때부터인가 재미삼아 친구들에게 점을 쳐주었는데 점괘가 보였고 들어맞았습니다. 잘못했으면 무당 될 뻔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중앙센타의 김마리아 사모님은 중앙대 단과대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똑똑하고 자기가 강한 분이셨습니다. 성경공부를 오랫동안 했지만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사가 된 이후 불면증이 찾아왔습니다. 해마다 겨울만 되면 몇 개월씩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클까요? 미칠 것 같고 죽고 싶을 것 같습니다. 피곤하여 몸은 쇠하고 정신은 없고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 상태가 계속 될 대 얼마나 힘들까요? 약도 그 무엇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수렁에서 주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건져주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아는 종이 되었습니다. 겸손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제 다만 그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나는 여전히 못나고 죄에서 뒹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으며, 그 구원과 은혜가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황송한지, 오로지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인생의 여러 수렁에 빠진 사람들과 날 위해 오늘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40평의 뒷부분을 보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나온 시인은 또 절규하고 탄식합니다. 수렁에서 나왔으니 만사형통하며 날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은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며 그 구원을 바라봅니다. 새해도 어떤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처럼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심을 확신합니다. 그를 바라보며 의지하고 부르짖읍시다. 그를 기다리고 기다립시다. 그가 나를 건지실 것이며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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