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년 성탄3강(마2:1-11) 아기께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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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성탄 제 3 강
말씀 마태복음 2:1-11
요절 마태복음 2:11
아기께 경배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나온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첫째, 경배자의 자세를 배우고자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배우고자 합니다. 셋째,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학자들이요 구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소동한 유대인들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메시야이 별을 보고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주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도 되십니다. 그는 만민의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성삼위 하나님께 경배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헤롯 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헤롯 왕은 악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BC 37년에 왕이 되어 BC 4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유능한 왕이었지만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로마 군인들이 성전 보물을 탈취하고자 했을 때 군인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 성전 진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성전 건축을 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켰습니다. 토목사업도 많이 벌였습니다. 로마 황제와 외교도 잘했습니다. 그는 가장 사랑했던 아내를 간통 혐의로 죽이고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심신쇠약에 걸려 권력을 찬탈하려한다는 의심 때문에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맏아들 안티파테를 반역자로 처형한 후 5일 후에 죽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증오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물론 그의 근친 중에서도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두운 시대에 예루살렘 남쪽으로 8Km 떨어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1b,2).” 동방은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인데 500-1000Km의 거리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먼 거리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메시야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 별은 민수기 24:17절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별을 관측하고 연구하던 박사들은 이사야 9장에 예언된 한 아기와 연결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서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별을 탐구하고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현장에 가서 확인하고 경배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경배란 무엇입니까?
첫째, 경배란 신적인 대상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할 때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경배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인격은 지정의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성경은 특별 계시라고 말합니다. 일반계시는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합니다. 참된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헛된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감정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찬송과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예배에서 감격과 감동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감동적인 간증을 들을 때, 눈물로 회개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기쁨을 체험할 때, 사람에 대한 긍휼이 북받쳐 오를 때,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할 때,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충성과 헌신을 결단하게 합니다. 사랑도 의지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감정보다 의지적인 표현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고 의지적으로 순종할 때 감정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할 때 생명이 충만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했는데 힘을 다한다는 것은 물질을 드려서 사랑을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보배합을 드려서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둘째, 우리가 경배드리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은 다스리는 왕이요 목자이십니다. 그는 한마디로 하면 목자 왕이십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와 죽음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목자의 리더십은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목자는 양이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한 삶을 얻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삯꾼이요 도적입니다. 삯꾼은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에게 돌아올 삯을 위해서 일합니다. 도적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양을 헤칩니다. 헤롯은 무력을 사용해서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백성들은 그가 두려워서 순종했습니다. 마음으로는 반발심이 가득했습니다. 헤롯은 자신도 죄의 종이 되었고 죄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자기 갈 길로 가는 양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죄의 삯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다스려 주십니다. 그는 사랑과 정의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인격적으로 사랑해 주심으로 우리 마음을 다스려 주십니다. 그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감격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충성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통치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자신도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모든 것을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하는 것도 일차적인 목적은 죄 가운데서 멸망할 죄인들을 구원하고 예수님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열정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죄와 사탄의 통치를 받습니다. 한 회장은 야구방망이로 회사를 다스렸습니다. 임원들도 회의 시간에 늦으면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야구방망이로 때렸습니다. 그는 돈의 위력으로 직원을 다스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 자기의 종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전한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온전한 사랑은 우리 마음에 있던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가운데 하나님을 일생 경배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한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도 누가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삶의 질과 형태가 크게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영적 리더로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각자 속한 곳에서 선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또 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셨습니까?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심으로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사람을 섬기는 일들이 많이 있지만 자기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조건 회개하라고 말하면 너나 회개하라고 반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사람은 영적 거울과 같은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도 고치고, 먹을 것도 주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오천 명을 앞에 두고 삼일 간을 꼬박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배가 고프고 돌아갈 때에 기진할까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신 또 한 가지 이유를 마가복음 1:38절에서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은 전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전도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 나오도록 돕는 것입니다. 전도한 사람들을 양육하여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니는 대학과 우리 동네에 기여를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사람 살맛이 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공의가 실행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합심동역해서 사람들을 섬기고자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많이 추락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버리고 번영만을 추구할 때 그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과 문제를 깊이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자기를 비우는 것이요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그의 왕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들은 시이저와 알렉산더 대왕이 그들이 정복한 땅과 병사들에게 용기를 심어준 사실에 대해서 감격하여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분에 대한 기억으로 신실하고도 완전히 헌신되어 그를 위하여 싸우는 군인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나의 프랑스 군대는 내가 사는 동안에 나를 배반했습니다. 알렉산더, 시이저, 클레망, 그리고 나 자신도 모두 자신의 왕국들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쉴만한 곳은 어디입니까? 무력에 호소한 곳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에 기초하여 그 분의 왕국을 혼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백 만의 사람들이 그분을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려고 합니다. 나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도록 많은 무리들을 격려하였고 마침내 나의 눈과 나의 목소리가 빛나고 나에게서 말이 나갈 때 그들의 가슴에 불이 당겨졌으나 지금은 나 홀로 세인트 헬레나 섬의 이 바위에 수갑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제 와서 누가 나를 위해 싸워주고 대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 승리의 투쟁을 할 것입니까? 나의 깊은 상처와, 전세계에 전파되고 사랑 받으며 찬양을 받으며 전세계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역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수많은 선교사들과 복음 전도자들과 신자들을 통해서 경배와 사랑과 충성을 받으시고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도 더욱 마음을 드려서 주님께 경배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어떻게 경배를 드려야 합니까? 헤롯은 박사들을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는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는 속임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박사들까지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헤롯의 의도를 알고 박사들에게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경배자와 거짓된 경배자를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구별하셨듯이 헤롯의 경배와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구별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거짓과 죄악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 예배를 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한 것은 별 자체를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별이 지시하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그들은 별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이제까지 맛볼 수 없었던 무한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박사들의 기쁨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구주 탄생에 대해 무관심한 택한 백성들의 소동과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기쁨도 있습니다. 에버랜드에 가서 느끼는 기쁨도 있습니다. 음악이나 작품이나 영화를 보고 누리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죄사함을 받은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그 말씀을 듣고 교제하며 그의 뜻을 행할 때 오는 기쁨, 그를 예배할 때 오는 기쁨은 신령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오는 기쁨은 우리를 힘있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이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고 누릴 때 기쁨은 배가 됩니다. 죄의 쾌락이 있지만 그것은 독과 같은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일생토록 그 안에서 이런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이번 성탄에 동방박사들이 누렸던 기쁨이 우리에게도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기를 본 동방 박사들을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헤롯이나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힘을 다해서 경배했습니다. 그들이 여기까지 찾아오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해야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드렸는데 그 속에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황금은 동서고금을 통해 매우 값지고 불변하는 성질의 귀중품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유향은 값비싼 향료로서 반질반질하고 향내나는 흰색의 액체입니다. 몰약은 아라비아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추출되는 것으로서 고가의 향기를 지닌 액체입니다(시 45:8;아 3:6). 이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내지는 마취제로 사용되었습니다(막 15:23). 이 예물 가운데 황금은 메시야의 왕권을,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그리고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왕과 제사장과 그분의 장사되심을 각각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 예물들은 모두가 값비싼 것들로서,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신하였을 때(14절)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성탄 보배합을 드리고자 합니다. 2011년 UBF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정성스럽게 보배합을 준비하여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50년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심을 받으시고 더욱 영광을 받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번 성탄을 맞이하여 자기를 낮추고 비우신 예수님께 온전한 경배를 드립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경배드립니다. 올바른 경배는 신령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동방 박사들은 보배합을 드리고 영수증 하나 받지 않았지만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여 돌아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역사에 길이 남는 첫 이방인 경배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번 성탄절에 성탄 수양회를 하면서 더욱 깊이 있고 의미있는 성탄절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기쁘고 즐거운 성탄!
말씀 마태복음 2:1-11
요절 마태복음 2:11
아기께 경배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나온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첫째, 경배자의 자세를 배우고자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배우고자 합니다. 셋째,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학자들이요 구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소동한 유대인들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메시야이 별을 보고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주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도 되십니다. 그는 만민의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성삼위 하나님께 경배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헤롯 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헤롯 왕은 악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BC 37년에 왕이 되어 BC 4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유능한 왕이었지만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로마 군인들이 성전 보물을 탈취하고자 했을 때 군인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 성전 진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성전 건축을 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켰습니다. 토목사업도 많이 벌였습니다. 로마 황제와 외교도 잘했습니다. 그는 가장 사랑했던 아내를 간통 혐의로 죽이고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심신쇠약에 걸려 권력을 찬탈하려한다는 의심 때문에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맏아들 안티파테를 반역자로 처형한 후 5일 후에 죽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증오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물론 그의 근친 중에서도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두운 시대에 예루살렘 남쪽으로 8Km 떨어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1b,2).” 동방은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인데 500-1000Km의 거리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먼 거리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메시야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 별은 민수기 24:17절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별을 관측하고 연구하던 박사들은 이사야 9장에 예언된 한 아기와 연결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서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별을 탐구하고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현장에 가서 확인하고 경배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경배란 무엇입니까?
첫째, 경배란 신적인 대상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할 때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경배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인격은 지정의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성경은 특별 계시라고 말합니다. 일반계시는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합니다. 참된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헛된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감정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찬송과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예배에서 감격과 감동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감동적인 간증을 들을 때, 눈물로 회개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기쁨을 체험할 때, 사람에 대한 긍휼이 북받쳐 오를 때,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할 때,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충성과 헌신을 결단하게 합니다. 사랑도 의지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감정보다 의지적인 표현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고 의지적으로 순종할 때 감정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할 때 생명이 충만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했는데 힘을 다한다는 것은 물질을 드려서 사랑을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보배합을 드려서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둘째, 우리가 경배드리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은 다스리는 왕이요 목자이십니다. 그는 한마디로 하면 목자 왕이십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와 죽음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목자의 리더십은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목자는 양이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한 삶을 얻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삯꾼이요 도적입니다. 삯꾼은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에게 돌아올 삯을 위해서 일합니다. 도적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양을 헤칩니다. 헤롯은 무력을 사용해서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백성들은 그가 두려워서 순종했습니다. 마음으로는 반발심이 가득했습니다. 헤롯은 자신도 죄의 종이 되었고 죄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자기 갈 길로 가는 양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죄의 삯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다스려 주십니다. 그는 사랑과 정의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인격적으로 사랑해 주심으로 우리 마음을 다스려 주십니다. 그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감격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충성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통치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자신도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모든 것을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하는 것도 일차적인 목적은 죄 가운데서 멸망할 죄인들을 구원하고 예수님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열정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죄와 사탄의 통치를 받습니다. 한 회장은 야구방망이로 회사를 다스렸습니다. 임원들도 회의 시간에 늦으면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야구방망이로 때렸습니다. 그는 돈의 위력으로 직원을 다스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 자기의 종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전한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온전한 사랑은 우리 마음에 있던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가운데 하나님을 일생 경배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한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도 누가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삶의 질과 형태가 크게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영적 리더로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각자 속한 곳에서 선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또 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셨습니까?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심으로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사람을 섬기는 일들이 많이 있지만 자기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조건 회개하라고 말하면 너나 회개하라고 반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사람은 영적 거울과 같은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도 고치고, 먹을 것도 주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오천 명을 앞에 두고 삼일 간을 꼬박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배가 고프고 돌아갈 때에 기진할까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신 또 한 가지 이유를 마가복음 1:38절에서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은 전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전도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 나오도록 돕는 것입니다. 전도한 사람들을 양육하여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니는 대학과 우리 동네에 기여를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사람 살맛이 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공의가 실행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합심동역해서 사람들을 섬기고자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많이 추락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버리고 번영만을 추구할 때 그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과 문제를 깊이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자기를 비우는 것이요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그의 왕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들은 시이저와 알렉산더 대왕이 그들이 정복한 땅과 병사들에게 용기를 심어준 사실에 대해서 감격하여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분에 대한 기억으로 신실하고도 완전히 헌신되어 그를 위하여 싸우는 군인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나의 프랑스 군대는 내가 사는 동안에 나를 배반했습니다. 알렉산더, 시이저, 클레망, 그리고 나 자신도 모두 자신의 왕국들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쉴만한 곳은 어디입니까? 무력에 호소한 곳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에 기초하여 그 분의 왕국을 혼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백 만의 사람들이 그분을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려고 합니다. 나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도록 많은 무리들을 격려하였고 마침내 나의 눈과 나의 목소리가 빛나고 나에게서 말이 나갈 때 그들의 가슴에 불이 당겨졌으나 지금은 나 홀로 세인트 헬레나 섬의 이 바위에 수갑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제 와서 누가 나를 위해 싸워주고 대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 승리의 투쟁을 할 것입니까? 나의 깊은 상처와, 전세계에 전파되고 사랑 받으며 찬양을 받으며 전세계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역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수많은 선교사들과 복음 전도자들과 신자들을 통해서 경배와 사랑과 충성을 받으시고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도 더욱 마음을 드려서 주님께 경배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어떻게 경배를 드려야 합니까? 헤롯은 박사들을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는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는 속임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박사들까지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헤롯의 의도를 알고 박사들에게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경배자와 거짓된 경배자를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구별하셨듯이 헤롯의 경배와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구별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거짓과 죄악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 예배를 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한 것은 별 자체를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별이 지시하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그들은 별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이제까지 맛볼 수 없었던 무한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박사들의 기쁨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구주 탄생에 대해 무관심한 택한 백성들의 소동과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기쁨도 있습니다. 에버랜드에 가서 느끼는 기쁨도 있습니다. 음악이나 작품이나 영화를 보고 누리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죄사함을 받은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그 말씀을 듣고 교제하며 그의 뜻을 행할 때 오는 기쁨, 그를 예배할 때 오는 기쁨은 신령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오는 기쁨은 우리를 힘있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이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고 누릴 때 기쁨은 배가 됩니다. 죄의 쾌락이 있지만 그것은 독과 같은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일생토록 그 안에서 이런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이번 성탄에 동방박사들이 누렸던 기쁨이 우리에게도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기를 본 동방 박사들을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헤롯이나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힘을 다해서 경배했습니다. 그들이 여기까지 찾아오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해야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드렸는데 그 속에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황금은 동서고금을 통해 매우 값지고 불변하는 성질의 귀중품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유향은 값비싼 향료로서 반질반질하고 향내나는 흰색의 액체입니다. 몰약은 아라비아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추출되는 것으로서 고가의 향기를 지닌 액체입니다(시 45:8;아 3:6). 이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내지는 마취제로 사용되었습니다(막 15:23). 이 예물 가운데 황금은 메시야의 왕권을,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그리고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왕과 제사장과 그분의 장사되심을 각각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 예물들은 모두가 값비싼 것들로서,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신하였을 때(14절)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성탄 보배합을 드리고자 합니다. 2011년 UBF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정성스럽게 보배합을 준비하여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50년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심을 받으시고 더욱 영광을 받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번 성탄을 맞이하여 자기를 낮추고 비우신 예수님께 온전한 경배를 드립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경배드립니다. 올바른 경배는 신령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동방 박사들은 보배합을 드리고 영수증 하나 받지 않았지만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여 돌아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역사에 길이 남는 첫 이방인 경배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번 성탄절에 성탄 수양회를 하면서 더욱 깊이 있고 의미있는 성탄절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기쁘고 즐거운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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